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도와 육자배기,그리고 소설가 곽의진
글. 사진 : 백승훈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하던 단풍들이 낙엽되어 갈 곳을 몰라 거리를 방황하는 11월,
어느 자연보존론자는 11월을 '도끼를 위한 달'이라고 했다.
낙엽이 다 진 뒤에라야 비로소 어느 나무를 베어야 할지 알게 되고, 도끼날을 갈때 날이 얼어붙지 않을만큼 따뜻하면서 나무를 베어도 좋을만큼 적당히 추운 때가 11월인 까닭이다. 하지만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의 2012년 11월은 누가 뭐래도 '진도를 위한 달'이다. 1년에 한 번, 어렵사리 마련되는 1박 2일의 특별한 기행지로 수많은 후보지를 마다하고 전라남도 끝자락의 '보배섬 진도(珍島)'를 강력히 추천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1박 2일의 기행지로 진도를 추천한데에는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오래 전에 들었던 진도의 전통남도소리에 깊이 매료되었던 기억 때문이다.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던 진도 소리의 감동을 우리 회원들에게도 한번쯤은 골고루 나눠주고 싶었고, 소리가 삶이고 소리가 사랑인 진도 사람들의 들숨날숨을 함께 느껴보고 싶었다. 하여 이번 진도기행의 주 테마는 '문학'이 아닌 '소리'다. 이 세상 노래치고 시가 아닌 것이 없다고 보면 소리기행 또한 넓은 의미의 문학기행이라 할 수 있을테니 딱히 딴죽을 걸 일은 못된다.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서 진도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진도는 원형의 섬이다. 음악과 놀이와 그림과 무속의 원형이 이 섬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서 완성되었다. 이 원형들은 굳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 출렁거리는, 열려진 표현 양식이다. <진도 들노래>는 김 매는 대목에서는 한없이 느리고 유장한 진양조 장단으로 흘러간다. 그러다가 새참을 머리에 인 아낙네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 장단은 돌연 신바람 나는 자진모리로 바뀌어, 일의 신명과 밥의 신명은 하늘에 닿는다."고.
진도로 답사를 떠나던 날, 하늘은 맑고 자동차는 수시로 제한속도에 걸려 네비가 경고음을 울릴만큼 시원스레 뚫려 있었다. 내가 처음 진도를 찾은 것은 아마도 90년 대 초반쯤으로 기겅된다. 지인의 여행길에 따라 나섰다가 느닷없이 행선지를 바꾼 바람에 꼼짝없이 진도대교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읍내로 들어가 지인의 단골식당에서 장어탕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났을 때 식당 주인은 주섬주섬 낚시도구를 챙겨 우리를 방조제가 있는 바닷가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생전 처음 낚시란 걸 해보았는데 낚시보다는 그 밤의 바닷가 풍경이 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침 하늘엔 보름에 가까운 둥근 달이 떠 있었고 자욱한 해무 사이로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수묵화 속의 먼 풍경처럼 점점이 떠 있었다. 해무 사이론 끊임없이 나즈막히 해조음이 새어나오고 이따금 집어등을 밝힌 배가 느리게 지나가던 그 꿈결 같은 밤은 아무래도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진도대교를 건너는데 김병철 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걸쭉한 남도 사투리가 살갑기 그지없다. 김병철씨의 공식직함은 진도의 대표적인 소리마을인 소포리의 전통민속체험전수관장이다. 이번 진도소리기행의 하이라이트를 책임져 줄 장본인이기도 하다. 마침 부지깽이도 뛴다는 가을걷이가 한창인 때인지라 되도록이면 김관장의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황국장과 지도를 펼쳐놓고 첫날의 답사 코스를 정했다.
첫번 째 기행지는 녹진관광지에 있는 승전공원이다. 진도대교를 건너면서 오른쪽으로 눈길을 주면 우뚝 선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진도가 예향이라고 하지만 이 충무공과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왼 손엔 큰 칼을 들고 오른 손을 들어 울둘목을 가리키는 이충무공의 동상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란 필사즉생의 결의에 찬 모습이다. 명량해전에서 왜적을 향해 진두지휘 하던 모습이 저러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만큼 위풍당당 하다.
