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다원 시대
강 문 석
근년 들어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난 광복로를 지나다가 무상으로 책을 나눠주는 현장을 만났다. 책이 천대받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나 싶어 약간은 충격적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책 안 읽기로 소문난 나라라는데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하는 자괴감이 먼저 들었다. 설령 문화관광부에서 세금으로 이렇게 책을 나눠준들 문제가 해결되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공짜로 나눠주는 물건이 생필품이었다면 야단법석이 났겠지만 책은 그렇질 못했다. 그런데 행사장 플래카드에는 20년 전 작고한 김동리의 단편소설인 <밀다원 시대>가 큼지막하게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책을 탁자에 쌓아놓고 나눠주는 사람들은 자신의 친필 서명까지 해주고 있었다. 붓펜으로 ‘제자 채문수’라는 서명을 휘갈겨 내미는 책을 받아 들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노인이었다. 그날 나눠준 책들은 저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었고 제작비용도 <토지>의 작가 박경리를 비롯한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다고 했다. 광복로에서 책을 배포한 후 그들은 관할구청으로 자리를 옮겨 ‘김동리문학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심포지엄에선 생전의 작가가 부산과 인연을 맺은 ‘밀다원蜜茶苑’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밀다원다방의 위치는 조금 전 책을 나눠주던 광복로 중간지점이었다.
참혹했던 6.25동란에서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러니 임시수도 부산으로 밀려든 피란민들도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글 쓰는 문인들이 더욱 더 생명에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광복 후 그들은 줄곧 우익의 편에 서오면서 글로서 나라사랑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만큼 침략자들에겐 이들이 모두 반동이었고 제거하거나 북으로 끌고 갈 대상1호가 아닐 수 없었다. 신변에 불안을 느낀 문인들 중엔 벽장이나 다락에 숨어서 지내는 인사들까지 있었으니 그들에겐 부산 피란생활이 생지옥이 아닐 수 없었을 터이다.
밀다원다방은 문화예술인들에게 도피처이자 창작공간이기도 했다.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전쟁통이라 다방 이름처럼 꿀과 차가 풍족하진 못했겠지만 그들은 다방을 찾아 서로를 만나면서 위안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때 작곡가 윤용하는 시인 박화목을 만나 가곡 <보리밭>을 만들었고 가난한 화가 이중섭은 다방 구석에 죽치고 앉아 담뱃갑에서 뜯어낸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리면서 가슴 답답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또한 화가 백영수는 피란지에서의 개인전을 이곳 '밀다원'에서 열기도 했다. 이렇게 피란시절 문화예술인들이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친 아지트였지만 밀다원다방을 가장 현실감 있게 그린 이는 작가 김동리였다.
앞서 밝힌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를 통해서였다. ‘부산진에 들어서면서 기차는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몸을 뒤로 뻗대었다. 초량역에서 부산역까지는 거의 한걸음을 재듯 늑장을 부렸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설 속 주인공은 <화랑의 후예><무녀도><황토기> 등 작품으로 광복 전부터 이미 이름깨나 떨쳤던 작가 바로 자신이었다. 피란지 부산의 거리를 헤매다가는 마땅히 아는 곳 없어 결국 아는 얼굴들이 모여 있는 다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그였다. 자갈치와 광복동에 모든 에너지가 응집되어 그 자체가 ‘대한민국’이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막다른 곳까지 몰린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불안과 허무를 달래던 공간 '밀다원'은 문학총연맹의 약칭인 ‘문총’이란 팻말까지 나붙어 있었으니 당시는 한국문화의 중심이 아닐 수 없었다. 김동리의 소설 속 시인 박운삼의 실제인물인 전봉채가 이곳에서 자살하여 문을 닫을 때까지 매일 문화예술인들로 성황을 이루던 다방이었다. 학술심포지엄에선 시인협회 이근배 이사장이 스승을 회고하면서 작가의 인간미도 느낄 수 있게 했다. 서라벌예대 재학 중 명절에 정종 병을 들고 인사간 제자를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칭찬하더라는 거였다. 요즘 같으면 '김영란법' 시비가 나올 법한 얘기였다.
