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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해야 할 자들
롬 16:17-20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롬 16:17-20 / 이 편지를 끝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당부해 두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금까지 여러분이 배워 온 것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쳐 분열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신앙을 뒤엎는 자들을 멀리하십시오. 18) 그런 교사들은 우리 주 예수를 섬기는 게 아니라 자기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그럴듯한 말에 순박한 사람들은 자주 속아 넘어갑니다. 19) 그러나 여러분만은 믿음이 굳고 또 진실하다는 것이 온 세상에 다 알려져 있으니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언제나 옳은 일에 현명히 처신하고 어떠한 악에도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0) 평화의 하나님께서 사단을 곧 여러분의 발밑에 짓밟히게 두실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주의 출신의 거짓 교사들이 안디옥과 갈라디아, 그리고 고린도에서 복음을 방해하는 것을 보고 로마교회에게 그들을 경계할 것을 말씀합니다.
바울의 경고(17-18) 바울은 본 서신을 집필하던 고린도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여 교회에 분열 현상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교회 내부의 암적 요소인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문안 인사에 덧붙여 권면합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으로 오직 자기의 배만 섬길 뿐만 아니라, 교묘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분쟁을 거치게 하는 교리적 거짓이나 불의한 행위를 말하는데(마 24:24; 행 20:27-32; 갈 1:6-8; 엡4:14), 바울은 이들로부터 떠나라고 권면합니다. 이와 같은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자기의 배로 삼는 자 들입니다(빌 3:19; 벧후 2:1-3). 그러므로 성도들은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거짓 교사나 거짓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19-20) 바울은 자신이 쓴 모든 서신에서 항상 그 서신을 받는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롬 1:8). 비록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서는 엄격하게 경고하지만 본문에서도 로마교회 성도들의 순종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가지 더 원하는 것은 선한 것에는 지혜롭게, 악한 것에는 미련하기를 원합니다. 선한 것에 지혜로운 것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마 10:16). 그리고 악한 것에 미련한 것은 악은 악으로서 어디까지나 거부할 뿐 아니라 악과는 혼합 또는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바울 당시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거스려 어리석고 허탄한 교훈을 퍼트려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갈 1:6-9; 2:4; 딤후 3:8; 4:34). 결국 평강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우리에게는 최후의 승리를 주실 것이며, 우리의 발아래서 그들을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창 3:15).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적용: 오늘날에도 성도들을 향한 이단자들의 방해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대처하는 방법으로의 방임주의나 무익한 변론은 오히려 분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됩니다. 당신은 이단자들이나 거짓 교사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합니까?
신앙이 자라고 교회의 질서가 세워질 때 사탄은 늘 성도와 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해 시험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짓 교사와 거짓 복음입니다. 진짜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를 가지고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도록 만들고 성도를 현혹시켜 넘어지게 합니다. 지금도 거짓 교사는 활동하고 있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내 욕심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설 교 >
로마서를 마치면서
로마서 16:17-27 / 조상호 목사
지난 3월12일 주일부터 로마서 강해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부활주일, 어린이주일, 성령강림주일, 한국의 순복음신학원 원장님이신 김경문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여 주신 7월 첫째주, 추수감사주일 등 5번을 제외하고 지난 36주 동안 이 강단에서 매주일마다 로마서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처음에 복음의 진수가 가득 들어있는 이 로마서 시작할 때, 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굉장히 힘든 때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짧은 목회 기간 중에 가장 큰 위기 때였고, 교회적으로도 지난 93년 8월에 창립된 이후로 가장 어려운 때에, 성령께서 저에게 '복음으로 돌아가라', '말씀의 기초로 돌아가라'는 마음을 주셔서 로마서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로마서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로마서 말씀을 중간 중간의 내용을 설교한 일은 있었지만, 로마서 전체를 연속으로 강해한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3월12일 주일에 덜컥 로마서 1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놓고도 포기하고픈 생각이 처음에 몇 번 들었습니다. 한 두주도 아니고 16장까지 계속한다는 것이 너무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길 낭떠러지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뒤로 물러가지 않겠다는 한가지 각오로 복음의 진수가 가득 담겨있는 이 로마서 말씀에 목숨걸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막지 않는 이상, 언제 끝나게 될지 몰라도, 어떻게 인도하실지 몰라도 끝장을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로마서 강해 말씀을 시작할 때, 저는 창세기 32장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던 야곱을 생각하며 저의 영어 이름은 사무엘의 약자인 이지만, 이번 로마서 말씀을 대할 때는 야곱이 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야곱이 천사에게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하지 않겠다'고 매달린 것처럼, 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결단코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매주일 로마서 말씀과 씨름을 했습니다. 1주일 내내 본문을 묵상하고 토요일과 주일 새벽까지 말씀을 씹고 또 씹으며 먼저 제가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내가 먼저 은혜를 받지 않으면 주일에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매주일 로마서 말씀과 씨름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서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하던 지난 36주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성령께서 말씀으로 위로를 주실 때는 모든 동작을 그만두고 밤새 울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또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실 때는 저의 서고에서 혼자 부흥회를 한 적도 수차례나 됩니다. 결국 로마서 말씀이 저를 살렸습니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의 감격과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의 열정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할렐루야! 또 이 로마서 말씀은 우리 교회를 살렸습니다. 로마서 말씀을 매주일 나누는 가운데, 식었던 성도님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빈자리들이 하나 둘씩 채워지고 오히려 매주일 의자를 더 가져다 놓아야 했습니다. 