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디맨 일이 아닌 다른 일로 내가 존에게 연락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정원 있는 집에 살게 되면 강아지를 키우리라 맘먹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이었다 영국에서 어떻게 강아지를 구하는지 몰랐던 나는 허름한 펫숍에서 덜컥 강아지를 사고 말았다 그런데 데려온 지 사흘도 안되어 강아지가 혈변을 보았다 동물 병원에 갔더니 이미 치명적인 병이 들었다고 했다. 벌써 정이 든 데다 아프기까지 한 강아지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성급하게 강아지를 산 나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렇지만 강아지가 내 품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고 속이고 강아지를 판 펫숍에 책임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겁이 났다. 그쪽에서 거절하고 나오면 싸움이 될 것이고,물정에 어둡고 영어도 부족한 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때 존이 생각났다. 그라면 도와 줄 것 같았다 역시 존은 나서 주었다. 펫숍에 전화를 걸어 나를 대신해 일을 잘 처리해 주고 풀이 죽어 있는 나를 위로했다.
어느 날 지나다 들른 존은 리플렛을 한 장 내밀며 런던 배터 시에 있는 동물 입양 센터 정보니 한번 꼭 찾아 가 보라 했다. 자기가 봉사를 다녔던 곳이라 했다. 살기 바쁜 와중에 봉사까지 하고 산다니 존이 다시 보였다. 다음 해 나는 브리더를 통해 강아지를 입양했다(유기견 입양 센터에서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에 입양을 거절했다). 존은 마치 내가 아기라도 입양한 양 축하해 주었다. 다른 일을 하러 왔다가도 강아지 안전을 위해 울타리 손봐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례를 하려 해도 극구 사양했다. 울타리 넘어 갑자기 출몰하는 여우로부터 강아지를 어떻게 지키는지에 대한 요령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료 구입처, 강아지와 여행하는 요령, 동물 병원까지 추천해 주었다. 자기는 백여 마리의 새를 키우고 있다면서 새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새에 문외한인 데다 어휘도 낮설어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신나게 이야기를 할 때 존의 행복한 표정으로 그가 새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몇 달 후 일이 있어 존이 들렀다. 얼굴이 꺼칠한 것 같아 안부를 물었다가 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머릿속에 있는 종양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머쓱하게 씩 웃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민머리를 두툼한 오른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치료는 받고 있냐고 하니까, 아플 때는 약을 먹고 있고 수술은 받지 않을 거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말이 수술을 해도 소용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경제적 이유로 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인지 궁금했으나 그가 내 질문이 그를 불편하게 할까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존을 생각하면 타조알 모양의 머리에 달갈만 한 종양이 들어 있는 이미지가 상상되어 그것을 떨쳐내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존은 변함없이 명랑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얼마 후 내가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일이 생겼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간호해주러 왔다 가시고 갑자기 이사도 하고 아이들 전학까지 시키는 등 많은 일이 벌어지면서 존은 나의 일상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소설 <인생>의 주인공 푸구이는 운명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운명에 무릎끓지도 않았다.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초연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 나갔다. 잇달아 몰아치는 고난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사랑과 우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은 고단했으나 아름다웠다. 비록 존을 일 년 남짓 보았지만 그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인품이 달라지곤 한다. 존은 어떻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성실함과 웃음을 잃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었을까? 위화는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고상함을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위화는 푸구이를 창조했나 보다. 존은 푸구이처럼 고상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