안개속에 갇힌 촉촉한 아침이다. 대간길 서른 세꼭지 중,
오늘은 그 아홉 번째 꼭다리의 그리움 길을 더듬어 가는 날.
약속의 장소로 향하는 이른 아침,
두지바구의 배웅길엔 첫사랑 무심바구와 두 번째 예쁜사랑 봄이가 함께 한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 사거리 신호등앞에서 우회전을 하려 잠시 주춤이는데
높은 건물 앞마당 작은 화단에
주황색 석류꽃이 기쁨으로 대간길 첫 가슴을 열게 한다.
안개 속이지만, 느낌이 좋은 아홉 번째의 출발이다.
대형 버스한 대에 작은 버스 하나, 아침 안개를 가르며 달려가는 대진고속도로.
산청휴게소에서 아침을 못한 사람들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여인네들은 커피 타임을 즐긴다.
밝고 환한 모습들, 오늘따라 유달리 많은 여인네들이 참석했다.
산이 좋고, 사람이 좋고, 그래서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의 얘기가 정겹다.
휴게소를 빠져 나와 도로변에 노랗게 흐드러진 꽃들과 잠깐 눈맞춤 하나 했었는데,
차는 벌써 신풍령에 다다랐다. 남은 구간중 가장 여유론 마지막구간.
깊이 느끼며 담고 가는 산행이 되리라는 마음으로
9시가 조금 지난 시간, 촉촉한 산길을 따라 첫 발자욱을 내 딛는다.
밤새 내린 이슬 같지는 않은데 물기를 머금은 잎새들이 상큼하다.
늘 그래왔듯 시작은 첨부터 가파른 오르막.
꼴찌로 뒤따르는 숨길은 여전히 벅차다.
20여분 흥건히 땀을 쏟고 나니 조금은 편안한 능선.
하늘이 흐려있고 등산로는 울창한 수림의 그림자에 눌러 침침하지만,
앞뒤로 이름 같은 두 여인네의 밝은 아침 수다가 대간길을 열어 준다.
편안한 하루의 일정이 되리라 했었는데,
달려가는 꾼들의 발길은 아무도 붙들지 못하는 것 같다.
지리 당일종주 달리기 꾼들보다 더하다.
가슴에 담아 가리라는 마음은 언제나 희망일 뿐이고
발을 붙였다하면 그냥 끝장을 보자는 꾼들의 건성,
해서, 끝내고 돌아가는 발길은 늘 짠한 아쉬움뿐이고,
미로속을 지내 온 것 마냥 멍할 뿐이다.
이건 아닌데, 분명 이건 아닌데,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현실. 따라야만 한다.
1시간을 정신 없이 쫒아 가든 선두는 어느 산비알 키 작은 싸리나무 능선에
퍼질고 앉아 휴식을 즐긴다. 달려가든 마음들도 힘들긴 마찬가지 였나보다.
숨고르고 간식도 먹고 땀도 식히고,
오랜만의 휴식 끝에 지도를 펼치고 위치를 물어보니. 호절골재쯤 이라고..........
수정봉, 된새미기재는 거친 숨길 아래로 흘러버렸나 보다..
오른쪽 중턱으로 볼 수 있다든 금봉암을 찾아보며 조금 여유론 발걸음을 옮긴다.
10시35분
삼봉의 첫 봉우리. 조그마한 돌탑이 있고 앞으론 희뿌연 운무속의 산릉들이 꿈처럼 졸고 앉았다.
이어 맞게 되는 1254m의 삼봉산.
작은 대리석 기둥에 덕유 삼봉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늘의 첫 고봉인데 그냥 지나치면 서운하니 추억 몇컷을 새기고
거치른 암릉길을 지나 소사동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 삼거리 갈림길.
선두가 보이지 않아 잠시 주춤인다. 시그널은 분명 오른쪽이다 싶은데,
길은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오른쪽 내리막 길이 맞는 길이다.
가파르고 약간의 비에 젖은 미끄런 흙 길이다. 조심스럽다.
30여분 쏟아졌을까? 잡풀더미를 지나 임도에 내려서니 오른쪽으로 산사태가 난
자갈밭 평원이 개망초로 화원을 이루었다.
다시 이어지는 능선은 찐분홍 싸리꽃과 미역취가 우거지고,
첫여름 인사의 정겨운 뻐꾸기 울음도 들린다.
