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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묵상글 ( 연중 제6주일. - 사랑의 조각보, - 우리 존재의 궁극적 의미.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2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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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15 05:02
- 사랑의 조각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우리 가운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움이 있더라도 사랑하고,
죄를 지을지라도 사랑하며,
조금 사랑할지라도 사랑하고,
자기만 사랑할지라도 사랑하며,
개를 사랑할지라도 사랑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가운데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아홉 가지 계명은 어기더라도 한 계명은 지키고,
철두철미하게 지키지는 않더라도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율법의 완성을 보려고 합니다.
미흡하고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완성에 열려있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기만 하면 사랑이 있음을 볼 수 있고
작다고 실망하지 않고 작은 사랑도 소중히 여기며,
거기서부터 희망을 지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겸손해야 할 뿐 아니라 가난해야 합니다.
사랑도 욕심부리면 안 됩니다.
사실 욕심 가운데 사랑 욕심만큼 크고 강한 욕심 없고,
그래서 웬만해서는 만족할 수가 없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욕심보다 사랑 욕심에 가난해야 하는데 그리되면
너의 사랑이든 나의 사랑이든 큰 사랑만 사랑이 아니기에
작은 사랑으로도 만족할 줄 알고 고마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사랑도 만족스럽게 되면 사랑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에 집중하게 되면서 다시 말해서 미운 구석은 쳐다보지 않게 되면서
사랑의 완성을 향한 여정은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의 완성은 개인의 사랑만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작은 사랑도 소중히 여기고 너의 작은 사랑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사랑은 작고 불완전하지만
작은 사랑들을 모으고 모아 크고 완전한 사랑이 되게 합니다.
저는 이것을 조각보 사랑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형형색색의 작은 조각들이 모여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 듯
사랑도 각기 다른 사랑들이 모여 공동체 사랑을 완성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사랑의 조각들입니다.
사랑의 조각인데 아주 작은 조각입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작다고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고,
나의 사랑과 다른 사랑을 다양성으로 긍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지향하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사랑을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 얘기하지만
완성의 시작은 나의 사랑이든 너의 사랑이든
사랑의 그 작디작음에 실망치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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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존재의 궁극적 의미! - 여섯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의 사랑의 광대함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진 생략>
인류가 원죄로 인해 에덴을 떠난 그 이후
우리 존재의 궁극적 의미
2026년 2월 14일 토요일
시인이요 저술가인 메리 조 레디(Mary Jo Leddy)는 이 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모든 창조의 근원이심을 일깨워 줍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나무는
당신을 향해 가지를 뻗고,
모든 풀은
당신을 향해 뿌리를 내립니다.
모든 길은
당신께 이어지고,
수많은 물은
당신 사랑의 광대함을 향해 흐릅니다.
숨결은
당신 안에서 들고 납니다.
모든 마음은 당신께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저희가
존재의 근원을 놓칠 때
얼마나 불행한지요.
그러나 당신을 향한 갈망과 기울임을
따라갈 때,
얼마나 복된지요.
