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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한 무지
박학한 무지(De Docta Ignorantia, On learned ignorance/on scientific ignorance) 또는 무지의 가르침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쓴 철학과 신학 분야의 책이다. '박학'과 '무지'라는 모순된 언표의 결합 안에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깨칠 수 있는 최대의 ‘지(知)’란 무엇인가. 진리에 닿기 위해 끝까지 그를 좇다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최대의 ‘지(知)’는 결국 ‘무지(無知)’였다.
내용
‘박학한 무지’의 깨달음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속성들마저 절대적인 단일성 안에 포용하는 신을 알아보는 일이 신학에서 중요한 과제였다. 쿠자누스 또한 이슬람, 동방·서방 교회 등 다양한 종파 및 교파로 갈라선 ‘교회의 일치’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1437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다른 종교인들과 대담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는 바다 한가운데서, 그는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를 능가해,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바를 알아듣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그리고 그 체험을 ≪박학한 무지≫에 요약해 놓는다.
최대의 지식=최소의 지식
≪박학한 무지≫는 인간에게 최대의 지식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쿠자누스는 시작부터 이미 결론을 내렸다. 인간에게 최대의 지식은 결과적으로 최소의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세 단계의 논증을 펼친다. 가장 먼저 검토하는 측면은 통상적으로 가장 명료하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수학·기하학적 방식이다. 그다음으로는 가장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의 지식으로 간주하는 자연학·천문학적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삶의 완성 및 구원과 직결된 지식으로서 강생(降生)한 신 예수 그리스도, 곧 종교·신학적 방식을 통해 최대의 참된 지식을 검토한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를 바라보는 두 시선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대한 연구자들의 평가는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팔켄베르크 및 카시러 등의 평가다. 그들은 쿠자누스가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여는 길목에서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토대를 제공했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빌페르트, 슈탈마흐, 자콘 등의 평가다. 그들은 쿠자누스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현실태’ 이론을 과감하게 확장한 모험적인 사상가로 내다보았다. 순수 현실태로서 절대자[神]를 고려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 현실태와 가능태로 구분되는 만물의 처지를 초월한다는 점에서도 근대주의적 사고방식이 유보하거나 포기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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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한 무지
De docta ignorantia, -無知
저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kolaus von Cusa, 1401-1464)
해설자 조규홍(배재대학교 심리철학과, 대전대학교 신학과,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외래교수)
가브리엘 편집본에 게재된 ‘라틴어 수사본(Cod. Cus. 218 f. 1-42r)’에 근거하자면,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e docta ignorantia)≫를 1440년 2월 12일 자신의 고향 쿠에스[Kues, 오늘날 베른카스텔 쿠에스(독일 서중부)]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쿠자누스의 작품 가운데 완성도가 아주 높은 작품으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일찍부터 이 책은 쿠자누스의 모국어(독일어)로 ‘무지의 지(Wissen des Nicht-Wissen=Nicht-Wissen als Wissen)’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왔다. 코흐(J. Koch)가 이 책을 참된 지식의 “측정 기술(ars conjecturalis)을 위한 발판”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측정에 관하여(De conjecturis)≫에 대한 언급이 자주 눈에 띄는 것만 보아도 두 작품이 서로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학한 무지≫는 ‘가장 위대한 지식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소위 “최대의 지식(maximales Wissen)”에 대해 묻는다. 그런데 그것은 ‘최소의 지식(minimales Wissen)’에 불과하다. 이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 쿠자누스는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논증은 그렇게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최대의 지식이란 기껏 최소의 지식에 지나지 않음을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밝히는 데 집중한다.
모두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략하게 말해 이 책은 철학적ㆍ신학적 작품으로서 소위 신(神)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지 세 가지 단계(과정)에 따라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예컨대
1)우리가 습득한 지식(수학-기하학)을 통해서,
2)삼라만상(세상-천문학)을 통해서 그리고
3) 육화된 신 예수 그리스도(신학-신앙)를 통해
절대적인 신에게 다가가는 단계를 소개한다. 그래서 제1권(I)은 절대적인 최대치(maximum absolutum)에 대해서, 제2권(II)은 제한적인 최대치(maximum contractum) 그리고 제3권(III)은 제한적이고 절대적인 최대치(maximum contractum et absolutum)에 대해서 다룬다.