정유년(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패하여 거의 괴멸되어 조선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자 조정에서는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서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여 후퇴하면서 명량에서 일본 수군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1597년 9월 16일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정유재란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은 세계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로 이순신의 뛰어난 통솔력과 의로운 전라도민들의 구국정신이 하나되어 이뤄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명량해전은 그리스의 살라미스 해전, 스페인의 칼레해전, 넬슨 제독의 트라팔카르 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힌다.
마침 명량대첩축제가 끝난지 얼마 안되어 승전광장 이곳저곳엔 울긋불긋한 군기가 돛폭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울둘목의 물살은 그날을 상기시키려는 듯 사납게 울어댄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은 우리에겐 영원히 기려야 할 승리임에 분명하지만 그 승리의 이면엔 수많은 목숨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전쟁은 피치못해 치루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일 뿐,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든다. 승전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왜덕산이란 나지막한 산이 있다고 한다. 명량해전 이후 죽은 수많은 왜군들의 시체를 거두어 우리 백성들이 장사 지낸 곳이라 한다. 비록 살아서는 무찔러야 할 적군이었지만 죽은 뒤에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런 연유로 지금도 일본에선 그들의 후손이 왜덕산을 찾아와 그때의 일들을 고맙게 여긴다고 한다.
승전공원을 둘러보고 시장끼가 밀려오고 또 식사도 정해야했기에 녹진항 근처의 횟집을 찾아들었다. 딱히 회를 먹으려 한 것은 아니고 둘러보니 주변엔 횟집 간판만 즐비했던 탓이다. 식사를 하며 찾아온 연유를 말하니 주인은 수조에서 커다란 낙지를 꺼내보이며 낙지연포탕을 강추한다. 진도 기행의 첫 점심은 낙지연포탕으로 정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이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이곳이더니라....."
이 충무공 전첩비는 고군면 벽파리의 정남방 산기슭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기념비로, 1956년 군민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일본 대마도를 굽어보며 장엄하게 세어진 이 비석은 가로 14m, 세로 18m의 넓이로 암석을 다듬고 석축을 쌓아 이 충무공의 넋을 담고 있으며, 11m의 웅장한 높이를 자랑한다. 비석의 주추는 거북의 등허리에 비석을 세웠고 머리에는 쌍용이 휘감은 채 머리를 내어놓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정유재란 때 13척의 적은 배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전공이 기록되어 있는데 글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짓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 선생이 썼다. 바위산의 암석을 다듬어 거북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비를 세운 것도 특이했지만 이렇게 웅장한 비석을 군민의 성금으로 세웠다니 진도 군민들의 이충무공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주차장 전첩비 안내문 앞을 가로막은 운동기구와 비 울타리에 바짝 다가 세워진 음수대와 커다란 스텐리스 재떨이가 눈에 거슬렸다. 좀더 세심한 관리가 따랐으면 싶다.
벽파진의 이충무공전첩비를 뒤로 하고 다시 용장산성을 향해 차를 달린다. 벽파진의 전첩비가 승전을 기념한 승자의 역사라면 용장산성은 패자의 비애가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얼마 전에 끝난 모 방송의 tv 드라마 '무신'을 즐겨봤드랬다. 고려의 무신정권 시대를 다룬 그 드라마에 삼별초가 나온다. 무인정권 말기, 최우가 집권하여 도적이 횡행하자 이들을 잡기 위해 별도의 부대를 조직하여 야별초라 했는데 점차 인원이 늘고 기구가 확대되어 좌별초와 우별초로 편성되고, 이후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이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로 창설되었다. 이렇게 좌별초와 우별초, 그리고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가 되었는데, 삼별초는 대몽항전의 진 시기를 통해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용장산성은 1270년(원종 11년)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몽고에 굴복한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삼별초와 그 지지자들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축성한 성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부서를 정하고 관부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승화후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별도의 정권을 세운다.