아침나절 부끄럽던 햇살도 배시시 얼굴을 내밀고....
그리고 이어 고랭지 채소밭이 나타나고,
솔가리 폭신한 작은 능선하나를 넘으니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나온다.
한나절의 산행이 끝난 것 같다.
삼봉산의 마지막 자락엔 하늘을 찌르는 낙엽송이 길 양옆으로 치솟아
달려 온 반나절의 피곤한 몸들을 편안한 그늘길로 안내한다.
무풍과 거창으로 이어지는 지방도.
한적한 산골의 차길엔 끝나지 않은 봄의 일을 마무리짓는 경운기와 트랙터의
소리가 산길을 메우고 낯선 이방인의 접근을 경계하는 경공들의
울부짖음이 산골짝 하늘에 메아리진다.
소사고개
꾼들의 쉼터, 작은 가게 앞마당에 쭈-욱 다리를 뻗고 퍼질고 앉는다.
여기저기 아침에 보았든 얼굴들을 오랜만에 만난 듯 밥보다 얘기들이 정겹다.
개장속에 갖혀진 눈이 휘둥거런 견공들, 58dog 견사랑 여인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배낭 깊숙이 숨겨진 오징어 다리.
산속의 견공들에게 친하고 싶은, 그래서 늘 내 배낭엔 마른 오징어가
대기 중이다. 다리 몇 개를 꺼내어 던져 주니 신이 난다.
침 묻혀 찜 해 놓고, 또 꼬리 치며 달랜다. 이쁜 것들.
그리고 펼쳐보는 점심꾸러미.
푸짐히 어우러진 식탁이 갈수록 진수성찬이다. 그런데 왜 늘 입은 깔깔할까?
밥보단 마주하는 나무아래 보라색 꽃이 더 사랑스럽다.
단발머리 학창시절 부끄런 편지 속에 꽃말은 쓰지 못하고 꽃 이름 새겼던 보라색 물망초,
이제 그 꽃말도 세월이 흘러 바꿔 버렸다니("제발 나를 잊어달라") 웃어 넘기는 농담 속에
아련한 옛 추억이 그립다.
12시40분,
개짓는 소리를 뒤로하고 배추밭사잇길 야산을 따라서 오후의 산행이 시작된다.
정신 없이 지나쳐 가는 산릉 들이지만 그런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반갑고 우리들의 발걸음을 가벼이 해 주는 것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다.
수컹과 뻐꾸기의 울음이 여유론 야산 언저리엔
개망초, 토끼풀, 엉컹퀴, 꿀풀. 그리고 이름모를 풀꽃들이 흐드러졌다.
뻐꾸기 울음과 어우러진 대간릉의 초하가 멋들어진다.
배추밭길을 지나 작은 산모롱이를 돌아 내려서니,
우렁찬 포크레인 소리가 산릉을 자르고 허연 마사의 살점들은 아픔을 토한다.
헤쳐진 공사장을 가로질러 임도를 따라 올라 오른쪽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식후의 오르막은 힘들고 역겹기도 하다. 얼마나 올랐을까?
조망이 후련한 산비알 언저리 무명의 산소 앞. 그냥 등 기대고 드러눕는다.
능선을 타고 오르는 바람, 햇살을 가린 구름.
경남과 경북을 가르는 도계의 산 줄기, 이만큼 행복한 여유가 어딨을까?
차로 달려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오전의 달려 간 시간은 오후의 여유일까?
이름 모르는 봉우리를 올라서 뒤돌아 보며 가슴으로 바람을 안을 때 마다.
왕언니의 입가엔 그리운 동요가락이 흘러나온다.
"여름에 대간꾼이 산행을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삼도봉에 올라 먼저 지나간 올케와 오라버니의 흔적을 보며
왕언니의 가슴은 또 한번 새로운 감회로 젖어든다.
오후 2시, 대덕산으로 향하는 맘이 여유롭다.
억새와 키 작은 싸리의 비탈진 능선, 그 속으로 하나씩 피어오른
당근꽃을 닮은 하얀 야생화를 보며 셔터를 눌러 본다. 그언젠가
한 자락 추억이 되살아 날련가......?
한 비탈을 오르면 언제나 쉬어 가는 자리가 있다.
쉼터의 공통점 비탈 언저리 조망 좋은 한 평 남짓의 약간 편평한 땅.