제1권은 이미 우리가 습득한 수학-기하학적 지식을 통해 절대적인 신 혹은 절대적인 지식에 다가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수학적-신학(Mathematica-Theologia)”으로 특징지어진다. 삼원성(Trias)을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취지에서 쿠자누스는 여기서 유추(類推)를 넘어 무한히 확대되는 세 요소, 예컨대 중심과 반경과 원주가 모두 온전히 하나가 되는 절대적인 원(圓) 또는 구(球)를 생각하도록 안내한다. 물론 교회 안에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신비”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미친 저 신플라톤주의 혹은 헤르메스 철학적 전통의 한 가지 주제와도 상응한다(≪Confessiones≫ VII 9, 13∼14). 그러나 쿠자누스는 이때 인간이 알아보는 최대치는 실상 ‘작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활동)이 부질없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쿠자누스는 더 나아가 ‘절대적인 최대치’는 인간의 사유와 신적 실재성 사이의 거리(차이)를 극대화할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고 제언한다. 그것은 분명 일종의 반전이다. “우리의 무지가 분명해질수록 그만큼 ‘진리’에 보다 더 가까워진다[quanto in hac ignorantia profundius docti fuerimus, tanto magis ipsam accedimus veritatem(3.5)]”는 이치를 납득시키려는 것이 쿠자누스가 내심 의도한 바인 셈이다.
제2권은 삼라만상 혹은 세상(Universum)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최대치)으로 여길 수 있다고 보면서도 다만 시공간적 한계를 갖는 최대치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제한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신과 거리를 갖는다. 이 같은 세상의 제한적 측면은 의당 형이상학적인 시각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계속될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관)을 따라서는 세상이 마치 무한하게 펼쳐지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우리가 임의로 세상의 경계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도 무한한 것의 특징이라 여겨지는 삼위일체성이 발견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항상 존재하는 것은 첫째로 그에 앞서 ‘(존재)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실재성은 저마다 ‘가능태’를 전제한다. 둘째로 실재성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은 중세의 존재론ㆍ인식론적인 관점에서 ‘규정되는 것(definiri)’을 가리킨다. 규정된다는 것은 그래서 그 자체가 합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단순한 구성(constructio)이 아니라 실재(존재)와 사유 사이의 공통성(communio)을 함축한다. 셋째로 규정되는 것은 이제 규정하는 것과 서로 연계(nexus)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창조된 것은 창조하는 자(창조주)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조물로서 세상은 실재하지 못한다. 이 연계성을 따라 세상은 창조주의 모습(흔적)을 품고 있다.
