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분명 다른 댓글에서 고대 전투에서는 진형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형이 무너지면 아무리 훈련이 잘되고 대군이라 할지라도 전멸되기 십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님은 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 꼭 수공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객관적으로, 아무 주관 없이 사서(특히 삼국사기)를 봤을 때 '수공(水攻)'이라는 단어는 도무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가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공격했다고 나오지요.
지금 정성일 님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전제 하에, 즉, 살수대첩은 수공이었다의 전제 하에 사서를 바라보고, 분명 없는 내용임에도 있는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계신 겁니다.
일차적으로 가설을 세워놓고 사료의 내용을 그 가설에 맞게 끼워맞추는 것은 진정한 역사 연구 방법이 아닙니다.
둘째,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장안성이 발해의 상경성이었는지?
이 문제에서도 님은 님의 생각이 옳다는 전제 하에 논지를 전개하였습니다. 일단 님 머릿속에는 '장안성=상경성'이라는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뭘 보든 다 그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장안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주장은 당시 고구려가 처했던 상황을 보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즉 분열되었던 중국 세계가 통일이 되고 고구려에 위협이 끼쳐졌던 상황에서 기존에 평화시에는 특별한 나성이 없는 곳에서 살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산성으로 도피하던 체계가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전시에 산성으로 도주하게 되면 백성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고 평지 궁궐 등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국가적 손실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민가와 귀족가, 왕궁을 둘러싼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거대한 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도 지금 남아 있는 평양성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고구려 성이고 더구나 성돌에 당시 성을 쌓을 때 책임자(고구려 관등)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확실히 고구려의 성으로, 그리고 장안성으로 추론하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평양은 당시 교통의 중심지요, 곡창 지대였기 때문에 수도로서의 가치가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상경을 보십시오. 평양보다 매우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교통도 평양보다는 훨씬 불편하고 농경지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날씨가 춥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부족함이 많습니다(발해 시대에 상경이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지구의 기온이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에는 아닙니다. 상경은 고구려 시대에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정성일 님, 제발 님의 견해에 맞추어 역사적 사실들을 꿰어 맞추려 하지 마시고 객관적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아무리 진형이 중요해도 사람의 목숨을 거두려면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야 죽일 수 있지요. 화살을 쏘던, 창으로 찌르던, 칼로 베던 간에 살수에서 압록까지 450리를 쫓아가며 베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수나라 병사가 병장기를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날 경우에 말입니다. 그리고 최소 자기 보호용 무기 정도는 착용하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구려병사가 부딪쳐 왔다면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전투가 있겠지요. 그리고 도망가는 적은 쫓지 않는다는 병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패주하는 적을 쫓다가 오히려 낭패를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뜻입니다.
싱클레어님은 발해의 상경성이 벽지라고 말씀하시는데, 혹시 일제가 작성한 만주국 지도를 보았다면 그런 말씀을 하지 못하지요. 일제때에도 그곳에는 철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곡창지대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잘못 알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흥개호 지역도 곡창지대이고, 그 쪽으로 넓은 평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히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나라때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다시 한번 확인을 해 보지요.