영혼 구원의 역사, 회복의 역사,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비실비실 하던 젊은 청년들이 살아나서 눈빛이 초롱초롱해졌고, 이들이 교회의 선봉대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여자 성도님들이 살아났습니다. 목숨걸고 헌신하던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자 성도님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습니다. 방관하던 남자 성도님들에게서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미지근하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남자 성도님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로마서 말씀을 마치면서 얻은 또 하나의 저의 결론은 역시 주님의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른 뼈와 같이 바싹 마른 심령이라 할지라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로마서의 대단원을 내리면서 끝까지 로마서 말씀을 선포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한 36주 동안 함께 로마서 말씀 앞에 귀기울여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은 37번째로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통 편지를 쓸 때 먼저 인사를 하며 상대방의 근황을 물어 봅니다. 그리고 쓰고 싶은 본론을 장황하게 기록한 다음, 마지막 인사를 하며 글을 마칩니다. 그런데 편지를 다 썼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할 말이 또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편지 끝머리에 당구장 표시를 하고 덧붙일 말을 적습니다. 이것을 추신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편지의 추신에 해당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은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말씀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바울에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악한 것, 즉 이단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귀하고 복된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한번 악한데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잘못된 이단에 빠지면 모두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이단의 특징과 또 이단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이단의 특징
이단이라 하면 한자어로 다를 이(異) 끝단(端)이라 하여, 처음은 같은데 끝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이단 중에서는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신앙촌, 몰몬교, 통일교 등과 같이 이단임이 분명히 밝혀진 것도 있지만, 언뜻 보아서는 정확히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똑같아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단들이 자기들이 원조이고 자기들이 진짜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다릅니다. 겉모습은 똑같은데 알맹이가 완전히 다릅니다. EX) 약 두달 전에 크라이스트처치에 엄청난 태풍이 분 적이 있었습니다. 매스컴에 의하면 몇십년 만에 불어닥친 태풍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시내 곳곳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의 뿌리가 뽑혀 쓰러지기도 하고, 나무 중간 부분이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피해를 입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금요집회에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만, 저의 집 앞뜰에 있던 한 나무도 뿌리 채 뽑혔습니다. 현관문 좌측에 서 있으면서 보기에 썩 괜찮았던 나무였는데, 엄청난 바람에 의해 뿌리 채 뽑혀져 옆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나무 밑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뽑혀진 그 나무 밑둥의 뿌리가 질병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키는 2미터가 훨씬 넘는 나무였는데, 뿌리는 완전히 썩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매우 정상적이고 건강한 나무같이 보이던 그 나무는 속에서 병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나무를 보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겉모습이 그럴듯하다해도 속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단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정말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알맹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의 특징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무식하면 넘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식하면 신세 망칩니다. 이단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넘어가서 패가망신합니다. 나중에 집 팔고 논 팔고 모든 재산 다 갖다 바치고도 다시 돌아오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빠져 나오고 싶어도 빠져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히 적을 알아야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어떻게 됩니까? 백전백승합니다.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단의 세가지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이단의 첫 번째 특징은 복음을 거스릅니다. 이단들은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가르칩니다. EX) 한 과학자가 벼룩의 특성을 살피기 위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벼룩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벼룩의 한 다리를 끊어 내면서 "뛰어!"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벼룩은 즉시 펄쩍하고 뛰었습니다. 한 다리를 더 끊어 내며 다시 "뛰어!"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벼룩은 또 뛰었습니다. 이 과학자는 이 같은 명령을 계속하며 여섯번째인 마지막 다리만 남겨 놓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는 벼룩이 뛰기가 좀 힘들어졌지만 나름대로 뛰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과학자는 드디어 마지막 다리까지 잘라버리고 또 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벼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과학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명령을 했습니다. "뛰어!" 여전히 벼룩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과학자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명령했습니다. "뛰어!" 그러나 불쌍한 벼룩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연구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벼룩의 다리를 모두 제거해버리면 벼룩은 청각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여러분! 웃기지 않습니까? 벼룩이 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벼룩은 다리가 잘라졌기 때문에 뛰지를 못하는 것이지, 청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과학자는 벼룩이 뛰지 못하는 이유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바로 이단들이 이와 같습니다. 이단들은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합니다. 자기 편의대로 해석합니다. 성경공부하자고 유혹하여 이상한 학설을 주장하며 지금까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행동하게 합니다. 말씀에 분명히 써 있는데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이론을 집어넣습니다. 이단의 두 번째 특징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분명히 (고전14:33,40)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고,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이단들은 이러한 교회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이단들은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움을 하는 대신에, 자꾸 교회 안에서 싸움을 일으킵니다. 수주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이단들은 세상을 향하여 발사되어 세상을 뒤집어 놓아야 할 미사일이 세상으로 발사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폭발하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단의 세 번째 특징은 거치게 합니다. 덫을 놓아 산짐승들을 잡는 것처럼, 함정을 만들어 죄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단들은 자꾸 모이지 않게 하며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결국은 믿음을 놓게 만듭니다.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이단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 대처해야 합니다.