배낭 내리고 퍼질고 앉는다.
저 만치 건너 능선.보일락 말락 내리막을 내려서는 후미가 안쓰럽다. 또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할것이니, 묘한쾌재.
손흔들며 잘하노라, 그렇게 하면 되는거라, 약올리시는 어떤 분.
한참 웃으며 앉았다가
배낭을 비워가야 한다며 꺼낸 김선생님의 손에 노오란 참외 둘, 별 생각은 없었는데
권하는 정에 한 조각 받아 깨물어 보니 "아~하." 꿀맛이 따로 없다.
하나만 하다가 두 개를 후닥 먹어치우고
헉헉이는 후미의 숨소리가 발아래 닿을 쯤 또 우리는 약을 올려놓고 도망을 간다.
1290 대덕산.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 편평하고 널찍한 헬기장.
사방으로 조망이 여유롭고, 회색구름 아래 뿌연 능선들이 다음날을 기다리게 한다.
3시,
아직 동짓달 한나절이 남았는데, 오늘의 남은 산행의 여정은 한 시간 남짓.
조금만 더 끊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다음구간의 길이 만만찮다는데......
가파른 내리막을 잠시 내려서니, 꾼들의 오아시스 샘터가 있다.
지리의 마지막 구간, 깃대봉을 지나오면서 보았던 그 샘터의 글귀와 똑같은 글 한자락
"사랑하나 풀어 던진 약숫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늘 짝사랑으로 두런이는 내 그리움의 넋두리도 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이 없는데,
오늘의 발길은 또 이쯤에서 끝이 나야 하는 것 같다.
이 산자락엔 유달리 루사의 상흔이 깊다. 깊숙이 패여 버린 기다란 협곡
대덕산 아랫자락, 마지막 생채기를 아픔으로 새기며
덕산재 고갯마루에 내려선다.
바람만이 일렁이는 주인이 따나버린 휴게소 앞마당.
맘대로 널부러진 집기들과, 오랜시간 속에 퇴색된 휴지들이
누군가의 아픈 가슴을 삭이고 있다. 그렇지만 마당에 모여앉은 꾼들의
마음은 넉넉하고 여유롭다.
시간은 오후 4시, 해가 질려면 한참인데 하늘은 짙은 구름을 몰고 와 어둠이
내린 것처럼 금새 컴컴해진다. 곧 비를 뿌릴 것 만 같다.
과일 한 조각, 하산주 한 잔.
흐린 날씨 탓일까?, 빨리 끝낸 일정 탓일까? 맥주 한잔을 마시고 나니
으스스 한기가 스민다. 옷을 꺼내 어깨에 걸친다.
이윽고 하늘은 부슬부슬 비를 뿌리고, 작은 차를 앞세운 큰 버스는
기우뚱 기우뚱 서투른 걸음마로 꼬부랑 비탈길을 내려선다.
그런데, 차창을 떠나지 않은 까만 동자승의 얼굴.
함께 했었던 일행중의 한 사람. 이제는 홀로 대간꾼.
미소 뒤에 숨겨진 쓸쓸한 그림자가 흩날리는 빗줄기 만큼이나 처량해 보인다.
"고마워,"라고 하면 안되겠죠? 편안했었나요? 지난 주의 소식 올렸죠. 일요일 빠지면 서운해서 안되죠.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걸요. 그러고 보니 유월도 마지막이네요. 성하의 문턱 7월. 여름이 바쁘면 가을은 행복하겠죠? 벌써 가을을 꿈꾸네요. 행복하세요. "푸른하늘!"
첫댓글 지난번 종주 마라톤(?) 이후 소식이 없어 궁금했더랍니다. 잘 다녀오셨네요. 저도 잘 다녀온듯 합니다. 언니의 글을 통해서.... 오늘이 6월의 마지막날이라네요. 남은 반년동안 남은 대간길 잘 다녀오시길 미리 기원해 봅니다.
"고마워,"라고 하면 안되겠죠? 편안했었나요? 지난 주의 소식 올렸죠. 일요일 빠지면 서운해서 안되죠.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걸요. 그러고 보니 유월도 마지막이네요. 성하의 문턱 7월. 여름이 바쁘면 가을은 행복하겠죠? 벌써 가을을 꿈꾸네요. 행복하세요. "푸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