1458년에 쿠자누스는 ≪확대경에 대하여(De beryllo)≫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이 세 번째 원칙(연계성)을 살핀 흔적이 발견된다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40, 1∼10). 그런 까닭에 그는 그의 삼위일체 사상을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사상으로 여기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탁월한 사상가나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시도되었던 통찰 방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절대적인 최대치가 그 모든 반대되는 것들에 앞서 전제되는 것처럼−왜냐하면 그 정의(definitio)에 따라서 절대적인 최대치에는 자신과 대립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기에−소위 코스모스로서의 세상은 그 아래 모든 반대되는 것들을 능가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이 최대치라고 한다면, 세상 안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세상 자체와 마찰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 같은 이론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사유의 전통 중 하나로서 그렇듯 서로 분리해 이해해 온 것들을 통합해 주는 열쇠임을 재고하도록 쿠자누스는 우리를 고무시킨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이론을 통해서 그 동안 습득한 자연철학 및 우주론에서 추정되는 여러 가지 사항(지식)들을 검토한다. 예컨대 이 삼위일체 개념이 자립적인 질료나 자립적인 이데아(형상)들 그리고 세상을 만들어 내는 세계영혼과 관련된 원칙을 통합적으로 살피게끔 해 준다. 이 이론의 정확한 가치가 한때 과장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세상에다 무한성 개념을 적용하는 일과 관련해서 말이다. 쿠자누스는 그러나 근대를 연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중심의] 전향을 무시하진 않았지만, 현대적인 경향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의 논증은 형이상학적이었지, 천문학적ㆍ물리학적인 차원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특별히 제2권을 읽어 나갈 때 놓치지 않도록 주목해야 할 점 한 가지를 앞서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먼저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유념하는 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5장에 소개된 바와 같이, ‘모든 개별적인 것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통찰 말이다. 모든 존재는 그렇듯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그 자신 안에 실재성 전체와 “유대(紐帶)를 맺고” 있다. 이를 제대로 사유하는 자는 “자연” 개념과 “인간” 개념을 서로 교체해 이해한다. 그는 “본질(essentia)”이란 낱말이 뜻하듯 개별적인 실체에만 집착하는 종래의 안목을 타파하려고 한다. 모든 “대상”은 엄연히 서로 차이를 띠지만, 동시에 서로 [유사성을 통해] 연계되어 있음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일성과 다수성을 서로 갈라세우는 데에 급급해하지 말고, 이들을 서로 관통하는 어떤 관계를 따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샛말로 쿠자누스는 실재성과 진리에 관한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개념을 발전시킨 셈이다. 개별적인 것 안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자만이 개별적인 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전체 안에서 개별적인 것을 사유하는 경우에만 그럴 수 있다. “돌 안에는 돌과 연계된 모든 실재성이 존재한다.” 근대에 들어 시작되는 “연장되는 것(res extensa)”과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사이의 구별 혹은 “자연”과 “문화” 사이의 차이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저 독립적인 실체들의 막연한 모둠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마다 그 안에 만물의 이치가 현전하는 동시에 세상 안에서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의미심장하게 제 고유한 위상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것은 전체를 이루는 불가해소적인 요소 혹은 정당한 협력자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당장 부르노(G. Bruno)에 의해서, 좀 더 뒤엔 헤르더(J. G. von Herder)와 괴테(J. W. Goethe) 그리고 셸링(W. F. J. Schelling)에 의해서 점점 더 발전되어 나간다.
