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 세
한경희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책처럼
삼십 세엔 삶을 그만둬도 괜찮겠다
생각한 적 있었지
삼십 세
아이들 낳아 키우고
사십 세
아이들 돌보고 세상을 살고
오십 세
육신이 망가져 버린
남편과 씨름하며 보냈네
육십 세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
걸음 서툰 아이처럼
산다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열어논 창문으로 도둑이 넘어오듯
언제든 슬그머니 그 순간이 오거든
애쓰지 않아
하늘이 흐리면 비가 내리고
절기 따라 얼굴 다른 꽃이 피고
아기의 웃음에 세상이 자지러지듯
거스를 수 없는 게 세월이란 걸
이 나이에 비로소 알게 되었네
뭐 괜찮아
그거라도 알게 됐으면
* 잉게보르크 바흐만(1926-1973). 오스트리아 시인. 소설 『삼십 세』 발표
그 집
그 집이 꿈에 보인다
하루종일 해조음 들리던 집
소도 없이 외양간만 크던 집
거칠게 만든 꽃밭에
달리아 용설란 국화꽃 피던 집
부엌 뒤 빌레 동산 장독대에 정화수 올리고
여름이면
멀구슬나무 보라색 꽃비 내리던 집
초가집 처마 에둘러 심은 양하 잎새 위로
가을비 내리던 집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로
별이 쏟아지던 집
정낭 걸쳐진 올렛길에
마농꽃 줄지어 하얗게 빛나던 집
흐릿한 호야불 아래 부엌에서
생솔가지 태우며
사박사박
눈 내리는 소리 듣던 집
지붕 낮은 집
초라하고 어둡던 집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할머니 집
그 집
* 빌레: 너럭바위의 제주 방언
* 정낭: 제주도에서 대문 구실을 했던 나무
* 마농꽃: 흰꽃나도샤프란의 제주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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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 세 / 한경희
김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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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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