정성일님// 싱클레어님은 '기후변동' 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기후변동이라는 것은 의외로 커서, 해안선이 변동하고 빙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작물의 북한계선이 훌쩍 오르내리곤 하게 됩니다. 예컨대 한국의 청동기 유적은 오늘날의 '해안' 에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대개가 오늘날 기준으로는 구릉지나 심지어는 산속에 있기도 합니다. 이유는 그 무렵이 꽤 더웠기 때문에 오늘날 해안지의 상당부분은 당시 바닷물 속에 잠겨 있거나 혹은 잦은 범람 등으로 늪지화되어 벌레나 병이 많고아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략 남북국시대의 기후가 꽤 온난해졌다는 것은 여러 증거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예 하나는, 감은사 유적입니다. 감은사 건물지의 기단부에는 건물 밑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인데, 그 기단부의 위치가 현재의 해수면보다 적어도 1미터는 높다는 것입니다. 이 절터에는 당시의 선착장 유적도 남아 있는데, 수면보다 높은 건 마찬가지지요. 이는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기후가 온난해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수면이 높아진 시기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 외에도 발해 특산물에 '노주의 벼' 가 있다는 점도 온난한 기후의 소산일 가능성이 큽니다. (노주는 두만강 이북 지역임)
기후가 온난해지면, 토지의 단위 생산량이 늘어날 뿐 아니라 작물의 북한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즉, 발해 시기에 온난화가 나타났다면, 그것이 만주지역의 농지개간을 더욱 촉발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시 추워진) 조선 초중기 기록만 봐도 조선 조정에서는 두만강 이북은 너무 춥고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무력으로 얻어도 별 가치가 없는 땅으로 인식했고, 여진족의 농사라는 것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동아시아가 급격히 온난해지면서 만주 지역이 '곡창' 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 게 오늘날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첫댓글 아무리 진형이 중요해도 사람의 목숨을 거두려면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야 죽일 수 있지요. 화살을 쏘던, 창으로 찌르던, 칼로 베던 간에 살수에서 압록까지 450리를 쫓아가며 베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수나라 병사가 병장기를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날 경우에 말입니다. 그리고 최소 자기 보호용 무기 정도는 착용하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구려병사가 부딪쳐 왔다면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전투가 있겠지요. 그리고 도망가는 적은 쫓지 않는다는 병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패주하는 적을 쫓다가 오히려 낭패를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뜻입니다.
싱클레어님은 발해의 상경성이 벽지라고 말씀하시는데, 혹시 일제가 작성한 만주국 지도를 보았다면 그런 말씀을 하지 못하지요. 일제때에도 그곳에는 철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곡창지대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잘못 알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흥개호 지역도 곡창지대이고, 그 쪽으로 넓은 평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히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나라때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다시 한번 확인을 해 보지요.
정성일님// 싱클레어님은 '기후변동' 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기후변동이라는 것은 의외로 커서, 해안선이 변동하고 빙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작물의 북한계선이 훌쩍 오르내리곤 하게 됩니다. 예컨대 한국의 청동기 유적은 오늘날의 '해안' 에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대개가 오늘날 기준으로는 구릉지나 심지어는 산속에 있기도 합니다. 이유는 그 무렵이 꽤 더웠기 때문에 오늘날 해안지의 상당부분은 당시 바닷물 속에 잠겨 있거나 혹은 잦은 범람 등으로 늪지화되어 벌레나 병이 많고아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략 남북국시대의 기후가 꽤 온난해졌다는 것은 여러 증거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예 하나는, 감은사 유적입니다. 감은사 건물지의 기단부에는 건물 밑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인데, 그 기단부의 위치가 현재의 해수면보다 적어도 1미터는 높다는 것입니다. 이 절터에는 당시의 선착장 유적도 남아 있는데, 수면보다 높은 건 마찬가지지요. 이는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기후가 온난해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수면이 높아진 시기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 외에도 발해 특산물에 '노주의 벼' 가 있다는 점도 온난한 기후의 소산일 가능성이 큽니다. (노주는 두만강 이북 지역임)
기후가 온난해지면, 토지의 단위 생산량이 늘어날 뿐 아니라 작물의 북한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즉, 발해 시기에 온난화가 나타났다면, 그것이 만주지역의 농지개간을 더욱 촉발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시 추워진) 조선 초중기 기록만 봐도 조선 조정에서는 두만강 이북은 너무 춥고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무력으로 얻어도 별 가치가 없는 땅으로 인식했고, 여진족의 농사라는 것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동아시아가 급격히 온난해지면서 만주 지역이 '곡창' 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 게 오늘날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어느 싸이트에선가도 경박호를 여행하던 여행자가 끊임없는 곡창지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와서 찾으려니 찾을수가 없어 대신 다른 거라도 붙입니다. http://blog.naver.com/alps220?Redirect=Log&logNo=9002064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