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이 가득인 옛 절터의 보물들을 만나다. 물걸리사지(物傑里寺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88-4 / 홍천군청 문화관광과 033-430-2323
천년 보물들의 만남, 옛 부흥하여 영화롭던 절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만을 지키고 선 보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돌보는 것은 그들 스스로입니다. 사정이야 없지 않겠지만, 황량한 마음은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옛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는 그 자리에 가서야 더 가깝게 느낄수 있다. 옛것의 소중함,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 현재 존재하는 우리들의 먼 과거의 모습일수도, 또는 삶의 답습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끔씩 만나는 옛 절터의 휑함은 한편으로는 여울지는 마음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지만, 내심은 반가운 마음이 그보다 더하다. 과거, 영화로웠던 자리, 부흥하여 절집의 끝과 끝을 알수 없을 정도의 대가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언제 어찌 사라졌는지 조차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현재, 그 모습을 만나기 위해 홍천을 향한다.
물걸리사지, 찾아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가 않다. 최첨단의 네비도 주소를 입력하여 출발하였건만 길을 잘 못들어 말그대로 산으로 간다. 꼬불꼬불 길을 가다가 한창을 공사중인 공사판에 서서는 더 이상은 갈수 없는 길을 만난다. '된장~!' 지도책을 펼쳐 보고 물걸리사지를 찾으니 올라오던 길, 보건소의 맞은편 자락이다. 길손은 보건소의 앞길을 통과하여 올랐던 것이다. 다시 내려서 왼편으로 길을 틀고 나니 기미만세공원을 만난다. 너른 공터 이곳도 여전히 무엇인가 공사중(?)인지 수시로 덤프트럭이 들락거리는 통에 먼지 투성이다. 다행히도 그 자리에 계신 어르신께 물걸리사지를 여쭈니 친절하시게도 알려 주시길, "저 위 화장실의 앞으로 가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만난다"고 하신다.
강원도기념물 제47호이자, 보물 제541호, 542호, 543호, 544호, 545호의 5점이 보관되어 있다. 과거 통일신라 시대 홍양사(洪陽寺)라는 절집이었다 전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는바 없이 빈땅에 덩그러니 보물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67년에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구를 발견하였으며, 철불 조각과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기와등의 수많은 자기들의 조각등이 발견 되면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유지 되었던 절집으로 추측하고 있다.
물걸리사지 삼층석탑(物傑里三層石塔, 보물 제545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른 석탑이다. 기단의 면석에 버팀기둥과 모서리 기둥을 새겨 넣었으며, 기둥돌 받침이 1, 2층은 5단이고, 3층은 4단이다. 몸돌의 추녀 아랫선이 수평이며, 윗선이 살짝 올려졌다. 1층부터 3층까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으며, 3층 몸돌에 사리 구멍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이 남아 있으나 철수를 세웠던 원형구멍이 남아 있을뿐 없어졌다. 총 높이는 4m다.
그렇게 오른길, 물걸리 사지의 삼층석탑을 먼저 만기전에 동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만큼 민가와 가차이 붙어 있는 물걸리사지다. 황량한 절터의 풍경이 참 인색한 기분이다. 마른 소리로 짖어대는 개만이 이 자리를 지켜고 있는듯 제 풀에 지쳐 모가지가 아플때까지 짖어 대더니 결국 조용해진다.
개가 지키는 절터, 물걸리사지 물걸리 절터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현재까지 그 자리에 서있는 듯한 보물 제545호인 삼층석탑 앞에 선다. 기단이 다소 불안한 형세로 선 삼층석탑은 제 빛만 가지고 있을뿐 아무말 없이 그자리에 선다. 아마도 절터의 유래를 알고자 탑을 해체 복원 했을것 같은데, 기왕 복원 할것이라면 조금은 더 든든한 복원이 아쉽기만 하다. 달랑 끼워져 맞추어진 조약돌로는 보물이라는 인식 보다는 급하게 보여줘야 하는 사람의 마음만을 대변 할뿐, 아픔은 뒤에 두고 석탑은 천년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듯이 별스럽지도 않다는 듯 그저 말 없이 묵묵히 다시 절터를 지키고 있다.