원종 12년(1271) 5월 고려 정부는 김방경 등을 내세워 몽고군과 연합군을 이루어 용장산성을 공격하였고,삼별초의 잔여세력은 진도를 떠나 제주로 옮겨가 2년 간이나 항거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용장산성 앞에는 최근에 조성된 고려항몽충혼탑과 삼별초의 항쟁의 모습을 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삼별초군이 이곳에 머문 것은 8개월이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석벽과 석축을 쌓고 성을 구축한 것은 몽고에 굴복한 정부에 등을 돌린 민심의 도움이 있었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왕실에 실망한 진도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었을 것이다.
한때 왕궁으로 사용되었던 용장사는 가을 볕 아래 적요하기 그지 없다. 새로 지은 듯한 종루에는 아직 종이 걸려 있지 않고 나그네가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인기척이 나지 않는다.
다시 차를 달려 찾아간 곳은 남도진성(남도석성). 이곳도 용장산성과 함께 대몽항쟁의 역사적 현장이자 호국의 성지로 꼽히는 곳으로 배중손 장군이 사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배중손 사당이 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도는데 성 안의 집들이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룬 것처럼 군데군데 지붕이 벗겨지고 비닐하우스는 비닐이 찢겨지고 활대가 아무렇게나 휘어져 있어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지난 번 태풍의 후유증이란다. 성을 밟아 돌면서 내눈을 잡아 끈 것은 감나무에 돋은 새잎이다. 아침저녁으로 한기를 느끼는 이 가을에 새 잎이 돋은 감나무를 보려니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길을 오가며 희끗희끗 눈에 비치던 흰 벚꽃들, 새잎이 돋은 감나무들, 모두가 태풍의 뒤끝이다. 그러고보니 한창 단풍이 들었어야 할 감나무, 벚나무엔 이파리가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게 목숨 가진 자의 숙명이다. 살기 위해 새로 잎을 내고 꽃을 피운 나무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허투로 살아온 허방 많은 내 삶의 안섶을 더듬어 보게 된다.
이제 진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다는 세방 바닷가로 차를 달린다. 세방낙조를 보기 위해 서쪽으로 차를 달리는데 커다란 산수화 한점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동석산(銅石山)이다.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란다. 저 산 어딘가에 풍혈이 뚫려 있어 바람이 불면 종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종소리를 두고 천종이 울린다고 하는데 여기서 천종은 하늘의 종(天鐘)이 되기도 하고 천 개의 종(千鐘)이 되기도 한다. 우야둔동 저 산에서 천종이 울리는 날 민족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하루빨리 그 천종이 울리길 기도하는 수 밖에.
동석산을 지나 몇 구비를 더 돌았을까? 탁 트인 바다가 우리를 맞는다. 이름하여 세방낙조다.
서녘바다로 내려앉는 해를 품은 구름이 이따금 비켜서며 바다로 은빛 빛살을 한무더기씩 쏟아놓는다. 바다는 햇빛을 받아 마냥 설레이고 화공이 먹물을 흩어놓은 듯 점점이 놓인 섬들이 저녁기도라도 하는 듯 고요하다. 햇살에 눈이 부시어 미간을 찡그리는데 시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섬에 가리
바람 따라가듯
길 없어도
바다를 향해 가슴을 열고
너에게 가리
일곱빛깔 영롱한 별빛 아래
바다와 하늘이 몸을 섞으며
슬픔을 묻는 곳
그 곳에 가리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돌아온 길 돌아다보며
먼 하늘 한자락 눈에 묻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서 있는
남쪽 끝 그 섬으로
나는 가리
김정화는 글을 짓고
이주림은 글씨를 쓰다
진도를 돌아보며 느낀 것 중의 하나는 가는 곳마다 어렵지 않게 시비가 서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세상에 이름을 얻는 것은 헛묘 하나 짓는 일과 같다고 했다. 비록 세상에 드러나진 않았으나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묵묵히 시의 밭을 일구고 시심을 품고 사는 이들이 어쩌면 진정한 시인이 아닐까? 진도를 찬찬히 돌아보다 보면 몇 마디의 화려한 시어로 독자들을 현혹시키기보다는 사람과 시가 어긋나지 않는 진실한 시인을 만날 것도 같단 생각이 든다.