제3권은 육화(incarnatio) 혹은 신이 인간이 된 유일무이한 사건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다. 이미 에크하르트(M. Eckhart)와 룰루스(R. Lullus)는 그리스도교가 중요하게 여기는 삼위일체성 및 육화 교리에 관한 모든 진리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15세기 이후엔 공식적인 신학계 안에서는 아니지만, 쿠자누스의 육화에 관한 철학 사상이 발전했다. 신인(神人) 예수에게는 절대적이고도 제한적인 최대치(Maximum contractum)가 목격된다. 그는 ≪설교집 (Sermo)≫에서 “보다 더 큰 단일성이 달리 고려될 수 없는 무한한 단일성이 ‘자연 일반’의 단일성을 대변하는 인간과 결합했다”고 육화에 대해 설교한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에는 감각적인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III 3). 그리스도는 인간이다. 여느 인간도 그렇게 완전하게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간이다. 그래서 그를 최대의 인간(homo maximus)(III 5)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는 모든 종(種)들의 전체성을 대변한다. 그래서 그는 각 종들 사이에서 근친 관계(형제나 친구)를 이루는 경우보다도 훨씬 더 가깝게 모든 개별적인 것들 곁에 서 있다. 신으로서 그의 육화는 개별화 사건이 아니라 현사실적으로(de facto) 첨가된 사건이다. 이 육화 사건은 인간성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인 만큼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다. 과거에는 현자들이 이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미리 생각할 수 있었던 신비였지만(III 5), 이제 육화 사건을 통해서 예수는 모든 인간의 모범이 되었다. 곧 그 안에서 인간성 자체가 완성되었고 깨어났다. 제3권 말미에는 교회에 대한 몇 가지 반성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들로서 교황과 공의회 사이에 벌어진 갈등(쿠자누스의 중요한 과제)을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얼른 눈에 띄는 몇 가지 동기들은 쿠자누스의 초기 작품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예컨대 신은 지식의 내용으로도 고려되기에 단순히 신앙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라든가 혹은 “신(하느님)”이라는 대중적 표현은 이미 절대적인 단일성을, 그래서 그에 반목하는 대립적인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이라든가 혹은 인간을 정신적인 요소와 질료적인 요소가 함께 공존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관점이라든가 더 나아가 세상은 인간 본성 안에서 그 단일성을 깨닫게 된다는 관점 등이 그러하다. 이는 당연히 고대 철학 사상으로부터 꾸준히 고려되어 온 것이며, 그로써 신은 자연을 대표하는 피조물인 인간과 남다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초기 작품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점을 살피자면, 이 ≪박학한 무지≫는 인간의 지식(인식 활동)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그래서 과연 우리의 ‘지식의 최대치’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최대의 지식 내용이 실재한다고 보는 한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때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당장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결국 우리는 서서히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그에 대해 몰랐던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같은 사유는 모호한 회의주의(懷疑主義)에 떨어지지 않는다. 쿠자누스는 구체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풍부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 예컨대 지식, 신, 세상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고 있는 개념들을 다각적으로 활용한다. 플라쉬(K. Flasch)는 이 책의 주제를 일관되게 뒤쫓고자 한다면, 당연히 쿠자누스와 관련이 깊은 세 가지 중요한 특징, 곧 “대립하는 것들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의 의미,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의 역할 그리고 선행 철학 사상과의 관계에 대해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1) 간략히 이에 대해 살피자.
가) ≪박학한 무지≫에서 “대립하는 것들의 일치” 개념의 의미
이 작품이 세상에 알려질 때부터 이미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비난의 대표적인 사례가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 신학 교수 벵크(Johannes Wenck)와의 공개적인 논쟁이다. 1442~1443년 벵크는 궁극적으로 쿠자누스의 이 일치-개념에 이단적인 요소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진단 아래, “모든 것이 신과 하나(omnia cum Deo coincidunt)”라는 쿠자누스의 말은 “함축적인 범신론”을 의미한다고 공격했다.2) 나아가 벵크는 쿠자누스의 불충분한 논리 전개와 관련해 그 결점을 지적하면서, 그가 정당한 모든 학문의 기초마저 위험하게 만든다고 비난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신성시하는 일은 곧 모든 것을 무화(無化)하는 일(omnia deificat, omnia annihilat)”이라고 단죄했다.3) 그에 이어서 카르투시아 수도회의 빈첸시오(Vinzenz von Aggsbach)가 쿠자누스를 추종하던 베네딕토 수도회의 베른하르트(Bernhard von Waging)에 맞서 1454년 편지글로 반박하고는 곧이어 ≪‘박학한 무지’ 예찬에 대한 논박(Impugnatorium laudatorii doctae ignorantiae)≫이란 비판서를 냈다. 