References
Mary Jo Leddy, Radical Gratitude (Orbis Books, 2002), 104.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bishek Rana,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동산 안에 있는 뱀이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합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독과 도전을 식별하는 분별의 길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순수에서 경험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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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신앙은 규범의 엄격함보다, 성령 안에서 눈을 열어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깊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마태 5,17-20)은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핵심은 "율법의 철저한 준수"가 아니라, 그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율법이나 예언자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는 선언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보다 그 정신을 실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사랑의 계명과 직결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그들은 성실하고 열심히 율법을 지켰지만, 때로는 형식주의와 외적 규범에 치우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단순히 규칙을 넘어서는 내적 변화, 곧 회개와 성화의 길을 뜻합니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부정적으로 묘사되기에, 마치 그들이 모두 악의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 집단 전체에 대한 불공정한 평가일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대체로 헌신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시야가 좁고 율법을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언급된 "키자이(눈을 감는 자들)"처럼 극단적인 소수도 있었지만, 모든 바리사이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회심 이전에는 바리사이였으며, 회심 후에도 "나는 바리사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3,6-8).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첫 언급(마태 3,7)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사두가이들과 함께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해석하시는 듯 보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종교를 본질적으로 "엄격함과 절제"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더 엄격할수록 더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요. 물론 절제와 규율에는 그 나름의 자리가 있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마치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지만 정작 '주의 깊게 운전하지 않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법규는 일반적이지만, 도로의 구멍이나 과속방지턱, 보행자, 다른 차량은 모두 구체적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바리사이들의 편에 서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신중히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이나 예언자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율법이 완성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 지켜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글자에 충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붙잡는다."(마르 7,8)고 꾸짖으셨습니다. 율법은 그 목적이 이루어질 때 완성됩니다. 율법은 목적을 향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아닙니다. 만일 율법이 그 목적을 방해한다면, 더 이상 참된 율법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율법을 '이성을 통한 질서'로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권력의 억압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인도하고 보호하는 길잡이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율법은 우리의 눈을 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뜨게 합니다. 율법의 본질은 엄격함이 아니라 "제대로, 혹은 참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눈먼 이들이 눈먼 이들을 인도한다."(마태 15,14)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능가한다"는 표현은 "더 깊다"라는 의미로도 번역됩니다. 얕은 신앙은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에 지나친 엄격함으로 보상하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성령의 빛 안에서 눈을 열고, 사랑과 자비로 율법의 정신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얕은 신앙은 마치 기억에만 의존해 움직이는 반쯤 눈먼 도롱뇽과 같아, 결국 눈을 뜨기를 거부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엄격함'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과 일치하며, 성령의 빛으로 눈을 열어 세상을 사랑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참된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더 깊은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억압이 아니라 은총의 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규범의 엄격함보다, 성령 안에서 눈을 열어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깊게 살아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법정 스님의 [일기일회]에 나오는 "직선으로 가지 말고 곡선으로 가라!"라는 법문 한 부분을 오늘의 화두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만을 위해 과정을 소홀히 한다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가령 차를 타고 어디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는 동안 많은 사람과 사물을 보면서도 시간 맞춰 목적지까지 가려는 의식 때문에 도중에 보이는 것들에 대래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목표지점보다는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 과정이 곧 우리들의 일상이자 순간순간의 삶입니다. 아시다시피 삶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매 순간의 쌓임이 세월을 이루고 한 생애를 이룹니다.... 우리 이전 세대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이루어 놓은 삶의 축적이 오늘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비해 여유롭게 사는 것은 그 덕분입니다. 사랑 역시 기다림의 세월을 동반하지 않으면 성숙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움터서 꽃 피고 열매 맺기까지 봄, 여름, 가을이 받쳐 주어야 합니다...."
이 글은 저에게 예전 더 젊었을 때의 저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을 오를 때 저는 정상 정복에 늘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주변의 아름다움을 누리면서 산을 오르내리지 못했던 기억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수도원의 형제들과 함께 지리산을 오를 때의 일입니다. 어떤 형제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다음부터 가롤로 형제하고는 산이 같이 오지 말아야 겠어...." 주변의 아름다움보다는 빨리빨리에 더 집중하던 저에 대한 나무람이자 충고였는데, 사실 그 때는 그저 피식 웃으면서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저도 무척이나 중요시했는데도 실 생활에서 별로 그 의미를 살아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나이를 먹으면 세월이 더 빨리 간다고 하지요?! 이제부터 페이스를 늦추는 노력을 하면서 제대로, 참으로 바라보고 누리는 훈련(수양)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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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집회15,18)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지혜’를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의 지혜’는 ‘율법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실,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의로운) 백성이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요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왜곡해서 그릇되게 지키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안식일법, 정결법, 단식법 등을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며 대립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율법의 거부자 혹은 파괴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그러니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실현된다는 말씀입니다. 골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율법을 지키는 것, 실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고 실행할 수 있을까?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에제 36,26-2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영으로 율법을 지키고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에 따라 실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래서 <루카복음>과 <묵시록>에서는 ‘말씀을 지키는 이에게 행복이 선언됩니다.’(루카 11,28; 묵시 1,3).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지혜입니다. 곧 지혜는 사랑을 실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실행’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요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인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새로운 의로움’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첫 번째 ~ 네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살인,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한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의로움에서 ‘실인’에 대한 것으로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율법의 본질이 ‘화해’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둘째와 셋째> 의로움에서도 ‘간음’의 내적 뿌리가 마음에 있음과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임을 밝히시면서,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넷째> 의로움은 ‘맹세’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으며, 우리는 진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에 “예”할 것은 “예”(ναι ναι)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οû οû)라고 응답하라고 하십니다. 곧 응답하되 맹세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되 진리 안에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그러니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의 응답 곧 원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1독서>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주님!
