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136편*
안호정은 허의원과 지연이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맨발로 뛰어나갔다.
한양 이대감집에서 자신의 다리를 수술한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펑펑 솟았다.
지연이 앞을 보지못하는 봉사를 데려왔다는 소문은 이미 풍기고을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안호정은 앞을 보지못하는 허의원의 어깨를 부등켜 안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일입니까?
우리 의원님 눈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안호정은 지난날 의금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운을 받은적이 있어 치를 떨었다.
허의원의 눈도 필시 그놈들이 아작을 낸것으로 생각했다.
천벌을 받을 놈들.
다시는 한양것들과 상종을 하지맙시다.
안호정에게 한양은 두번다시 떠올리기싫은 지옥같은곳이었다.
안호정은 허의원을 별채로 안내했다.
이제는 아무걱정하지말고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내세요.
고맙소이다.
이곳은 예전에 머물던 별채군요.
문밖의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놀고 있겠지요?
그럼요. 이쪽 문앞으로 옮겨앉으시지요.
허의원은 무릎걸음으로 문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밖을 내다보았지만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기억만으로 연못 속을 헤엄치는 비단잉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내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다른곳에 가실 생각마시고 이곳에서 펑생 편안히 지내세요.
허의원은 안호정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걸 알 수있었다.
하지만 허의원이 안호정의 별채에 머문 기간은 딱 사흘이었다.
안호정은 그 사흘동안 온갖 산해진미를 구해다 허의원을 대접했다.
잠자리까지 함께하면서 허의원의 곁을 지켰다.
오늘이 스무하루지요?
내일은 슬슬 출발을 해야겠소.
다음달 보름까지는 도착해야하니까요.
아니 그몸으로 어딜가신다는겁니까?
안호정은 펄쩍 뛰었다.
무슨 볼일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 해결하라고했다.
그러나 허의원의 결심은 단호했다.
나흘째 되는날 지연의 도움을 받으며 안호정의 별채를 떠났다.
안호정은 떠나는 허의원을 위해 두 사람이 메는 가마를 내주었다.
가마 뒤를 따르는 지연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지연의 가족이 동구밖까지 따라 나왔지만 지연은 자꾸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심마니총각은 지연이 온것을 모르는지 풍기에 머무는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지연은 허전한 마음에 자꾸 소백산을 바라보았다.
필시 심마니총각이 지금도 산삼을 찾으러 저기 어디 산속을 헤매고 있을것 같았다.
지연은 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돌아보았다.
지연은 그것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기억에 남아 그리움에 사모치게 될줄은 모르고 있었다.
가마속의 허의원은 눈이 보이지도 않으니 지연의 속시정을 알 수가 없었다.
*명의 137편*
허의원을 태운 가마는 닷새 후에 계룡산 유구마을에 도착했다.
환자를 돌보고있던 삼식이 놀라 벌떡 일어나다 엉덩방아를 찍었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환자를 마저 돌보아 드려라.
허의원의 말에 삼식은 바닥에 엎드려 등에 뜸을 뜨고있던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뜸이 다 타들어가자 환자가 몸을 세게 뒤틀었다.
삼식은 얼른 남아있는 뜸을 제거하고 치료를 끝냈다.
환자가 주섬주섬 옷을 입는 걸 확인한 다음 허의원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멀쩡하던 두 눈이 움푹 들어간 것이 봉사였다.
아니 주인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뭐가 어찌 되었다는 것이냐?
삼식이 엉거주춤한 사이 지연이 허의원을 방금 환자가 누워있던 아랫목에 앉게했다.
허의원은 자리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뜸쑥이 타는 냄새에 숙지황 냄새와 천궁냄새가 섞여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흠. 여기가 우리집이구나.
내가 있을곳은 여긴데.
지연은 그동안 일그러져있던 허의원의 얼굴이 밝게 펴지는걸 볼수 있었다.
스승님 이제 어디가지 마시고 여기서 편하게 지내세요.
음. 그래야겠구나.
삼식은 아랫목에 앉아있는 허의원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번 행차에 고생이 많으셨군요.
눈은 어찌 된 것입니까?
고생이랄것도 없다.
이게 다 팔자가 아니겠느냐.
그동안 이곳은 별일이 없었겠지?
네. 예전과 똑같습니다.
삼식은 멀쩡하게 대답을 해놓고 가슴이 벌떡 거렸다.
허의원이 떠나자마자 포졸들이 들이닥처 볼기짝을 얻어맞은 일이랑 그동안 환자로 왔다가 배꼽이 맞아 눌러살다시피 하고있는 과부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이 며칠이냐? 스무이레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음. 이제 초하루까지 나흘이 남았구나. 너희 둘은 나흘 후에 길떠날 준비를 하거라.
