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돈규 기자의 책시렁]
'책들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 2015.08.28 (금)
물고기는 고체 상태의 물이다.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다.
책들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
파스칼 키냐르가 지은 에세이 ‘옛날에 대하여’(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48쪽에 나오는 세 문장이다. 키냐르는 18개월간 죽음에 가까운 병마와 싸우면서 저술한 ‘떠도는 그림자들’로 2002년 공쿠르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다. 대표작으로 ‘은밀한 생’ ‘세상의 모든 아침’ ‘음악 혐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등이 있다.
키냐르는 옛날에 대한 담론을 무늬만 다르게 되풀이해 이야기해온 작가다. 주제가 음악(‘세상의 모든 아침’)이든 회화(‘로마의 테라스’)이든 언어(‘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든 결국 옛날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는 ‘옛날에 대하여’에서 몽테뉴의 ‘수상록’ 중 한 줄을 인용한다.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은 무엇이든 참이다. 누군가에 의해 알려진 것이라면 보잘것없는 것이다.”
키냐르는 ‘옛날’과 ‘과거’를 구분한다. 옮긴이가 말한 바로는 그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방향성을 지닌 시간개념이 사회가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고안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키냐르에게 시간이란 방향성 없이 양끝만 있다. 흐르지 않고 봄-여름-가을-겨울처럼 제자리에서 돌면서 수직으로 쌓여간다.
그는 옛날과 과거를 용암의 상태에 빗댄다. 땅속 깊은 곳에서는 지금도 액체 상태의 용암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 용암이 화산 분출로 밖으로 흘러나오면 고체로 굳어진다. 용암이 액체 상태인 시기가 ‘옛날’이고 암석으로 굳어진 시기가 ‘과거’다. 옮긴이는 “즉 옛날은 과거 전체보다 더 거대한 우물”이라고 설명했다.
▲ (클릭요^^)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쓴 '옛날에 대하여'
‘물고기는 고체 상태의 물’이고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라는 것은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 ‘책들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라는 문장이 가장 기묘하다. 다른 작가들의 외로운 글쓰기에 대해 읽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여기에 옮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빈 종이에 천천히 단어를 더하면서 며칠, 몇 달, 몇 해 동안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돌을 쌓는 것이다.”(오르한 파무크) “외로운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책방이다. 저자들이 들려줄 누군가를 찾지 못해 쓰여진 책들이 어마어마 쌓여 있으니.”(알랭 드 보통)
키냐르는 독서, 글쓰기, 음악, 회화 등으로 옛날을 섬광처럼 솟구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독서를 꼽는다. “독서는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이므로, 의지가 개입되는 글쓰기에 비해 보다 수동적일 뿐 아니라 음악을 듣는 것보다 더 기묘한 최면 상태, 즉 몰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키냐르는 ‘옛날에 대하여’에서 일본 나고야 지방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늙은이가 밥이나 축내는 존재로 여겨져 산에 버려지던 시절 이야기다. 1640년 나고야에서 환갑을 맞은 아버지의 오두막에 아들이 나타나 인사를 올리고 등을 내밀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업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비탈을 오르는 동안 아버지는 생각했다. “내 아들이 돌아가다 길을 잃을까 걱정이로구나.” 그래서 죽은 나뭇가지들을 꺾어서 지나는 길에 뿌리기로 했다.
아들이 산속의 작은 빈터에 당도하자 평평한 바위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일종의 대피소로 쓸 만했다. 그래서 아들은 바위 아래 나뭇잎 더미를 깔아 아버지가 몸을 눕힐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려 말했다. “아버님,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답했다. “아들아, 네가 돌아가다가 혹시 길을 잃을까 걱정이 돼서 내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뿌려놓았단다.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될 거야.”
그러자 아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은 아버지를 도로 등에 업고 어둠 속에서 용의주도하게 마을로 내려왔다. 야음을 틈타 창을 집어 들고 자신의 오두막 뒤에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그 속에 아버지를 집어넣고 나서 가시덤불을 그 위에 덮었다. 고을의 어느 누구도 그가 늙은 아비를 돌보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 이 고을의 원님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는데 늙은 아비의 지혜로 아들은 죽을 위기를 세 번이나 모면한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원님이 베어낸 떡갈나무의 몸통을 보여주곤 “이 나무의 뿌리가 어느 쪽인지 내일 아침까지 고하라. 풀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라고 말했다.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가시덤불 속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수수께끼를 듣자마자 “그것은 식물과 세상의 원천에 대한 비밀, 즉 물을 말하는 거란다”라며 풀 방도를 일러주었다. 이튿날 아들은 원님 앞으로 갔다. 커다란 냄비 안에 물을 붓고 그 안에 나무 몸통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가라앉는 쪽을 말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원님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박돈규
문화부 기자
E-mail : coeur@chosun.com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했다. &..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했다.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2006년 공연프로듀서협회가 주는 올해의 기자상을 받았다. (이듬해 그 상이 폐지됐다) 2008~2010년 한국뮤지컬대상 심사위원을 지냈다. ('가슴을 쿵 울리는 드라마'에 가점을 준 것을 고백합니다) 현재 출판 담당 기자.
(책에 대한 궁금증 무한 흡입 중) 뮤지컬 스무 편에 대한 에세이 '뮤지컬 블라블라블라'를 냈다. (오랜만에 나온 양서인데 재고가 상당량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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