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학시절 淸州는 조용한 교육도시였다.
도심의 등(척추)에 해당하는 牛岩山(우암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 한 영락없는 閑村(한촌)인 청주는 아침저녁 학생들이 꿈틀거리는 生動(생동)의 물결 말고는 거의 한적한 농촌도시에 다름 아니다.
都心(도심) 한복판의 꽤 넓직한 도로를 왜놈들은 本町通(혼쪼도리)라 했고 그 길가의 동네들을 그 무슨 榮町(사까에쪼)니 中央町(주오쪼)니 南門通(남몬도리)식으로 불렀단다.
그 榮町 中央町 南門通등이 해방되면서 榮洞(영동) 中央洞(중앙동) 南門路(남문로)등으로 改稱(개칭)된다.
바로 그 榮洞 한 복판에 나의 淸州中學校가 그 雄座(웅좌)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는 바로 옛 淸州驛에서 걸어서 한 10분 정도의 無心川邊인데 지금도 옛날 바로 거기에 우리 모교는 그대로 우뚝 서 있다.
중앙현관에 거대한 북이 놓여있어 그 북소리로 수업의 시작과 종료를 알리곤 했다.
1960년대 청주고교가 새로 校舍를 신축하여 移校할때 까지는 중고교가 한 캠퍼스에 있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내가 그곳 중고교를 다녔다.
점점 학생 수가 늘어나니 이를 수용하기엔 그 옛날 舊制(구제) 청주중학교 건물로는 태부족이던 차에 마침 우리학교 출신으로 우리 나라 軍番 1번인 李亨根大將의 주선으로 육군공병대가 대충 가건물을 지어 주어 淸高生들이 입주했다가 1960년대 청주교외에 淸高圓形校舍(원형교사)를 신축하여 완전 移舍(이사)를 하게 된다.
그러니 나의 중학시절은 그 淸高선배들과 동거하던 시기로 우리들 휴식시간이면 고교선배들이 늘 우리들 교실에 들어와서 짓궂은 장난도 치면서 함께 생활하며 애환을 함께 하였었다.
그 시절 나의 하숙은 청주에서 한참 남쪽 변두리의 한적한 농촌가옥이었다.
우리 고향에서 꽤 용하다고 소문 난 韓方醫院(한방의원)이던 우리 親知(친지)의 별장 쯤인 흙벽돌 초가집으로 고향에서 遊學(유학)을 온 여러명 중에 내가 한목 낀 셈이다.
그때 한달 하숙비가 쌀 세말값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빠른 걸음으로 거의 한 시간여를 걸어야 겨우 닿을수 있는 먼 거리에 그 하숙이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소위 본정통으로 南行을 서두르다 보면 淸州의 명동거리라 할 南門路를 지나야 하는데 그 길 옆에 청주 유일의 淸州劇場(청주극장)이 있었다.
청주극장은 그곳 高麗때 문화재이기도 한 龍頭寺址鐵幢竿(용두시지철당간)이란 유물이 우뚝 서 있는 바로 옆에 있던 아주 오랜 우중충한 건물이다.
바로 그곳은 한때 '못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슬로간으로 정권교체의 꿈을 키웠던 민주당의 거물들이 합동연설회로 떠들석 했던곳이기도 하다.
曺在千 趙炳玉등 쟁쟁한 인사들의 명연설을 들으려는 젊은 聽衆(청중)들로 人山人海를 이루던 곳이다.
'아아! 여기가 忠淸道 양반골이라 해서 충성어린 선비들이 사는곳으로 알았더니 이제 와 보니 버러지 충(蟲)字 충청도인가 봅니다'
趙博士의 피를 토하는듯 한 獅子吼(사자후)의 冒頭(모두) 발언으로 自由黨에 맹종하는 충청민심에 대한 지독한 빈정거림이다.
그분 또한 이웃 天安의 당대인물로 과거 일제에 항거하여 동향 후배인 유관순을 배후 조종했다는 소문이기도 한 강골파 선비로서 대단한 인끼의 소유자였다.
그 청주극장 옥상에는 대형 스피커가 한대 놓여있었는데 방과후 우리가 막 下校할 때 쯤이면 늘 흘러간 流行歌(유행가)를 크게 틀어 놓곤 하였다.
그런 노래 가운데는 그때 한창 유행했던 '戰線夜曲(전선야곡)'등이 있었다.
'가랑닢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
이런 구슬픈 노래가 흐르고 나면 또 으례 이런 가락이 뒤따랐다.
이름하여 '신라의 칼'이란 노래다.
<新羅(신라)의 피가 끓는 시퍼런 칼은
사나이가 부르짖는 꽃이련만은
일백번을 고쳐죽어 황토가 될 지라도
님에 향한 一片丹心(일편단심) 아아 일편단심
내 어이 변하리오
奸臣(간신)의 무리들과 불의의 사랑
나려짖는 칼날 끝에 달빛도 떤다.
산수찾아 도를닦는 시퍼런 칼날 끝에
님에 향한 일편단심 아아 일편단심
내 어이 변하리오>
중견가수 申世影(신세영)의 노래들이다.
어쩐 연유에선지 이들 신세영의 노래가 그때 계속 흘러 나왔다.
약간 哀調(애조)를 띄면서도 뭔지 모를 소름 돋는듯한 오싹함도 느껴지는 이들 노래가 반복해서 장안의 下午에 찌렁찌렁 울려 퍼졌었다.
책가방을 늘어뜨리고 나도 모르게 그 극장골목으로 어슬렁 어슬렁 기어들어 그 철당간 옆 돌계단에 걸터앉아 몇번이고 반복되는 그 노랠 듣다가 해걸음에야 '남다리'라는 회다리로 무심천을 건너 길게 뻗은 꾸불꾸불 황톳길로 귀가를 서두르곤 했다.
길가 논틀 밭틀에선 푸른 囚衣(수의)를 걸친 輕犯罪囚(경범죄수)들이 들일에 분주하다가 황혼녘에 일이 끝나면 마치 통발같은 용수를 뒤집어 쓰고 다시 형무소로 타달타달 향하곤 하던 때다.
훗날 한때 나의 18번으로 불렸던 愛唱曲(애창곡) '신라의 칼'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 그 가사며 멜로디가 어렴풋 막막하기만 하다.
아마도 어쩔수 없이 흘러만 간 긴긴 세월 탓이리라.
허나 지금도 내 추억의 중학시절 속엔 바로 그 '신라의 칼'이 자리하고 있고 때로 청주에 들려 그 '남문대로'를 지날때면 그때 그시절 그 Loud Speaker에서 울려 퍼지던 戰線歌謠(전선가요)들이 불현듯 문득문득 떠 오르곤 한다.
아아! '신라의 칼'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