2) 이단 대처 법
그러면 어떻게 이단에 대처해야 할까요? 이단에 대처하는 첫 번째 방법으로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17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여기에서 '살피라'는 말은 계속 응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적이 오는지를 감시하는 보초병처럼 이단들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들은 교묘해서 자기들을 결코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두 뿔을 달고, 시커먼 망토를 입고, 입을 쩍 벌리고 나타난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그럴듯하게 자신들을 포장하고 접근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이단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선한 것에는 지혜롭고 악한 데에는 미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이단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유괴범들이 어린아이들을 유괴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맛있는 사탕이나 과자를 주면서 어린아이들을 유혹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먹음직하고 달콤한 것으로 어린애들을 유인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사탕 뒤에 있는, 과자 뒤에 있는 악당들의 마수를 알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그들이 미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에 나와 말씀을 듣지 않고, 금요집회에서 말씀을 듣지 않고, 새가족모임과 개인양육반에서 말씀으로 양육받지 아니하고 말씀으로 훈련받지 아니하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수학문제 하나를 풀려고 해도 공부해야 풀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덮어놓고 시계추 마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고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이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EX)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비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1944년 12월 연합군은 6개월의 오랜 준비 끝에 독일군 진지 한 가운데를 공략하기 위해 한 작전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의 엉뚱한 책략에 의해 이 작전이 실패하고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심한 폭우가 내리는 밤에 독일군들이 미군 복장을 하고 미군 지프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연합군 지역에 침투하여 여기 저기에 세워 놓은 방향 표지판들을 아무렇게나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연합군들은 표지판을 따라 무작정 나아가다가 독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오히려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작정 교회만 다닌다고 저절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덮어놓고 따라오는 군중들이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영생에 대해 갈급한 자, 가나안 여인처럼, 백부장처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 말씀을 듣고 따라나선 안드레와 같은 사람들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인물들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영적으로 철이 들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아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아야 악한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양육 받고 말씀으로 훈련받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배운 말씀으로 무장하여 악한 이단들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이단을 대적하는 두 번째 방법은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17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여기에서 '떠나라'는 말은 '갈라서라', '피하라' '멀리하라', '배격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가까이 해서 유익한 것이 있는 반면, 가까이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은 가까이해서는 안될 당신입니다. 아예 이단하고는 상종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들을 대하면 대할수록 이단, 삼단, 사단에 빠집니다. 아예 그들을 단호하게 배척해야 합니다. EX) 시드니에서 한의원을 운영하시던 이모집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시드니지역에서 여러 가지 질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난 명의였습니다. 또 교회에서는 구역장으로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또 체육선교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하던 성실하고 겸손하고 신실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약 1개월 전에 그 분에 대한 안타까운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시드니 달링하버에 위치한 카지노를 출입하다가 가정이 풍지박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허구헛날 남편이 한의원은 비워둔 채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하자, 부인 집사님이 남편의 도박을 막으러 갔다가 그 부인까지도 도박에 빠져 결국은 은행에 있던 돈과 고급승용차, 그리고 으리 번쩍하던 집과 한의원을 다 날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잘 되던 한의원을 더 이상하지 못하고 온 가족이 한국으로 귀국했는지 시드니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박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심심풀이 도박이라도 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예 도박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단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이단들 근처에는 가까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단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다가, 자신이 이단에 빠지는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단들을 '돌이키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들을 '떠나라', 그들을 '멀리하라', 그들을 '배격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미혹의 천재들이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그들을 보면 말을 참 잘합니다. 재치가 있고 웃기기도 잘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꼬드겨서 돈을 거두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여러분!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자꾸 달리 해석하는 사람은 상대조차 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자꾸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아예 상종조차 하지 마십시오. 이단의 냄새만 보여도 근처에도 가지 마시고 집안에 들여놓지도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Watch Tower, 파수대라는 잡지를 들고 다니며 가가호호 방문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고한다고 거실에 초청하여 물 대접하고 커피 대접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아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악은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배격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단에 대해서 경고한 후에, 25절부터 복음의 능력과 축복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찬양으로 로마서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3) 복음의 축복과 능력