말씀을 이루소서.
제 삶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복된 땅이 되게 하소서.
그 크신 사랑을 이루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폐지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지키고 키우고 실행으로 완성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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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한 자매님 두 분을 만났습니다. 두 분 모두 오랜 세월 부부로 살아오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 분은 딸이 둘이었고, 다른 한 분은 아들이 둘이었습니다. 같은 상실의 아픔 앞에 서 있었지만,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은 달랐습니다. 딸이 둘인 자매님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아직 돌봐야 할 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집안일과 아이들을 챙기고, 밤에는 일을 하며 가족을 책임졌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에 담아 두되, 원망이나 후회로 붙잡지 않고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었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아들이 둘인 자매님은 아직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몇 년만 더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하던 일과 그 빈자리를 계속 바라보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믿음직한 아들이 있으니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고, 남편이 하던 일도 아들과 함께 이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보다 아내가 기운을 내고 살아가는 모습을 하늘에 있는 남편도 가장 기뻐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자매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그 질문 앞에서 완전히 응답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질문하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그 질문들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인간이 자기 자신 앞에, 그리고 하느님 앞에 서도록 부르시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질문은 심문이 아니라 초대이며, 단죄가 아니라 회개의 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아담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동산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셔서 묻지 않으십니다. 이 질문은 아담의 영적 위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죄를 지은 뒤 아담은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하고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찾아 나서시며 다시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러나 아담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벗었기 때문에 숨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곧이어 그 책임을 여인에게, 더 나아가 하느님께 전가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여자가”라는 말 속에는 회개가 아니라 변명이 있고, 고백이 아니라 자기 보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변명이 아니라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진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의 신원을 묻는 질문인 동시에, 제자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대답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이며, 관찰이 아니라 관계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이 인간의 계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응답은 예수님이 원하신 응답이었고, 그 응답 위에 사명이 주어집니다. 또 한 번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질문하십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누구였느냐?” 이 질문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율법 학자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한 질문입니다. 율법 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피하지만, 이미 편견을 넘어 진실에 도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옳은 응답은 곧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질문은 언제나 인간을 살리기 위한 질문이지만, 회피하는 응답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정직한 응답은 인간을 사명으로 이끕니다. ‘하느님 앞에서 숨을 것인가, 아니면 서 있을 것인가. 책임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응답할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어디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너는 네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구원은 하느님의 질문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구원이 우리 삶 안에서 완성되는지는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숨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는 용기 있는 응답이 오늘 우리의 신앙을 살릴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응답하며 실천의 길을 걷고 있고, 어떤 이는 아직 주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아담의 길이 아니라, 베드로와 율법 학자의 길을 선택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회피와 변명이 아니라, 응답과 실천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의로움은 하늘나라를 향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질문 앞에서 숨지 않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참된 의로움으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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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화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이 세상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제 마음속에서 자주 머리를 쳐드는 것이 젊은 시절 제 인생 여정 안에서 발생한 실수요,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회한의 정입니다.
그때 그 순간 왜 참지 못했을까?
