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石像)의 노래
김관식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햇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시집 『김관식시선』, 1956)
[어휘풀이]
-엉룽진 : ‘아롱진’의 큰 말. 어룽지다. 어룽어룽한 점이나 무늬가 생기다.
-동정 : 한복의 저고리 깃 위에 조붓하게 덧대어 꾸미는 하얀 헝겊 오리.
-궁그르다가 : 구르다가, ‘궁그르다’는 ‘구르다’의 방언
[작품해설]
김관식은 한문과 동양의 고전에 능통하여 동양인의 서정 세계를 동양적 감성으로 구상화함으로써 특이한 시풍을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세렴련된 이어를 통하여 서양 외래 사조를 배격하고 밝고 심오한 동양적 정신의 추구를 보여 준다. 세속적 생활 방식을 무시한 기행(奇行)으로 유명했던 그는 결국 가난과 질병으로 36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 시는 그러한 그의 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석상을 소재로 하여 한없는 그리움의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너무나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돌이 되었다는 이 시의 내용은 백제 가요 「정음사」나 신라 시대에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ㅇ르 그리워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설화와 접맥되어 있다.
또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김소월의 「초혼」에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그려져 있다.
이 시는 행이나 연 구분은 물론, 구두점까지도 철저히 배제시킨 산문시이다. 이러한 형식상 특성은 독자에게 거침없이 작품을 읽게 함으로써 그리움으로 인해 돌이 되었다는 작품의 내용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효과가 있다.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첫 문장은 노을이 질 때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임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정을 보여 준다.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는 임이 화자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출렁이는 물결 소리’는 화자가 어느 바닷가에 서 있음을, ‘동정’은 화자가 여성임을 알게 해 준다. 셋째 문장은 극한적 갈망 때문에 화자가 돌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임에 대한 하염없는 그리움과 눈썹 가장자리에 번지는 피눈물, 피눈물에 얼룩진 동정, 그리움을 전할 길 없는 답답한 마음, 맺힌 한으로 돋아난 혓바늘 등으로 말을 잃은 화자는 결국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는 절망의 극한 속에서 말문이 열리는 대산, 하늘을 우러러 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 ‘돌’은 임에 대한 화자의 사무친 그리움의 돌이며 슬픔과 한이 응결된 돌이다.
[작가소개]
김관식(金冠植)
현현자(玄玄子), 우현(又玄)
1934년 충청남도 논산 출생
동국대학교 농대 중퇴
1952년 시집 『낙화집(洛花集)』 발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연(蓮)」, 「계곡에서」, 「자하문 근처」 가 추천되어 등단
1970년 사망
시집 : 『낙화집(洛花集)』(1952), 『김관식시선』(1956), 『다시 광야(廣野)에』(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