보물 4점을 보관중인 보호각으로 발길을 돌린다.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대좌와 불대좌및 광배의 4점의 보물을 보관하는 보호각이다. 1982년에 가람을 짖고 불상을 옮겨 보존하는 중이라 하는데, 어찌 인기척이 없다. 즉, 지키는 이 하나 없다는 뜻이다. 문을 활짝 열린 상태이고 괄괄대는 성질 머리 고약할것 같은 개만이 전부인데, 그나마 놈의 성질이 어찌어찌한 모양인지 묶여 있는 상황이다.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폈지만, 그 흔한 cctv조차도 없다. 마을 전체가 떠들썩한 공사에 홍역을 앎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것이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보물들인 것이다.
황량한 계절과 같은 황량한 분위기, 스산함은 둘째치고라도 명색이 보물 5점을 보유한 옛 절터에 대한 관리가 허술해도 너무 허술하다. 물론, 막아 놓고, 닫아 놓는 다고 해서 보전과 보존의 가치가 인정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길손이 찾은 물걸리 사지에는 인기척 하나 없는, 어느 누구 함부로운 행동에 대한 제재를 취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보호각과 삼층석탑의 직각을 이루는 곳에 옛 절터의 흔적들을 모아 놓았지만 이 역시 필요하다면 누구나 가져다 쓸수 있을 정도의 방어가 없다. 길손의 지나친 노파심일까? 싶지만, 많은 아쉬움을 두고 온 물걸리사지에 대한 단상이다.
보물 4점을 보관중인 보호각
물걸리 불대좌 및 광배(物傑里 佛臺座,光背 보물 제544호) 광배와 대좌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광배는 불상이 앉게 되면서 가려지는 부분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의 빛을 나타내는 두광과 몸의 빛을 나타내는 신광은 두줄의 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선 안쪽에는 넝쿨무늬가, 바깥쪽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선 위에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부처인 화불이 구름위에 앉아 있으며 제각기 다른 수인을 하고 있다. 대좌는 팔각형을 기본으로 윗단에는 연꽃의 꽃잎이 위로 향하게 되어 있으며, 아랫단에는 그와 반대로 아래로 향한 연꽃의 꽃잎이 조성 되어 있다.
물걸리 석조여래좌상(物傑里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541호)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조성 된 불좌상이다. 광배는 없고, 오랜세월 풍화로 얼굴은 마모되었으나 불대좌는 잘 남아있다. 육계가 크고 눈, 코, 입이 비교적 작게 표현 되어 있다. 손의 형태는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불대좌의 상대석은 연꽃으로 중대석에는 팔부종이, 아랫단에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物傑里 石造毘盧자那佛坐像, 보물 제542호)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불상과 달리 왼손과 오른손의 모양이 바뀌어 있으며, 결과부좌 역시 왼발을 위로 한 항마좌를 하고 있다. 넉넉한 살집의 얼굴형상과 건장한 체구, 화려하게 장식된 불대좌등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고있다.
물걸리 불대좌(物傑里 佛臺座, 보물 제543호) 불상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와 부처가 앉은 자리인 대좌(臺坐)만 남아있다. 마모의 상태가 심한 광배에 비하여 거의 완전한 상태의 대좌다. 팔가을 기본으로 하여 3단으로 구성 되어 있다. 윗단은 끝이 위로 향한 연꽃이 여러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단에는 팔부종이 1면씩 새겨져 있다. 하단에는 가릉빈가 등을 포함하여 향로와 새의 몸에 사람의 형상을 새겨 넣었으며 연꽃으로 이루어진 팔각의 단으로 구성 되어 있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
출처: 길손의 旅行自由 원문보기 글쓴이: 길손旅客
첫댓글 폐사지에 많은보물과 유물이 있군요
함 가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출근길에 수원의 팔달문 (남문)을 또 새롭게 복워공사하는것을 보면서
옛것그데로가 참 좋을텐데 왜 자꾸 현대에 맞춰 시멘트들을 입힌느지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옛것의 아름다움을 올려주신님의 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