이 같은 분위기는 1930년대 전까지 활동했던 신스콜라주의자들에게 이어졌으니, 그들은 쿠자누스의 이 일치-개념을 모순 혹은 ‘범신론적’인 용어라고 일축하면서 회의적이고 탈논리적이라고 맹비난했다. 예를 들어 슈퇴클(A. Stöckl)4), 글로스너(M. Glossner)5) 및 반스텐베르게(E. Vansteenberghe)6)와 같은 학자들이 이런 비난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세대는 쿠자누스의 이 ≪박학한 무지≫가 “스콜라 신학”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쿠자누스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 곧 신적인 속성들의 단일성을 설명하려 애썼다고 평가한 것이다.7)
이미 성경에 의한 ‘분노의 신과 자비의 신’과 같이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속성들’마저 절대적인 단일성 안에 포용하는 신을 알아보는 일은 언제나 신학의 중요한 과제였다. 더욱이 (이슬람, 동ㆍ서방 교회 등) 다양한 종파 및 교파로 갈라선 ‘교회의 일치’에 남달리 관심을 갖고 중책을 맡았던 쿠자누스에게 이 과제는 매우 중차대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그는 1433년에 이미 ≪공동체의 친밀성(De usu communionis)≫ 및 ≪교회 일치(De concordantia catholica) I-III≫ 등 여러 작품을 집필하면서 교회가 지켜 온 전통적인 가르침을 보다 폭넓게 수용할 수 있게끔 그 합리적인 근거를 모색한 한편, 1438년 플로렌스 공의회를 준비하던 교황 에우게니우스(Eugenius) 4세의 명을 받고 앞서 콘스탄티노플로 떠날 정도로 교회 일치를 위해 몸으로 뛰었다. 이 시기에 그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정확한 시기는 1437년, 곧 그의 나이 36세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다른 종교인들과의 대담(對談)을 마치고 로마로 되돌아오던 때라고 쿠자누스 스스로 상기 작품에서 고백한다. “그리스에서 되돌아오는 깊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 나는 ‘저 위로부터 온 은총을 통해’…이런 통찰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곧 ‘뭇 인간에 의해 알 수 있는 (…) 진리를 훨씬 능가해 차라리 박학한 무지 안에서나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바를 알아듣는 것’과 같았다.”8) 하고 술회한다. 덧붙여 그는 “우리의 (…) 정신을 통한 모든 수고가 이제 이 심오한 신비에 함께함으로써 모든 대립하는 것들이 합일하게 되는 단순함으로 [나의 정신은 한순간] 솟아오르는 듯했다”9)고 전한다.
빌페르트(P. Wilpert), 슈탈마흐(J. Stallmach), 기아콩(C. Giacon) 등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많은 학자들은 쿠자누스의 그 같은 시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현실태’ 이론을 과감하게 확장시킨 일련의 모험으로 내다보았다. 이는 다른 한편 칸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인식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도와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당시 팔켄베르크(R. Falckenberg) 및 카시러(E. Cassirer)와 같은 근대의 ‘이분법적’ 발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려고 시도한 셈이다. 순수 현실태로서 신을 고려하는 태도는 현실태와 가능태로 구분되는 세상을 초월하는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미 근대적 발상과 차별화된 것이다.
“이것(절대적인 최대치)은 그러나 우리의 모든 정신을 초월하는데, 이때 정신은 결코 자신의 원칙에 따라 제시한 것들에 반(反)해서는 이성의 길과 결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은) 자연 본성으로부터 우리에게 드러난 그런 것들을 통해서 거닐기 때문이다[Hoc autem omnem nostrum intellectum transcendit, qui nequit contra dictoria in suo principio combinare via rationis, quoniam per ea quae nobis a natura manifesta sunt ambulamus(4.5)].”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도 다소 난해하다. 모순된 언표의 결합은 우리의 모든 통찰이나 모든 이성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은 모순되는 것을 서로 결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자누스는 이 문장을 눈에 띄게 국한해 진술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은 이성의 길을 앞서는 만큼 이성을 뒤따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감각적인 지각과 직결되는 만큼 우리에게 드러난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쿠자누스는 그러므로 정신(intellectus)와 이성(ratio)을 구별한다. 그럼에도 이 같은 구별이 작품 전체에서 선명하게 이뤄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모순적으로 말하는 자를 마냥 승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쿠자누스는 정신과 이성을 때로는 구별하지 않으니, 이성은 정신의 한 가지 기능일 수도, 정신을 대신할 수도 있다.