왜 하필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해서 두고두고 후회할까?
특히 오늘 주님께서 건네시는 말씀 들으니 더 그런 생각이 커집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돌아보니 얼마나 자주 가까운 이웃들에게 불처럼 화를 냈고, 또 그 화를 제어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표현을 안팎으로 자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화를 내고 있고, 요즘은 겉으로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런 과한 표현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요즘 화날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숨기지 말고 솔직히 화를 내고, 분노할 일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 자신을 돌보고 방어하는 노력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껏이라야지, 틈만 나면 흥분하고, 여기 퍼붓고 저기 퍼붓다가는 주변 사람들 다 떠나가고 철저한 외톨이로 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화나 분노의 성숙하고 균형 잡힌 발산입니다.
먼저 분노할 일인가 웃어넘길 일인가 식별이 필요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정말이지 억울한 일,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저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그 무엇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그런 순간은 아이큐가 30퍼센트 급하락하는 순간이니, 절대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냉각 기간, 짧게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한 후, 이성을 차리고 평상심을 회복한 후, 억울한 일에 대응을 하면 좋습니다.
그런 순간 기도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성모송을 천천히 세 번 정도 바치며,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주 좋은 노력입니다.
언성을 높이면 지는 것이니, 일단 편안한 목소리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것이라며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나를 나 스스로 변호하고 배려해주는,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보니 화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계신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여정도 분노 한번 하지 않고 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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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한 산부인과 의사의 삶을 보며....
자세한 내용은 알지는 못하지만 유튜브와 잡지를 통해서 한 남자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 신앙인의 삶을 묵상해봤습니다. 이 선생님은 1년 365일 24시간 언제든지 산모가 출산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병원에서 대기하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환경이 될 수 있도록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 선생님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런 와중에 빚에 쪼달리는 상황이고 유튜브 수입으로 병원 재정을 메우는 현실입니다. 처음 이 사연을 접했을 때 감동이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기사에서는 어떤 분은 자기는 자녀 세명을 이분이 다 받아주셨다고 하시면서 만약 딸도 애를 출산하면 이 선생님께 맡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만약 제가 여자이고 또 결혼해 임신을 해 산부인과를 가야 한다면 저는 죽어도 여자 의사에게 갈려고 기를 쓸 겁니다. 제 성격상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실 아무리 의사이지만 다른 것은 모르지만 특히 이 과는 다른 과와 달리 어떤 내재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방금 인터뷰한 이 여성분도 처음엔 이처럼 이 의사 선생님께 가는 걸 상당히 꺼려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첫 애를 출산하게 됐다고 합니다. 처음엔 꺼려했는데 이분이 어떻게 해서 그 선생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아닌 추천을 하게 됐는지 그 사연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겠습니다. 사람마다 다 호불호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단정은 할 수 없지만 일단은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이 남다른 점이 있다고 합니다. 돈보다는 생명이 우선이다는 사고입니다.