25절부터 27절까지는 길게 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한 문장입니다. 복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울을 바울되게 한 것은 이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5절에서 자신이 믿고, 자신이 증거하고,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이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자신을 견고하게 해 준 이 복음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또 구원받은 성도를 견고케 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복음에는 절망과 저주 가운데 사는 사람을 소망과 살맛 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로마서를 마치면서 사도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저도 이 복음이 저의 복음, 즉 '조상호의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복음은 절망 가운데 있던 저를 살려 주었습니다. 바싹 말라버린 마른 뼈와 같은 저를 생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마지못해 살던 저를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이 들어 주저 않고 싶을 때, 제가 처음 복음을 접하던 20년 전을 기억하면 그 때의 감격이 되살아납니다. 새가족모임을 하며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마다, 복음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마다, 저의 식어버린 심정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축복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 복음은 흔들리던 우리를 강건케 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강한 주의 군사로 만듭니다. 할렐루야!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대단원을 찬양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영원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기쁨이 사라졌습니까? 복음의 능력을 잊고 살고 있습니까? 마지막 로마서 말씀을 덮기 전에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37번째의 로마서 말씀을 마치기 전에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마지막 27절에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하고 외치며 찬양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축복의 삶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세 무궁토록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마음껏 찬양 드리시기 바랍니다.
지혜롭고 미련하라
롬 16:17~20
똑똑한 바보
오늘은 그동안 함께 살펴본 ‘겸비(兼備)한 신앙인’ 네 번째 주제로 “지혜롭고 미련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가끔 학교 뒷산에 올라보면 참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신학교 뒷산은 지금은 워커힐이라는 대형 호텔이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아차산’(해발 285m)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이 아차산에 올라서 보면 앞으로는 드넓은 한강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병풍처럼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자리 잡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래서 이 아차산은 삼국시대로부터 이곳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차산에 올라보면 지금도 남아있는 아차산성 터는 그 옛날 바보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도 남아있는 제법 유명한 장소입니다.
오늘은 바보 온달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고구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는 울보여서 그 어머니가 “너 자꾸 울면 바보 온달이에게 시집보낸다”고 했는데 그만 평강공주가 이 말을 정말로 믿고 궁궐을 나와 바보 온달이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평강공주는 궁궐을 나올 때 몸에 지니고 나온 금팔찌로 병든 말을 사서 잘 길러 준마를 만들고 그 말로 온달이 무술을 연마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왕이 개최한 사냥대회에서 이 온달이 큰 활약을 보여 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고구려의 장군까지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역시 남자는 장가를 잘 가야 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옛날 어떤 광고에 나온 문구처럼 “역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바보 온달 이야기를 좀 다르게 봅니다. 온달에게 붙은 ‘바보’라는 호칭은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온달은 바보다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무슨 뜻일까요?
온달이 정말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어수룩한 바보였다가 부인 잘 만나 갑자기 똑똑해 진 것이 아니라 본디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똑똑한 사람에게 ‘바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바보 온달 이야기가 나온 삼국사기에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라고 부른 이유는 지능 때문이 아니라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온달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발로 시장을 오가며 밥을 구걸하다가 바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효자 온달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난하게 바보 소리 듣고 살던 온달이 하루아침에 영웅이 된 것은 평강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틀림없겠지만 본디 똑똑하고 능력도 있던 온달이 다만 가난한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대를 받다가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약 장군으로 도약하게 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철저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이렇게 일약 출세한 온달 이야기가 평민들에게는 영웅담이었지만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귀족층들에게는 이 평민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위협도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달의 입장에서는 ‘영웅 온달’보다는 ‘바보 온달’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 고구려 귀족들의 견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므로 그 스스로도 잘난 척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입니다. 말하자면 온달은 진짜 바보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일부러 바보인체 했던 ‘똑똑한 바보’였다는 것이지요.