나) 부정신학(negativa Theologia)의 역할
≪박학한 무지≫에서 발견되는 그 다양한 ‘동기들’에 수긍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진리 및 정확한 사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정확성(praecisio)이란 용어는 완전성 혹은 “이상적으로 정확한 상응(일치)” 혹은 현대어로 “확실성(Genauigkeit)”에 가깝다. 모든 탐구는 ‘비교’를 통해 그 정확성을 추구한다[comparativa igitur est omnis inquisitio, medio proportionis utens(1.2)]. 그러나 실제 모든 감각적인 사물들을 비교해 살피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끝없이 시도해야 한다. 따라서 그 정확성에 이르는 길이 만만치 않다. 차라리 엄밀한 의미에서 비교를 통해선 아무것도 그 정확성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10) 왜냐하면 우리의 눈이 머무는 곳에선 항상 ‘차이’라 발견되기 때문이다.11)
만일 모든 것들이 항상 차이를 갖는다면, 정확한 일치 및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이런 분위기가 결과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인 진리 혹은 ‘정확성’에서 뒷걸음치도록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비교를 통해 지식을 얻어 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최대치 혹은 무한한 것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최대치나 무한한 것은 정의를 통해서는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전통적으로 신을 ‘무한한 존재’로 일컬어 왔을지라도, 쿠자누스가 이 같은 입장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는 ‘무한하며 절대적인 신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다’[(4.4), (16.3), (17.1), (18.2), (24.3), (26.2) 등]는 점이다. “(신) 그 자신은 ‘모든 것이자 그와 대립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진리로서 대립하는 것이 없는 모든 것이란 점에서’ 실체라고 보기 때문에, 끝없이 축소하는 식으로가 아니면 그에겐 저 [만물에 속하는] 특수한 명명(名名)들이 어울릴 수 없다[Cum autem ipse non sit substantia, quae non sit omnia et cui nihil opponitur, et non sit veritas, quae non sit omnia absque opponitione, non possunt illa particularia nomina nisi diminute valde per infinitum sibi convenire(24.4)]”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정신학(否定神學)은 [그와] 다른 긍정신학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고 하겠으니, 그것은 부정신학 없이는 신이 무한한 신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창조물처럼 섬겨지기 때문이다[Et ita theologia negationis adeo necessaria est quoad aliam affirmationis, ut sine illa deus non coleretur ut deus infinitus, sed potius ut creatura(26.2)].”
다) 선행 철학 사상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 책에 소개된 신에 관한 쿠자누스의 철학적 입장은 가장 먼저 안셀무스(Anselmus)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을 연상시킨다.12) “내가 ‘최대치’라고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Maximum [autem] hoc dico, quo nihil maius esse potest(1.4)]”가 그 예다. 물론 플라톤(I 11; I 17; II 4; II 12 등) 및 (신)플라톤주의자(II 8∼9)에 대한 직접적인 인용이 자주 목격되는 만큼 전자의 이데아론, 후자의 ‘하나’ 및 존재론적인 원리로서 삼원성 및 삼위일체성이 쿠자누스 사상의 근간을 이룬다고 추정할 수 있다. 중세에 보편적으로 인정받아 온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으로서, 자연 세계 안에서 경험되는 사물의 유한성이나 인간의 인식 조건과 관련된 개념들과 인식 구조도 발견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유 논증으로 간주되는 조명설 및 기하학적-상징적 삼위일체론, 나아가 고대 피타고라스를 가리켜 직접 “명성으로도 사실로도 첫 번째 철학자[primus et nomine et re philosophus(I 11)]”라고 칭하듯이 그의 수(數)-이론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신비 사상을 전하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stos)(I 24; I 25; II 8 등) 및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I 24; I 26), 특히 위-디오니시우스(Ps.-Dionysius)(I 16; I 17; I 18)를 직접적으로 거명하는 것에서 그들의 사상을 통해 쿠자누스가 자신의 부정신학 및 신비신학의 입장을 공고히 다졌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 외에 놀랍게도 그는 알베르트 마그누스(A. Magnus)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다룬 적이 없는 반면, 비록 직접 언급한 적은 없으나 티에리(Thierry von Chartes), 룰루스(Lullus) 및 에크하르트(M. Eckhart)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반추하여 전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공의회 및 교회의 공식적인 차원에서 활동하고 옹호했던 신분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앞서 토마스의 사상과 연결된 논의가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