곽의진은 나를 그 헛간과도 같은 방 안으로 들이지 않고, 마당의 바위 위로 홍주병을 내왔다. 안주는 말린 김이었다. 그 때, 세방의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세방의 일몰은 멸망과 신생 사이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먼 섬들이 사위는 빛 속으로 불려 갔다. 내 눈에는 곽의진은 글쓰는 귀신처럼 보였고, 그의 필경업은 무슨 저주처럼 느껴졌다. 곽의진은 그 막막한 일몰에 아주 몸이 절여진 사람처럼 처연히 온몸을 노을에 맡기고 홍주를 마셨다. ..........
진도의 남쪽 바닷가에는 혼자서 컴퓨터 자판을 달그락거리는 곽의진이 있다. 멀어서 가지 못하고, 다만 그 바닷가를 생각하고 있다. 일출과 일몰의 그 감당 못할 슬픔에 맞서는 인간의 컴퓨터 소리가 그 바닷가에서 끝없이 달그락 거리기를 바란다. - 소설가 김훈 -
이곳 어디엔가 김훈이 말한 작가 곽의진이 소설을 쓰던 오두막이 있다고 했다. 문화일보에 소설을 연재하기로 계약을 하고 도망치듯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눈만 뜨면 컴퓨터 자판을 달그락 거리며 글쓰는 귀신이 되어 살았던 소설가 곽의진. 그녀가 그때 썼던 소설이 다름 아닌 운림산방의 소치 허련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다.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려했는데 구름이 먼저 해를 삼킨 바람에 우리는 도중에 발길을 돌려 전통민속의 보고라 할 소포리를 향해 떠났다.
소포리에서 육자배기에 취하다
소포리마을은 진도군에서 자연마을 단위로 가장 큰 마을이다. 한때는 300여 호에 이른 적도 있으나 현재는 150여 호에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진도의 특산품인 검정찹쌀의 원조 마을이자 도지정 제 18호인 진도 북놀이, 제19호인 진도만가.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제51호 남도 들노래가 독립적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도 지정 무형문화재 39호인 소포걸군농악의 보유지다. 또한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 72호 진도 씻김굿 예능보유자 (고)박병천 선생의 주활동무대였다.임진왜란 때 거지행세를 하며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우군에게 알려주어 승리를 하게 했다는 걸군 농악은 일제시대엔 전남지역투어를 다니며 민족문화를 계승해왔고 마을 자체적으로 극단을 조직하여 진도 전역을 돌며 공연을 하던 문화적 생산력이 대단한 마을이었다. 현재도 자생적으로 일곱 개나 되는 전통민속보존회가 우리의 소중한 민속을 보존 발전시키고 있는 전통 민속의 보고로서 서민 문화를 대표하는 삶의 소리, 가공되지 않은 다양한 전통 민속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소포리다.
개인적으로는 몇 번을 다녀간 곳이어서 제법 정이 든 마을이기도 하다. 신축한 전통민속전수관 앞에 차를 세우고 나니 김병철 관장이 우리를 맞았다. 들에서 마악 돌아온 신발에는 흙이 묻어 있고 머리에도 미처 떼지 못한 검불 같은 것이 묻어 있다. 지난 번 태풍으로 곡식은 반으로 줄었는데 그나마 때를 놓칠세라 추수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란다. 평일이어서 공연이 없는 터라 공연을 볼 수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여러차례 그들의 공연을 보았던 터라 기행일까지 참기로 했다. 저녁 후에 울금막걸리로 여독을 풀며 김관장과 얘기를 나누고 나니 자정이 가까웠는데 김관장은 그 야심한 밤에 다시 못다한 일을 하러 간다고 들로 나갔다. 괜시리 미안해지던 순간이었다.