단순히 이것만 가지고 그렇게 선호하신 건 아닙니다. 산모를 바라보는 입장도 단순히 출산을 앞둔 산모로 보는 게 아닙니다. 같은 말 같지만 하나의 생명을 잉태한 거룩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태도에서 무한 신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두 명의 자녀도 이분이 다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외적인 이미지는 전혀 의사 같은 분위기는 특히나 산부인과와는 더 거리가 먼 그런 느낌이지만 이분의 삶의 철학을 알게 되면 누구에게나 추천을 하고 싶은 그런 의사 선생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친구 중에 의사가 많이 있습니다. 솔직히 동창회나 반창회에서 의사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그 친구의 면을 내려깎는 게 아니라 사실 환자가 환자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를 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쌓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건 맞습니다. 다른 의사들도 대부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의대에 학생들을 그동안 많이 보내 지금 의사를 하는 애가 많지만 그들 역시도 인류에 대한 인술을 펴칠 목적으로 의대를 간 게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부와 명예가 따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도 처음부터 이런 개념으로 의사갸 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엔 다들 생각하는 것처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의사였는데 어떤 계기로 변경이 된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이런 계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만 본다면 사실 의사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중산층 서민의 삶보다 삶의 질은 더 떨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사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도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려고 그 어려운 의대 공부를 했냐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분의 철학을 보면 그런 말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고귀한 삶의 철학을 평가절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자신은 그렇게 살 엄두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심은 훌륭하다고 인정은 하지만 겉으로는 인정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의사 저런 의사가 있는 것처럼 이런 신자 저런 신자가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사례처럼 처음엔 다 의사로 출발을 했지만 지향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삶의 질도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출발을 했지만 어떻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는 거룩한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길을 가는 신자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을 빌리자면 애초에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탄식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잘못된 길로 가는 신앙인도 있을 겁니다. 만약 이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이 길을 가는지 잘 모른다는 데에 아주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개인에게는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길을 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도 잘 모릅니다. 그 길을 가면서도 정작 자신은 잘 가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초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그 마음 바로 그 초심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신앙인의 길을 가다가 잘못 길을 들어서면 자신이 가는 궤도를 스스로 자가진단을 해 수정하고 제대로 된 궤도로 계속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수단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성찰'입니다. 이런 성찰을 기반으로 해서 끊임없이 초심을 기억하는 사람은 우리의 본향인 천국에 무사귀환하겠지만 그렇치 못하게 되면 그의 영혼은 고난과 고초의 길을 걷게 될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영혼은 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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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태 5,17–3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그리고 그 완성은 “더 엄격한 규칙”이 아니라,
마음의 뿌리까지 내려가는 사랑의 방향으로 드러납니다.
살인은 손으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분노와 멸시가 마음에서 자랄 때,
이미 관계는 상처를 입습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 이전에 시선과 욕망의 방향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규칙을 지키는가, 아니면 형제를 살리는 마음을 지키는가?
성 예로니모는 복음을 “글자”로만 붙들면
마음이 오히려 굳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며,
말씀은 마음을 바꾸는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즉,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책감으로 몰아붙이기보다
평화와 인내의 뿌리를 마음에 심으려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 한 줄로 모입니다.
“관계를 살리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려라.”
주님,
제가 ‘옳음’을 지키느라 사람을 잃지 않게 하소서.
분노가 자라기 전에 멈추게 하시고,
시선이 어두워지기 전에 빛을 선택하게 하소서.
평화의 길이 느려도, 끝까지 걷는 인내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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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00 추가
마태 5,17-3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 자기의 일은 알아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어린 시절 TV에서 자주 보았던 한 교육회사의 CM송입니다. 학생들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공부는 부모가 시켜서, 혹은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본인의 자아실현과 참된 행복을 위해 해야 할 ‘자기의 일’로 여기며 능동적, 적극적으로 해야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공부를 ‘자기 일’로 여기는 학생은 선생님이나 부모가 정해준 분량을 채웠다고 해서 바로 책을 덮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게 무엇이고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공부합니다. 또한 누가 시켜서 억지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서 마지못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때가 되면 알아서 공부합니다. 그렇게 ‘최소의 공부’가 아닌 ‘최선의 공부’를 함으로써 매일 조금씩 성장하여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내 삶에서 완성되어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 집회서의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또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하느님은 인간을 어떤 명령어를 입력하면 정해진 결과를 출력하는 ‘기계’로 창조하신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 뜻에 맞는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나쁜’ 것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죄악의 어둠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간다면 그건 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스스로의 책임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과 일치되어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니, 그런데 그 행복은 그분 뜻과 계명을 억지로 따른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게 아니니, 마음에서 우러나온 의지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의롭게 보이려고 마지못해 율법규정을 지켰기에 그것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수준, 즉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로는 율법을 어기지 않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수도, 그분과 일치하여 참된 행복을 누릴 수도 없지요. 