지연은 길을 떠나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어디를 다녀오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런 언질을 준적이 없었다. 더구나 오래 떠나있어야한다는 말에 더 궁금증이 일었다.
삼식도 마찬가지였다. 오자마자 지연과 함께 어딜 가라고하니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지연과 함께 가라고하니 싫지는 안았다. 그동안 지연에게 은근히 흑심을 품어왔었는데 풍기 안부잣집에 있을 때부터 지연은 삼식이 넘볼 수 없는 남의 여자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지연과 함께 어딜가라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더구나 지금은 과부와 함께 깨기름이 쏟아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명의138편*
허의원과 지연이 유구마을에 도착한 뒤 나흘이 지난 그믐밤이었다.
어둠이 칠흙처럼 가라앉은 밤중이었다. 허의원은 자세를 가다듬고 방 한가운데 정좌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 지연과 삼식이 영문도 모른 채 앉아 있었다.
개짖는 소리도 어둠 속에 잠겨 들리지않는밤 허의원 집의 대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리고 검은그림자가 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검은 그림자는 댓돌 위에 올라서 낮은 헛기침 소리를 냈다.
사형. 제가 왔습니다.
허의원에게 사형이라 부르는 사람은 새남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경영이었다.
나이는 허의원보다 위였지만 흑포 허봉선에게 의술을 배운건 허두겸의원이 먼저였다.
오셨으면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지연이 얼른 방문을 열었다.
김경영이 그림자처럼 방안으로 들어왔다.
사형 절받으세요.
아니, 아닙니다.
연배도 저보다 위인데 무슨 절입니까. 그냥 앉으세요.
김경영은 허의원의 만류에도 절을 했다.
스승인 흑포 허봉선이 사라진 뒤라 두 사람의 마음은 각별했다.
절을 마친 김경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허두겸의원의 양 손을 잡았다.
지금쯤 내의원 수의로 계셔야할 분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셨습니까?
다 천주님의 뜻대로 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허의원의 입에서 처음으로 천주님소리가 나왔다.
흑포 허봉선의 죽음으로 심경에 많은 변화가 왔음이 느껴졌다.
이 두분께서...
아 참. 두 사람은 이분께 인사를 올리거라.
너희들을 배에 태워주실 김의원님이시다.
*명의 139편*
배를 탄다는 말에 지연은 단번에 처참했던 새남터가 떠올랐다.
뭔가에 홀린듯한 흑포 허봉선의 마지막 형형한 눈빛이 떠올랐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밖으로 나가야해.
지연은 깊고 먼바다에 떠있는 검고 거대한 배를 떠올렸다.
그것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크고 거대한 검은 괴물처럼 상상되었다.
반면 같이 앉아있는 삼식도 배를 태워준다는 말에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것은 고작해야 나그네 몇명을 태우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였다.
심지어는 젊은 과부를 태우고 자신이 노를 젓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다 강 한가운데 배를 세우고 과부의 배에 올라타는 상상을 하고 슬몃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때 김경영이 품안에서 비단보자기에 싼 물건을 꺼내 놓았다.
보자기를 풀자 오래 묵어보이는 책이 한권 나왔다.
사형. 이책이 도해의기입니다.
허두겸 의원은 책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도해의기는 자신이 어렸을 적 백두산 속에서 내용과 그림을 달달 외웠던 바로 그책이었다.
허두겸은 두 팔을 내밀어책을 잡으려고 바닥을 더듬었다.
삼식은 까막눈이라 책을 보고도 시큰둥 했다.
반면에 지연은 표지에 적힌 도해의기라는 글씨를 정확히 읽었다.
허두겸은 젖먹이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도해의기를 들어올렸다.
도해의기는 내용도 왜군 포로를 산채로 해부한 내용이 담겼지만 겉표지도 인피로 만든 책이었다.
제목인 도해의기라는 글씨도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에 문신을 새긴 뒤 벗겨서 사용했다.
허의원은 책을 앞가슴에 꼭 안아보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도해의기야말로 허두겸의원의 인생을 태우고 먼 바다를 항해한 배와 같은 존재였다.
그배를 만든 장재철의원의 뜻을 펼치기에는 조선이라는 바다는 너무 좁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그려준 도해의기 첫장의 전신해부도가 기껏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아뜩한 절망감을 느끼지않을 수 없었다.
허두겸의원의 닫혀버린 눈 안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가슴에 끌어안고 몸부림을 칠듯하던 허의원이 조용히 책을 앞으로 내밀었다.
김경영이 지연에게 눈짓으로 받으라고 지시했다.
지연이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도해의기를 받았다.
책을 건넨 허두겸 의원은 마치 가라앉고 있는 난파선에 혼자 남아있는 선장같았다.
이걸 가지고 가거라.
서양의 의술을 배우는데 도움이 될지는 알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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