■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아주 똑똑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중에 참 똑똑하고 올곧은 분이 있습니다. ‘올곧다’는 말은 “마음이 바르고 곧다”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품이나 품성이 올곧은 것이 참 중요합니다. 아무데나 휩쓸리지 않고 이익이나 손해에 약삭빠르지 않고 늘 중심을 지키며 꼿꼿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꼿꼿하고 올곧은 분들이 계시고 이런 분들은 대개 주변의 존경을 받지요. 게다가 이 분은 아주 똑똑한 분입니다. 사람들이 다 알아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납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도 탁월하게 잘 했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후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줄곧 앞에 서서 달려온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 교회에 큰 분란이 일어나고 목회가 너무나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처음에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실력도 출중하고 너무나 올곧고 인품도 좋은 분인데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길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저런 소식을 들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너무 똑똑해서, 너무 올곧아서 문제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너무 똑똑하다보니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을 지나치게 신뢰한 것입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늘 옳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또 지나치게 성품이 올곧다보니까 도무지 타협이란 것을 모릅니다. 유연성이 부족합니다. 남을 잘 품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연한 나무가 잘 휘지만 부러지지 않고 너무 단단한 나무는 힘을 주면 부러지는 것처럼 때로는 전혀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부러지는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한쪽 편은 온달 형의 ‘똑똑한 바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좀 모자라 보이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래서 때로는 남들에게 ‘바보’ 소리도 듣지만 실은 속이 꽉 찬 사람들입니다. 또 한 편은 ‘자타가 공인하는 똑똑이’들입니다. 분명 누가 봐도 똑똑합니다. 능력도 실력도 출중합니다. 성품도 올곧습니다. 그런데 자꾸 남과 부딪치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과연 세상을 살면서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을 본받아야 더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이와 똑같은 문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로마교회의 거짓 교사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교회는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신천지 같은 수많은 이단들 때문에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당시 로마 교회도 거짓 교사들이 등장해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이 거짓 교사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이들을 영지주의라고 부르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이라는 분도 있지만 대개 율법주의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이들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복음과는 다른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면서 로마 교회 성도들을 현혹하고 교회를 혼란에 빠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읽은 본문 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사도 바울은 먼저 이들 거짓 교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지적합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①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바른 복음, 바른 교훈을 거슬러 다른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② 이들은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분쟁’이라는 낱말은 원어에 보면 쪼개어진 틈, 분열을 뜻합니다. 즉 이들은 로마 교회 안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게 만든 것입니다.
③ 이들은 ‘거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거치게’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론’입니다. 이 말은 ‘덫, 함정, 길에 놓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스캔들이 나면 그들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까? 이 스캔들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짓 교사들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해서 죄에 빠져 걸려 넘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 세 낱말에 나타난 것처럼 로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을 다투고 갈라지게 했습니다. 순진한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려고 든 것입니다. 평화를 깨고 분열을 조장합니다. 이것은 분명 사탄의 역사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20절에 보세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했지요?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평강을 이루어야 합니다. 반면 사탄은 ‘참소(헐뜯기=이간질)하는 자’로서 평강을 깨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하나님을 찾고 겉으로는 교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열매가 평강이 아니라 다툼과 분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사탄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사탄을 따르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단호하게 이들을 살피고 떠나라고 ‘권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권고나 권면의 의미가 아닙니다. 강력한 경고입니다. 즉 이런 거짓 교사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이단을 만났을 때 해야 할 행동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잘 살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살핀다’는 말은 원어에 보면 눈을 똑바로 뜨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두 번째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단번에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즉 이런 이단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만나면 절대 현혹되지 말고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살펴서 절대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말고 단번에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겉보기에는 그럴듯한지 모릅니다. 겉으로 하는 말은 너무도 번지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살펴보면 그들의 가르침일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되기에 잘못된 것을 알면 절대 주저하지 말고 단호하게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말 잘하는 거짓 교사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만 된다면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대로만 된다면 세상에 누가 이단의 유혹에 빠지겠습니까? 이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쉽지 않은가? 이 거짓 교사들이 너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진, 한마디로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똑똑할 뿐 아니라 또 말까지 잘합니다. 18절 뒷부분에 나온 것처럼 이들은 온갖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쏙 빠지게 되어 이들의 지식과 달변에 속아 넘어간 성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찾아오는 이단들을 보십시오.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지 모릅니다. 말은 또 얼마나 잘합니까? 