심포지엄 끝 무렵에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은 관할구청에다 옛 다방건물을 사들여 ‘밀다원 기념관’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고 구청에서는 청장과 구의회의장이 나서서 오케이로 화답했었다. 공교롭게 작가는 6.25사변에서 피란 중 억울한 최후를 맞으신 나의 선친과 같은 연배였다. 그래서인지 1950년대를 복원하여 등장할 ‘밀다원다방’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 다음 해 여름 날 세관 앞 관광안내판에 등장한 ‘밀다원 시대’를 발견했다. 복원을 약속했던 중구청이 참 빨리도 지었구나 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도시의 변방으로 전락한 광복로에다 난리 때의 다방 하나쯤 복원하는 것쯤이야 별로 힘들지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밀다원 시대’는 광복로가 아닌 영주동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자리가 안 되면 말 일이지 산복도로까지 갈 게 뭐람,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고지대의 민주공원에서 좁은 계단을 미로처럼 빙빙 돌아 내려서서 스마트폰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찾아 헤매다가 결국 파출소로 들어갔다. 경찰관들도 처음 듣는다며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현장을 설명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그날은 결국 실패로 끝난 채 해가 저물어 포기했다. 두 번째 찾아가는 날은 '밀다원' 한참 밑에 위치한 영선고개마루의 중구청부터 들렀다.
학교동창인 구의회의장의 도움을 청할 요량이었는데 그는 이미 임기가 끝났고 그의 사무실도 굳게 잠겨있었다. 하지만 의회사무실의 중년 여직원의 친절이 사람을 붙들었다. 통로에 인기척만 나면 나가서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만난 다섯 명 직원 중엔 현장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아는 사람도 거길 무엇하러 가느냐며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버스를 타라고 권하는 걸 도보로 오르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옆으론 동란 때의 피란민 판자촌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등짝에 땀이 흥건하게 배었을 때에야 목적지에 당도했다. 산복도로에 붙은 축대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앉힌 초미니 2층 슬래브건물이었다.
정면 꼭대기에 ‘밀다원 시대’라고 써 붙였지만 ‘중구노인일자리지원센터’ 건물이었다. ‘時代’를 '詩帶'로 바꾼 것은 관청이 이제 사기까지 치느냐고 따지더라도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밀다원 시대> 작가가 생존해 있을 때 시작했더라면 그와 피란시절을 함께했던 이들의 작품이나 소장품들을 모으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2층에 꾸민 북카페는 명칭뿐이었고 실제론 노인들의 쉼터였다. 당시의 K구청장은 지금도 구정을 잘 이끌고 여전히 구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가 '밀다원' 복원을 너무나 쉽게 약속했다가 용두사미도 아닌 시작조차 못한 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6.25가 다가오고 있다. 동란 67주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드리운 일촉즉발의 전운을 말하는 것이다. 김동리 작가는 서설 <밀다원 시대>에서 '피란'을 '피난'으로 쓰고 있다. 난리를 피해서 도망가는 것은 '피란'이고 소방훈련이나 민방공훈련 때 잠시 대피하는 것은 '피난'이다. 내친김에 '전쟁'과 '동란' 그리고 '사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선전포고를 하고 두 나라가 무력으로 충돌하면 '전쟁'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신문과 방송 그리고 전문가라는 교수집단까지 하나같이 '한국전쟁'이나 '6.25전쟁'으로 부른다. 그들은 개념이 없어서라기보다 무의식중에 그렇게들 쓰는지도 모른다.
6.25동란과 관련하여 부산에는 세계에 유일한 유엔기념공원이 있다. 해마다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세계인들이 부산을 향해 1분간 묵념하는 것은 동란에서 희생되어 이곳에 잠든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고 임시수도기념관도 있다. 근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도 부산의 피란시절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처참했던 전란 때의 문학예술을 알릴 수 있는 전시공간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 한 차례 뜻을 내었던 관할 구청과 상부관청이 머릴 맞댄다면 당시의 밀다원다방 하나 매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부디 좋은 결실 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