내가 아는 김병철관장은 뼛속까지 진도 사람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한 뒤 진도를 못잊어 고향인 소포리로 돌아와 이장일을 보며 전통민속 계승에 올인한 사람이다. 진도소리를 원하는 곳이면 서울이든, 광주든 천리길도 마다않고 한달음에 달려가는 나쁘게 말하자면 소리에 미친 사람이다. 우리가 보기엔 미친 사람이지만 소리가 삶이고 소리가 밥인 진도 사람들에겐 김관장의 그런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런 모습이기도 하다. 김병철관장 뿐이 아니라 이곳에선 소포리 주민 모두가 소리꾼이요, 춤꾼이요, 주인공이다.
고나헤~
내 정은 청산이요
임의 정은 녹수로구나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쏘냐
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잊어
빙빙 돌아를 가는 고나헤~
길을 가다가 초등학생을 붙잡고 소리를 청해도 육자배기 한자락은 얻어 들을 수 있는 곳이 소포리다. 꼭두새벽부터 논일.밭일 에 지칠만도 하건만 소리를 청하면 누구라 할 것없이 나서서 신명나고 진한 진도가락을 들려준다. 체험전수관에 오면 소포걸군농악.소포북놀이. 소포베틀노래. 소포강강술래. 소포 닻배노래. 소포명다리굿. 소포만가 등 생생한 남도민요의 정수를 들을 수 있다. 힘든 일을 하고 왔다고 믿기 어려울만큼 연세 지긋한 마을 주민들의 신명나고 감동스러운 공연을 회원들과 함께 감상할 생각에 벌써부터 맘이 설렌다.
소포리는 국내 관광객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 명소다. 작고한 박동진 선생이 어느 광고에선가 했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하던 말이 생각난다. 맞다. 소포리에 오면 우리 것이 왜 좋은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소리판을 벗어나면 모두 생업으로 돌아가 밭일,논일에 고기잡이까지 바쁘신 몸들이라 날마다 공연은 하지 못하고 주말에만 공연을 하며 소리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체험은 당일프로그램과 1박2일프로그램이 있다.
천리 먼 길 진도에 와서 낯선 곳에 여장을 풀고 잠 오지 않는 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생각할수록 인연이란 게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도는 커녕 전라도에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내가 어떻게 이곳 사람들을 알고 정이 들었을까?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일찍이 남종화의 화성으로 불리는 소치 허련은 말년에 세상의 인연이 다 꿈만 같다는 생각으로 몽연록(夢緣錄)을 지었다 했는데 나도 마치 꿈 속의 어느 지점을 지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길을 떠나기전 아침 식사를 하면서 지난 밤 이야기 끝에 나왔던 소설가 곽의진 선생에 대해 물었다. 식사 후에 국립남도국악원을 돌아보고 서울로 떠날 참이었는데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관장은 마침 곽의진 선생이 사는 곳이 국악원에서 멀지 않다며 전화를 넣었지만 받지 않는다. 곽선생이 사는 곳이 수신이 잘 안되는 곳이라 했다. 인연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접으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하고 길을 떠났다.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 자리한 남도국립국악원은 '남도 전통문화 예술의 산실(産室)"이다.