그래서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자칫 그들의 거짓 교훈에 넘어가기 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좀 배웠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이 거짓 이단에 빠지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니 똑똑하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를 배워도 바로 배워서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남들보다 지식이 더 많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학력이 더 높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똑똑하기로만 따지면 이단보다 더 똑똑한 사람 없습니다. 말 잘하기로 따지면 그들처럼 말 잘 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다만 그 지식과 똑똑함이, 그 달변이 바른 길로 가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고, 또 자신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남도 망치고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을 이간질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18절부터 보면 이들 거짓 교사들의 결정적인 특징 하나가 나옵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이런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말로는 하나님 찾고 겉으로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수님 아닌 자기들의 배(만족)만 섬기는 자들입니다. 즉 복음을 구실 삼아 실상은 자기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기 이익에 빠른 약삭빠른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너무 똑똑해서 계산이 빨라서 그럴 것입니다. 꼭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주인이 누구냐?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배요 자기 이익인 것입니다. 똑똑하다보니 계산이 빨라서 교회를 다녀도 절대 손해 안 보고 늘 이득 되는 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코 이단이나 거짓 교사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를 물리치는 방법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똑똑하고 말 잘하는 거짓 교사, 이단들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아니, 나아가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이 아닌 내 배를, 내 이익을 주인으로 삼고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정말 예수님만 주인으로 삼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아주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함께 읽지요.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일단 로마 교회 성도들이 순종을 잘하는 성도들이라고 칭찬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지도자들에게 잘 순종하는 성도들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 어떤 유혹도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순종 잘하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처럼 순종 잘하는 성도들은 이렇게만 하면 어떤 거짓 교사들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사람이 되면 된다.”
이 말은 지혜로움과 미련함을 함께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올곧아서도 부러지기 쉽고, 무조건 유연하면 타락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늘 지혜롭고 똑똑하기만 하면 그 지식 때문에 교만해져서 거짓 교사들처럼 되기 쉽고, 무조건 미련해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때로는 지혜로워야 하고 때로는 미련해야 하는데 어떨 때 지혜롭고 어떨 때 미련해야 하는가?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미련하고 굼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는 아주 판단력이 빠르고 빨리 반응해야 하지만 악한 일을 보면 미련하고 굼떠서 느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미련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두 주 전 나눈 말씀 중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할 때 이 “순결하라”는 말과 같은 낱말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세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같은 뜻이지요.
한 마디로 손해도 좀 보고 살자는 말입니다. 희생도 좀 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몰라서 당하는 것과 알면서 당하는 것은 정말 다릅니다. 몰라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다 알지만, 손해 보는 줄 알지만 일부러 미련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바뀝니다. 그 누구도 손해 보거나 희생하려고 들지 않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입니다. 좀 바보가 되고 좀 손해도 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39-41)
이게 바로 바보 되라는 말 아닙니까? 이 말씀 바로 앞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사는 방법이지요. 정신 똑바로 차려서 절대 손해 안 보고 혹시 누가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해를 입히면 똑같이, 아니 아예 몇 배로 갚아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고 더 크게 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도 바보가 되셨습니다. 때리면 맞는 바보, 십자가를 지는 바보가 되셨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와(마 27:4) 천군천사를 동원해 그들을 쓸어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매 맞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달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손해 보고 스스로 바보 되는 것이 정말 약한 방법일까요? 정말 이렇게 사는 사람은 늘 손해만 볼까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간디도 힌두교도였지만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일찍이 스스로 바보 되는 법을 배웁니다. 때리면 맞고 가두면 갇히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를 쓰고 저항해도 꿈쩍 않던 영국이 이 산상수훈에서 배운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에 결국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맙니다. 이 방법이 가장 바보같이 보이고 가장 약하게 보이지만 실은 가장 강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미련하고 바보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만약 그 때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 무서운 힘으로 로마와 유대인들을 싹 쓸어버렸다면 예수님의 이름은 위대한 혁명가로 남을 수는 있었겠지만 영원히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킬 힘은 이 미련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십자가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에서 미련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의 회사에 늘 웃고 입에 남에 대한 칭찬을 달고 다니는 챨스 슈와브라는 노무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카네기보다 회사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 중에는 언제나 챨스 슈와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는 그에게 100만 불의 보너스를 줍니다. 사람들은 사람만 좋지 능력도 별로 없어 보이는, 어쩌면 좀 어리숙해 보이기까지 한 일개 노무자에게 어떻게 저런 큰돈을 주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이 노무자가 미국 최고의 철강회사 유나이트 스틸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장 취임식에서 카네기가 축사를 했습니다. “일개 노무자가 어떻게 이 회사의 사장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십니까? 그러나 그의 곁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일하는지를 꾸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지금 오늘 이 자리는 당연히 스와브의 자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항상 남을 칭찬해 주고, 남의 장점을 찾아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든 조그마한 장점이라도 발굴해 내어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미련해 보이는 자가, 바보 같은 사람이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수많은 똑똑한 자, 말 잘하는 자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미국 판 온달 장군입니다.
