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물결 살랑거리는 정라항, 삼척 나릿골
삼척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층층이 형성된 나릿골 마을. 한때는 볕 좋고 바람 좋은 산등성이 전체가 오징어 덕장이었다. 삼척=최흥수기자 |
거센 바람도 ‘나릿골’의 봄을 막지는 못했다. 골짜기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깊은 산중일 듯싶지만 나릿골은 바닷가 마을이다. 그것도 한두 채의 집이 띄엄띄엄 떨어진 한적한 어촌이 아니라, 동해의 중심 삼척항이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마당과 지붕을 맞댄 250여채의 집들이 바다에서 언덕 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다. 삼척 시내와는 불과 2km 남짓 떨어져 있다. 한때 삼척 경제를 좌지우지한 나릿골에서 활화산처럼 젊음을 불살랐던 이들은 지금 대부분 노인이 됐다.
나릿골엔 나리꽃이 없다
나릿골 초입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릿골말랑이수퍼’가 눈에 들어온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곳이라 마당에 평상이라도 하나 놓으면 그대로 동네 사랑방이 될듯한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하기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에 편의점이 2개나 있으니 장사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나릿골은 요즘 ‘감성마을’로 변신 중이다. 낡고 칙칙한 슬레이트 지붕은 따사로운 햇살을 닮은 오렌지색으로, 경사진 골목에 안전 펜스 역할을 하는 담장은 하얀 페인트로 새 옷을 입었다. 층층이 지어진 민가를 연결하는 길에는 목재 계단이 설치되고 있다. 빈집이 하나 둘 늘면서 생긴 공간은 쉼터 겸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변신하고, 마을 꼭대기 공터에는 핑크뮬리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마을이 밝아지고 예뻐진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한 평생 터전으로 삼은 주민들보다 관광객 위주의 ‘젊은 감성’에만 치중하는 게 아닐까 조금은 우려된다.
한때 배를 두 척이나 운영했다는 나릿골 주민이 좁은 골목을 통과해 언덕 위 집으로 향하고 있다. |
나릿골 어느 집 텃밭에 파 꽃이 피었다. 하나 둘 빈집이 늘면서 그나마 텃밭을 가꿀 공간이 생겼다. |
‘나릿골’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나루가 있는 마을, 즉 ‘나루골’이 변형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인용된다. 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삼척항은 일제강점기에 삼척ㆍ태백지역 탄광이 개발되면서 무역항으로 정비됐다. 하지만 삼척항이 어항으로 전성기를 누린 건 해방 이후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동해는 어족 자원이 풍부한 곳이고, 삼척은 지리적으로 그 중심이다. 삼척항에 멸치 청어 대구 정어리 오징어 명태 등 수산물이 넘쳐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1930년대에 일찌감치 정어리 가공 공장이 세워졌고, 정어리 기름으로 비누와 양초를 만들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어항으로 더욱 활력을 띠게 되고 나릿골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몰려 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70~80년대에는 노가리와 오징어가 항구에 산더미를 이루었고, 볕 좋고 바람 좋은 나릿골 산마루는 전체가 오징어 건조장이었다. 이곳이 아니면 삼척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돈이 넘치니 사람도 몰렸지만 이들을 수용할 집터는 항상 부족했다. “움막보다 더한 집도 세놓고 살았지. 요즘 보면 거지 토굴도 그런 데가 없어.” 통장을 맡고 있는 김장용(67)씨의 회고를 듣노라니, 나릿골의 한 세기가 흑백필름처럼 돌아간다.
나릿골의 유래에 대해 김씨가 들려 준 또 다른 가설은 가난이 속까지 파고 들어 슬프고도 저리다. 요샛말로 ‘웃프다’고나 할까. 삼척항이 어항으로 전성기를 누릴 무렵, 파도가 높아 출항하지 못하는 날이면 뱃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와 장을 퍼가는 일이 많았다. 물고기는 풍족하니 고추장이나 된장만 있으면 어떻게든 요리는 될 터였다. 마을 사람이라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집집마다 몽둥이를 준비하고 장 도둑을 내쳤다. 그래서 뱃사람들 사이에선 마을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난리골’이 ‘나릿골’이 됐다는 얘기다.