국립국악원이 남도의 끝자락 진도에 위치하게 된 배경에는 진도가 품고 있는 전통 예술자원이 풍부한 때문일 것이다. 진도에는 판소리,시나위, 산조와 같이 널리 알려진 음악 외에도 진도 아리랑, 강강술래, 남도들노래,진도 씻김굿 등 많은 전통예술자원들이 전승되고 있으니 어쩌면 국악원이 진도에 자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사방으로 드넓은 다도해를 마주하고 있는 천혜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국립남도국악원은 국악 전문연수.공연, 체험, 연구 등 다양한 국악보급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악원에서 바다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아리랑 마을이 있다. 진도 아리랑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마을이다. 마을 안엔 진도의 명주인 "홍주촌"이 독립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전세제는 웬 고개란가
아리랑 구부구부로 내가 돌아간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높은산 산냉기 바람갤 날 없고
날 낳으신 우리 부모 수심갤 날 없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만주야 봉천은 얼마나 좋으면
꽃같은 각시 두고 만주봉천 가는고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서 놀고
명기명창 화중선이는 장구머리에 논다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홍주 한 잔 걸치고 진도아리랑 불러제끼면 딱이다 싶은 곳, 하지만 아리랑 마을로 들어섰을 때 비가 뿌리기 시작했고 커다란 건물 앞에는 대형크레인이 서 있고 태풍으로 날아간 지붕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태풍이 지나간 흔적은 이곳 뿐만 아니라 섬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홍주촌의 안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관리인이 안전상의 문제로 출입이 안된다고 했다. 처음 홍주촌이 조성되었을 땐 홍주 빚는 장인들이 직접 시연도 하고 홍주도 팔곤 했는데 요즘은 찾는 이가 많지 않다고 했다. 다행히 우리가 기행 올 무렵이면 보수공사도 다 끝날테니 깔끔하게 단장하고 맞을 수 있다 했다.
홍주촌을 등지고 차로 돌아와 혹시나 싶어 다시 곽의진 선생께 전화를 넣었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맑은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곽의진 선생님이시죠?"
전화로 찾아가는 길을 묻고 차를 달렸다. 탑립리 입구에 섰을 때 바위에 새겨진 글 하나가 이곳이 소설가 곽의진 선생이 사는 곳임을 일러준다. '소설가 곽의진 文藝學堂' 우리는 비탈진 길을 몇구비 돌아 잠시 차를 세우고 다시 전화를 걸어 길을 물은 뒤에야 겨우 곽의진 선생의 '자운토방'에 닿을 수 있었다. 바다를 향해 달리다가 두번 째 다리 건너 산쪽으로 난 소로길을 한참을 오른 뒤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사립문 양 옆에 놓인 큼지막한 바위에 오른쪽엔 '藝". 왼편엔 '꿈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선생은 성긴 빗발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먼데서 온 불청객을 맞으러 마당까지 나와 반겨주었다. 선생이 찻물을 끓이는 동안 토방 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많은 책들이 쌓여 있고 책 사이사이에 가족들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물었던 것 같다. 김병철 관장으로부터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얼핏 듣긴 했지만 무지한 탓에 선생의 글 한 줄도 읽지 않고 찾아간 무례함이 무색하게 곽의진 선생은 참으로 많은 이야길 들려주었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털푸덕 앉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선물 받은 책에 쓴 자서를 옮기자면 이렇다.
"진도 갯가에서 태어나 파도 소리 들으며 유아기를 보내고, 목포에서 유달초등학교,중앙여중 다니던 중, 부친 학바우씨 산판사업 울둘목에 수장, 서울 홍제천으로 이사 생계유지하던 때,공부 쫌 잘했던 막내딸에게 은행에 취직 가계 보탬하라고홍제동 언덕에 있던 서울여상 원서 사서 보내시다.여상공부 성에 차지 않아걸핏하면 땡땡이 음습한 미술실에 숨어들어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던 중, 3학년 가을,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아침등굣길에 서울역으로 직행, 수덕사 견성암에서 2개월 살면서 소설 두 편 탈고,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가 탈락! 종로학원 들락거리며 1년 재수, 홍대 건축학과 입학원서 냈지만 탈락! 내 인생 종치는가, 했더니..... 어느 봄날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김동리 선생의 '소설가 등단은 장원급제'라는 격려에 힘입어 장원급제에 걸맞는 소설을 쓰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지금도 나는 가고 있다."