혹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 그러면 지금 저 사람이 나를 속이는데 가만히 앉아 당하라는 말입니까? 저 인간이 나를 밟는데 그대로 밟히라고요? 나를 비난하고 저렇게 상처 주는데 당하고만 있으라고요? 예, 그러면 됩니다. 나는 바보니까요. 예수 안 믿는 남편 구원하고 사랑하는 가족 구원하려면 참고 또 참아야 하는데, 자존심이고 뭐고 다 꺾어야 하는데 그래도 좋다고요? 예,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아니 교회 안에서조차 너도 나도 똑똑한 사람이 되려 하고, 절대 남에게 지지 않고, 절대 손해 안 보고 살려고 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 스스로 바보 된 자들, 기꺼이 손해 보고 희생하는 자들을 통해 교회를 바꾸어 가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잘난 사람을 세워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바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정말 세상이 바뀝니다. 나를 박해하던 사람이 돌아올 것입니다. 매 맞고 손해 보고 당하면서도 나를 때리는 사람,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운 것 없어도 많이 배운 사람들을 뒤집어 놓고 가진 것도 없어도 부자들을 바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똑똑한 바보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기꺼이 미련한 자, 바보가 됩시다.
성도의 미혹
롬 16:17-20
사람은 주님을 섬기거나 아니면 자신을 섬기는 둘 중의 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든 주님과 자신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있어서 주인은 둘 아니라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누가 주인이냐는 것입니다. 주님이냐 아니면 나 자신이냐 이 차이가 인간의 모든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란 바로 주님만을 섬기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삶의 최선이고 유일한 목표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주님만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그들이 바로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항상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아니라 다른 주인을 섬기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고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교회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없는 교회는 단지 인간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인간의 친교를 위한 모임에 불과합니다.
교회란 싸우면서 지키는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지킨다는 것이 교회의 교회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바울이 본문의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문안하라'는 인사 가운데 등장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누구에게 문안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21절부터도 문안하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에게서 떠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는 것에 어떤 영향을 주는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도가 서로 문안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단지 인사하는 차원의 문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서로 만나는 관계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안할 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일을 언급함으로서 서로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관계임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에서 모든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하고 지체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아래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는 모든 인간을 동일한 조건으로 집어넣습니다. 돈, 지위, 권력과 아무런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죄인이기에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임을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믿음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 조건도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인간의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동일한 자로서, 누구나 똑같이 죄인으로서 주님의 은혜와 희생이 아니었으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만나기 때문에 은혜와 희생 아래서는 인간의 구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성도는 이런 관계에서 서로 문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조건을 보지 않는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관계를 허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조건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이란 어떤 자를 말하겠습니까? 오직 은혜만을 말할 때 반발하는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오직 은혜 아래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묵살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쌓은 업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적인 은혜에 대해서 부정하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도 은혜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자신에게 업적을 남기게 한 은혜이지 죄인된 자신을 죄에서 건지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며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떠나라고 합니다. 대적하라는 것이 아니라 떠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과의 사귐이 있어서는 안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떠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고 분쟁을 일으키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속에 오직 은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성품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못하고 그 행위를 근거로 해서 뭇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고 높임을 받고 싶어하는 악한 성품으로 인해서 교회를 훼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악한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으로 성도가 서로 문안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자신의 속에 구별이 있을 것이고 나보다 행함이 적은 자에 대해서는 차별과 무시가 존재할 것인데 어떻게 은혜와 사랑 안에서 문안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나 자신이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는 악한 자이지 않겠습니까?
신자란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자입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속에서 내가 주인 되려는 악한 성품이 보일 때 그것으로 애통해 하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찾아 나오는 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신자를 미혹하는 것은 자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18절에 보면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같은 자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내세우며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다만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자기 배를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교훈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우리의 행위는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를 말하는 한 우리의 행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로 신자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훈에 대해서 신자가 미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 교훈이 인간에게 어떤 편함과 자유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뭔가 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기보다는 자신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받는 미혹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나 주안에 있으면 어떤 행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나 둘 다 똑같이 자신을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19절을 보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자기 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모든 관심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는 큰 미혹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고난과 눈물이 없는 믿음 생활을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고난과 눈물이 없는 십자가를 원한다면 결국 그는 주님을 말을 할 뿐 섬기는 것은 바로 자기 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섬긴다면 주님이 가신 길에 말없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과 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가신 길이기에 나도 가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으로서 주님을 따르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고달프지 않고 고생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달픈 인생을 산다고 해도 거룩해지고 온전해지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자를 자랑하게 되고,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혹에 빠질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하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이런 마음으로 만날 때 진정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존심을 내보일 때 보이는 것은 분쟁입니다. 신자를 미혹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미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신자로서의 바른 분별과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을 섬기는 신자다운 승리가 증거되고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신앙생활이 되기 바랍니다.