나릿골 유래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는 7~8월이면 꽃잎을 활짝 젖히며 피어나는 나리와 관련이 있다. 나릿골은 언덕이 낮고 골이 얕지만 물이 풍부했다. 골짜기에 형성된 여러 샘은 지게로 져 올린 오징어를 전부 세척하고도 마르지 않을 정도였다. 습기가 있고 볕이 잘 드는 골짜기에 지천으로 피어난 식물이 나리였다. 양지바른 울타리나 한적한 산길에 저절로 피어난 나리꽃을 보면 수수하면서도 화려하다. 그러나 가난한 시절의 나리는 꽃보다 양식이었다. 참나리의 어린 순이나 구근은 나물로 무치거나 볶아 먹는다. 땅속 비늘줄기는 전분, 단백질, 지방은 물론 비타민까지 풍부해 약용으로도 쓰인다. 하지만 몸에 좋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배부른 시절 얘기고, 당시에는 튼실한 알뿌리가 춘궁기의 허기를 채우는 재료였다. 나리가 지천으로 피던 ‘나릿골’ 이야기다.
얼마나 뜯고 캤는지, 안타깝게도 지금 나릿골에선 나리를 찾기 어렵다. 비탈밭과 무덤가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란 유채꽃이 듬성듬성 피었고, 저절로 나고 자란 복숭아가 마을 곳곳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면 시내와 경계를 이루는 봉황산 자락이 온통 벚꽃으로 뒤덮여 황홀하다. 올 여름 나릿골에는 전국적으로 유행을 탄 미국산 핑크뮬리보다 고향마을 누이를 닮은 나리꽃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
비단 물결 정라진과 육향산의 비밀
지금의 삼척항은 지역을 대표하는 항구라 하기엔 소박하기 그지 없다. 시멘트 공장을 빼면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없고, 나릿골 번성의 일등공신이던 고기잡이도 예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전성기를 지나 한적한 어촌마을로 되돌아온 삼척항은 그래서 오히려 정감 가는 여행지다.
삼척항은 오래 전부터 정라진(汀羅津) 혹은 정라항으로 불렸다. 물결이 비단처럼 고운 바닷가라는 의미다. 나릿골 언덕에 오르면 바람결에 뱃사공의 숨찬 노동요가 들려오고, 포구로 내려서면 나릿골 산자락 전체가 잔잔한 수면에 비치는 마을이었다. 오십천에서 흘러내려온 모래와 자갈이 파도와 만나 쌓인 지점에는 ‘건너불’ 모래톱이 형성되고, 막힌 물길은 육향산을 한 바퀴 돌아 바다로 빠져 나갔다.
정라항 뒤편에 육향산이라는 작은 바위산이 있다. 규모는 갯바위 수준이지만 삼척의 역사를 두루 품고 있다. 언덕 위 비각 안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강원도유형문화재 38호로 지정돼 있다. 척주는 삼척의 옛 지명이다. 조선 현종2년(1661) 삼척부사 허목이 풍랑 피해를 막고자 동해를 칭송하는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바닷가에 세운 비다. 숙종36년(1710)에 유실된 비석의 탁본으로 다시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전서체로 쓰인 비문은 내용이 추상적이고 신화적이라 뜻이 명쾌하지 않은데, 자연재해로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 해석하기도 한다. 척주동해비 아래에도 비슷한 의미의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가 세워져 있다. ‘삼척포진성’ 표지석도 있다. 삼척포진성은 외침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 영동 9개 군의 수군을 관장하던 진영이다. 고려 우왕10년(1384)에 처음 설치했고, 조선 중종15년(1520) 둘레 900척, 높이 8척의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제강점기 삼척항 축조 공사로 모두 허물어지고 지금은 표지석만 남았다. 육향산은 이래저래 잊혀져 가는 삼척의 옛 향기를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 곳이다.
삼척 여행 정보
- 삼척 시내와 나릿골은 동해고속도로 삼척IC에서, 유채꽃 축제가 열리는 맹방해수욕장은 근덕IC에서 가깝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삼척고속버스터미널까지 1시간에 1~2회 고속버스가 운행한다. 3시간30분가량 걸린다.
- 삼척항 주변에는 주로 대게와 생선구이 식당이 많다. 고추장을 풀어 국물이 빨간 ‘장국수’는 삼척의 별미다.
- 삼척항에서 동해 추암해변까지 이어지는 새천년해안도로는 드라이브도 좋지만, 시간 여유가 있다면 걸어도 힘들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