선생이 사인까지 하여 선물해 주신 '섬, 세월이 가면'은 KBS 인간극장<세월이 가면>으로 방송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104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아버지와 함께 산 7년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지만 곽의진 선생의 대표작은 뭐니뭐니해도 소치 허련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가 아닐까 싶다. 문화일보에 2년간이나 연재를 했던 소설이기도 하고 소설가 김훈이 자청하여 작품해설을 쓰겠다 한 바로 그 소설이다. 아직 소설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무어라 덧붙일 말이 없긴하지만 이야기만 들어도 구미가 확 당기는 소설이다. 소설 속엔 화성으로 불리는 소치허련을 비롯하여 그의 스승인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그리고 다산 정약용까지 당대의 거물들이 모두 불려나오는 대작이다.
곽의진 선생에게 염치불구하고 어려운 부탁을 했다. 기행 둘쨋날 운림산방을 방문할 때 동행하여 소치의 소설을 쓰신 작가의 입장에서 소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없겠느냐고... 말은 부탁이었지만 꼭 그렇게 해주실 거란 믿음이 있었다. 다행히 나의 믿음은 빗나가지 않았다. 선생은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그러고보면 길라잡이가 제법 유능한 것도 같고 우리 회원님들이 평소에 덕을 많이 쌓은 덕분인 것도 같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 선생(1808~1893년)이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냈던 화실로 1982년 손자인 남농 허건이 복원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국가지정 명승 제80호로 등재되어 있다. 이곳에는 연못과 정원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초가집과 소치기념관, 진도역사관,남도전통미술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스캔들>이란 영화에서 배용준과 이미숙, 그리고 전도연이 뱃놀이를 하던 장면을 촬영한 연못 속엔 연꽃은 보이지 않고 연잎들만 푸르게 못물을 가리고 이따금씩 잉어가 튀어오르곤 한다. 배를 띄우기엔 작은 연못이나 영화 속에선 제법 근사한 앵글을 보여주었던 곳이다. 못가를 천천히 걸으려니 영화 속의 뱃놀이 장면보다는 해거름에 산책을 나와 연못가를 거닐던 소치 선생의 풍류가 느껴질 법도 했다.
소치 허련으로부터 그의 아들 미산 허형, 그리고 손자 남농 허건 등 운림산방의 화액은 곧 남종화의 화맥이라 할만하다. 이제 운림산방을 끝으로 진도를 떠나야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도의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예전에 보지 못햇던 또다른 보배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떠나려니 곽의진 선생의 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에서 추사가 해남으로 떠나는 초의와 헤어짐을 아쉬워 하며 읊은 이별시가 떠오른다.
만나자 이별이니 이런 슬픔 또 있을까
헤어지기 어려워 발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내가 그대의 시를 매일 읊을 것이니
그대의 시를 좀벌레가 슬지는 않을 것이네
덧없이 늙어가는 이 한 몸
소매에 스며드는 가을빛 기운 쓸쓸한데
그대 뱃길을 마름풀이 붙잡을 것이네
해남현으로 그대가 떠난 후
나는 국화 피고 지는 것 보며 이 외로움 달래리라
그렇다고 헤어짐이 아쉽다고 가던 걸음 멈출 수는 없는 법.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의 약속이라 여기고 표표히 떠날 일이다.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운림산방을 돌아나오는데 뒤늦게 핀 해당화가 가을볕을 쬐며 화사하게 웃고 있다. 맞다. 항상 꽃마음으로 살면 우린 인생도 꽃 같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시가 있어 결구 삼아 적어본다.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 문 정 희 -
|
첫댓글 홍주가 진도술이군요
청조님 진도여행 잘 했습니다
진도 육자배기는 끝내주어요
진도아리랑도 너무 걸죽하지요 ㅎ ㅎ
내가 진도 해수욕장에 피서를 다녀온지가 벌써 25년이 넘은듯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오늘도 활기차고 행복한 시간 이어 가시길 바랍니다.
올만에
남쪽 하늘을 처다 봅니다
춥냐~아 덥냐 아 내 품안으로 들어라~
베개가 높고 낮거던 내 폴(팔)을 비어라~~~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나앗네~에에~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아 나앗네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