마지막 교훈과 찬양
롬 16:17-27
서론: 지난 주일에는 롬 16:1-16을 본문으로해서 ‘복음 안에서의 교제’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1절과 2절에서는 바울이 겐그레아 있는 뵈뵈라는 자매님을 로마 교회에 추천했습니다. 이 뵈뵈라는 분은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가지고 간 분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성실한 분들이 있습니다. 한 번 일을 맡으면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3절에서부터 16절 까지는 로마 교회에 바울을 알고 있는 분들에게 문안 인사를 전하는 부분인데 당시에 많은 분들이 바울과 함께 복음전파에 헌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바울을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이렇게 헌신된 사람들이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헌신한다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참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롬 16:17-27입니다. 로마서의 끝부분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하고 로마 교인들을 칭찬한 뒤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이 서신을 마칩니다.
1)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 (17-20): 17. 사도들의 서신에는 가끔씩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항상 이단과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활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단들은 그들이 믿는 교리가 다릅니다. 기독론, 즉 예수님께 대한 교리가 다르든지, 구원론이 다르든지, 다른 말세론을 믿고 있든지 그렇습니다. 당시 로마에도 아마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교훈을 가르쳐서 분쟁을 일으키거나 교회내에서 거스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이나 영지주의자들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사랑으로 덮어 주는 것과는 차이가 좀 납니다. 18.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교사로서 예수님을 섬기는 대신 자기 배를 섬기고, 교활하고 아첨의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우선 돈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교활한 말을 해서 사람을 미혹합니다. 이단들은 대개가 돈을 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니까 돈을 자기 계좌로 부치라고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거짓말을 해서 사태를 모면합니다. 요즘 대형 교회 목사님들과 비슷합니다. 19. 바울은 로마 교인들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을 칭찬하고, 그 사람들이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반대로 되면 인생이 고달파집니다. 20.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니 당시에 로마 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을 속히 처리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바울은 여기서 로마서를 끝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는 말은 바울이 보통 친필로 쓰는데 자기 편지의 표시라고 살후 3:17-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 할 말이 생각나서 계속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2) 형제들의 문안 (21-23): 21. 롬 16:3-16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을 하는 내용 인데 여기는 지금 바울과 고린도에 함께 있는 형제들이 로마의 형제들에게 문안하는 내용입니다. 디모데에 대해서는 잘 아시니까 더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누기오라는 분은 여기에만 나오는 분인데 누가와 동일인이라는 학설도 있답니다. 야손은 행 17:5-9에 나오는 분인데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때문에 공회에 잡혀가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던 사람입니다. 소시바더도 여기에만 나오는 분인데 행 20:4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 소바더와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22. 로마서는 바울이 그냥 말을 하고 이 더디오라는 분이 대필을 했는데 이 대필자도 문안합니다. 23. 가이오라는 분은 마게도냐 출신으로 행 19:29, 20:4, 고전 1:14 등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고린도에서 바울과 그 일행을 음식으로 섬겼습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 시의 재무관으로 행 19:22에 의하면 디모데와 함께 마게도냐로 파송되기도 했습니다. 구아도라는 분은 고린도 교회의 형제로서 여기서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런 많은 분들이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니며 바울을 도와 주었습니다. 복음전파는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협력하고 도와 주어야 합니다. 24 절에서도 또 “바울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기록해는데 아마 지운 것 같습니다. 또 할말이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3) 마지막 찬양 (25-27): 25. 이 단락은 바울의 수사법의 단면을 잘 보여줍니다. 말이 길고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나의 복음과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 . . 하나님의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라고 할 수 있있었는데, 이 복음을 설명하는 부분이 25절 뒷 부분과 26절 앞부분에 있습니다. 바울이 당시의 수사법을 배웠으니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한 것입니다. 26. 그런데 이 복음은 영세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나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에게) 알게 하신 바 된 것입니다. 27. 결국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우리도 항상 어떤 일을 할 때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찬양받으시기를 좋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