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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보리밭 지나 선운사 가는 진녹빛 세상 고단한 마음, 그곳에 다 두고 오시게…
암봉 속에 작은 꽃처럼 피어있는 내원궁 고창=글·사진 박종인기자 seno@chosun.com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나와 아산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그때부터 전봇대에 ‘청보리밭 X㎞’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다. 길은 꼬불꼬불하지만 헷갈릴 때가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이정표다. 그 이정표 끝에 나오는 농장, 이름하여 학원농장 보리밭이다. 길섶에 심어놓은 철쭉들이 원색으로 타오르고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문득 하늘 빼고 온 세상이 진녹빛이다. 자그마치 30만평. 지평선 보기 드문 좁은 땅, 그래서 초원다운 초원도 보기 드물다. 그런데 이 보리밭 앞에 서면 한국도 꽤 넓은 땅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저 푸른 보리들이 바람에 넘실대고 있으니!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디자인의 철칙. 세상이 이리 복잡다기하니, 단순함이 일궈낸 저 대장엄 속에서 사람들 마음은 스르륵 풀려 버린다. 이 녹색 세상이 그리워 이번 주말까지 열리는 보리밭축제 한 달 동안 30만명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와서는 그저 걷는다. 노래를 흥얼대며, 보리피리 불며 말이다. 농장 주인 이름은 진영호(58). 진의종 전 국무총리(작고)의 아들이다. 1992년 번듯한 회사 이사를 사직하고 내려왔다. 온갖 농사를 다 해봤지만 초짜 농부에겐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씨 뿌리면 잘 자라 주는’ 보리를 심었다. 농사는 잘됐는데 큰돈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 보리밭 곳곳에 사진가들이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진가는 사진을 찍고, 사진은 또 다른 사람들을 불렀다. 그 풍경―향수이기도 했고 미학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겐 교육이기도 했다. 다른 주민들도 보리를 심었다. 그래서 지금 고창 일대는 보리밭 일색이다. 작년에 처음 연 축제. 입장료는 없는데, 사람들이 와서 이것저것 사 가니, 한 달 동안 3억원을 벌었다. 그리고 보리를 수확하니 1억2000만원. 보리밭이 살 길이 나왔다. 나라에서는 이곳을 ‘경관농업지구’로 지정했다. 보리 이외 일절 경작 금지. 그리고 보리는 전량 수매. 농장 안에는 곧 꽃을 피울 연못, 기와집, 황토집 등 볼거리도 많다. 그 풍성함이 사람을 불러, 지난주에 끝내기로 했던 축제가 이번 주로 연장됐다. 다음 주까지는 푸르고, 이후엔 누런 물결이 넘실대고, 그리고 텅 빔. 여름에는 그 땅에 메밀꽃이 꽃세상을 만든다. 자, 보리밭에서 가진 여유로 이번에는 선운사로 간다. 보리밭 지나 선운사
자, 지난해 낡은 건물을 부수고 만든 주차장 왼편 길 위로 내원궁이 있다. 정확한 이름은 도솔천 내원궁. 도솔천은 불교 성역 수미산 꼭대기의 천계(天界)요, 내원궁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머무는 거처다. 세파에 지친 민중들을 달래주는 존재. 19세기 말, 신천지를 꿈꿨던 동학 농민들도 이 도솔천과 인연이 닿아 있다. 바로 거대한 마애불이다. 이 부처님 배꼽에 있는 복장감실에 세상을 바꿀 비결과 벼락살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여 1820년,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이서구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감실을 뜯고 책을 열었는데, 책 첫 문장이 이러했다. “이서구가 열어본다”. 기겁한 이서구 머리 위로 벼락이 쳤고, 이서구는 책을 되던져 놓고 도망갔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1892년, “이서구가 벼락을 맞았으니 안전하다”는 판단과 함께 동학도들이 다시 감실을 열어 책을 가져갔다. 이 일로 하여 동학도 수백명이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뭐라 적혀 있었는지 알길 없지만, 세상 바꾸려는 의지가 그리 강했고, 그 일이 미륵불이 사는 도솔천에서 벌어졌다. 불상 앞에서 올려보니 부처님, 아무 말 않고 참선 중이다. “이 무엇고!” 그리고 내원궁 가는 계단에 올랐다. 벼랑 끝에 터를 겨우 닦아 만든 작은 암자. 초파일을 앞두고 온통 연등 물결이다. 애타는 사람들, 108배에 열중이고 스님은 경을 읽는다. 산쪽을 보니 천마봉이 우뚝 서 있다. 참으로 웅장하다. 땀을 닦고 있자니 보살 한 분이 말을 건다. “밤이 되잖아요? 바람소리랑 소쩍새 소리밖에 없어요.” 나도 살고 싶다고 했다. “말아요. 욕심하고는 상관없어요. 인연이 닿아야 해요.” 그래, 인연이다. 그런데 내원궁은 그리 ‘예쁘지’가 않았다. 보살이 말했다. “자기 안에 있으면 자기가 보이지 않아요. 아래 마애불 옆 오솔길로 가세요. 가서 장금이 엄마 돌무덤에 인사하고 건너편 천마봉으로 가보세요. 내가 손 흔들게요.” 알 듯 모를 듯 뜻모를 권유에 홀려 등산을 한다. 언뜻 보기에는 가는 데만 한 시간 걸릴 거리였다. 그런데 왕복 40분이면 간다고 했다. 그래, 가자.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제야 보이는 게 아닌가. 내원궁, 그 작은 암자는 거대한 암봉 무리 한가운데에 꽃처럼 박혀 있었다. 작은 절집 하나가 아니라, 그 봉우리 전체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이서구가 벼락살을 맞은, 동학꾼들이 비결을 빼내간 부처님이 오른편 아래에 자그마하게 걸려 있다. 30분 전에 서 있었던 평범한 공간, 마애불 앞과 작은 암자가 있는 그곳이 바로 수미산이요, 대장엄 도솔천이었다. 마음, 거기에서 다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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