하느님 말씀을 기꺼이, 기쁘게 따라야 그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고,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되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위’를 조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더 자세히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뜻을 거스르게 만드는 나쁜 마음을 비워내는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를 총 세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십니다. 첫째,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를 세심하게 헤아리며 삼가라고 하십니다. 또한 누군가가 나에게 서운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면 당장 그로 인해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상황을 방치해두지 말고 그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그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의 근본정신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막는 데에 있지 않고, 용서와 화해로 갈등을 극복하여 참된 형제애를 이루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둘째, ‘간음’이라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성을 바라보는 마음가짐 자체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간음이란 혼인의 유대로 맺어지지 않은 사람과 부정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그런 죄를 저지르는 것은 우리 마음이 성적 욕망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성을 내 욕망을 해소할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삶의 동반자’로 만들어 주신 이성을 사랑과 존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들기에,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완성을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지요. ‘성격 차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갈라서려는 모습이, 이혼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두 사람이 맺은 유대가 끊어진다고 여기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하는 행위가 간음인지 아닌지를 따지며 책임을 회피할 궁리를 하기보다, 나를 죄짓게 만든다면 내 신체의 일부라도 잘라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자기 마음 속에 자리잡은 욕망들을 철저히 비워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 욕망이 만드는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나와 내 삶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 자체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 앞에서 자신을 뽐내며 드높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지킬 능력도 상황도 안되면서 헛된 약속을 ‘공수표’처럼 남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그 공수표가 ‘부도’가 나면 나는 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세상에 오직 하느님 밖에 없으니, 그분의 뜻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라면 “예”하며 철저히 순명하라고 하십니다. 반면 내가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되는 일이라면 “아니요”하며 단호히 배격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단순하고 분명한 식별과 실천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그리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에 세 가지 길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따르는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 이 세 가지 길 중에 어느 것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인지 그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적극적 계명을 따라야겠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보다 “이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적극적 계명을 따라야겠습니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보다 “하느님 뜻에 철저히 순명하라”는 적극적 계명을 따라야겠습니다. 그 실천을 통해 한 발 한 발 확실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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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 연중 제6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1:00 추가
진심으로,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쏟아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0-22ㄴ).”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3-34ㄴ).”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1) 이 말씀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너희의 의로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제5계명, 제6계명, 제8계명을 언급하신 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으면 제5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에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살의와 증오심과 분노가 가득 차 있어도,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니까 죄를 안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살의와 증오심과 분노도
제5계명 위반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제6계명의 경우에도,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지 간에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제6계명 위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의 경우, 세속 법정에서는 실제 행동만 처벌하고, 생각만 한 것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세속의 법률’과 같은 급의 법률로 취급한 셈이 됩니다.
그것은 신성 모독죄가 됩니다.>
2) ‘저녁기도’에 들어 있는 ‘반성 기도’를 보면,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 그리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반성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때문에, 나쁜 생각도 죄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하느님은 ‘숨은 생각’도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고해성사를 볼 때, 행위로 지은 죄는 당연히 고백해야 하고,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해야 합니다.
3) 루카복음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0-14ㄴ).”
세리만 의롭다고 인정받고, 바리사이는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 바리사이가 ‘행위’로는 강도짓, 불의, 간음죄를 짓지 않았지만, ‘생각’으로는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바리사이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내적 욕망을 억누른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는 죄를 짓지 않아도 생각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생활 전반에 넓게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은, 또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겉으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진심으로,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쏟아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미사 참례를 예로 들면, 몸은 성당에 앉아 있었어도 생각과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면?
남들이 보기에는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미사 참례가 아니라 예수님께 죄를 지은 것이고,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는 잘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실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3,23).
십일조를 내는 일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일입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사람들의 눈에 잘 안 보이는 일’입니다.
보이는 일만 잘하고 보이지 않는 일은 안 하는 것,
그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을 보면,
그 행위와 헌금 액수만 보면서 열성적인 신앙인이라고 판단할 때가 많은데, 예수님의 판단 기준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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