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시인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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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시인 팬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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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시인 이메일)
가끔은 비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다
햇볕은 싫습니다.
그대가 오는 길목을 오래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에 젖을수록 오히려 생기 넘치는 은사시나무
그 은사시나무의 푸르름으로 그대의 가슴에
한 점 나뭇잎으로 찍혀 있고 싶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대
비 오는 날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오실 땐
햇볕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요.
그대의 젖은 어깨, 그대의 지친 마음을
기대게 해주는 은사시나무. 비 오는 간이역
그리고 젖은 기적소리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는 싫습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려
차창 너머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비에 젖으며 난 가끔은 비 오는 간이역에서
그대처럼 더디게 오는 완행열차
그 열차를 기다리는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별
너에게 가지 못하고
나는 서성인다.
내 목소리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름이여,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다만 보고 싶어진다고만 말하는 그대여,
그대는 정녕 한 발짝도
내게 내려오지 않긴가요.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기다리는 이유
만남을 전제로 했을 때
기다림은 기다림이다.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았을 때
기다림은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엔,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는,
그리하여 밤마다 심장의 피로 불을 켜
어둔 길을 밝혀두는 사람이 있다.
사랑으로 인해
가슴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오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바깥에 나가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그 순간만으로 그는
아아 살아 있구나 절감한다는 것을.
쓰라림뿐일지라도 오직 그 순간만이
가장 삶다운 삶일 수 있다는 것을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사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 사랑을 하는 것은 더 더욱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어려운 길을 가다 보면
그대로 주저 앉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땐 장애물들을 주의 깊게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혹시 그 장애물은 자기 스스로가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사랑이라는 노정에
타인이 만들어 놓은 장애물은 극히 드뭅니다..
그 대부분이,자신이 상처받기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 금을 그어 놓은 자기 변명일테니까요..
한 사람을 사랑했네 1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한사람을 사랑했네 2
한번 떠난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강물이 흐르고 있지만 내 발목을 적시던
그때의 물이 아니듯, 바람이 줄곧 불고 있지만
내 옷깃을 그치던 그때의 바람이 아니듯
한번 떠난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네가 내 앞에 서 있지만
그때의 너는 이미 아니다.
내 가슴을 적시던 너는 없다.
네가 보는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때의 너와 난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한번 떠난 것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아, 내가 사랑했던 모든것,
그 부질 없음이여.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문득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불도 켜지 않은 구석진 방에서
혼자 상심을 삭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런 날 함께 있고 싶은 그대였지만
그대를 지우다 지우다 끝내 고개 떨구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데도
하루종일 그대 생각에 잠겨
단 한 발짝도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봉함 엽서
잘 지내리라 믿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에 없는 건 당신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있는데 다만 당신만이 내 곁에 없습니다.
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창가에 앉아
칼국수나 먹었으면 좋겠다, 라고 한 그대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나요, 당신만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고이는 내 헤픈 마음을.
오후 늦게부터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만
궂은 우리 사랑엔 언제나 먹구름이 걷혀질까요.
길을 걷다 무심히 쳐다본 하늘엔
노을이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까닭 모르게
한숨이 났습니다. 보고 싶다, 라는 말도
저처럼 핏빛 붉은 빛이겠지요.
탈래도 더 탈 것 없는 가슴.
쓸래도 더 쓸 수 없는 내 마음의 여백은
당신이 알아서 헤아려주십시오.
안녕이란 말조차 나는 가슴저려 못하겠습니다.
사랑했던 날보다
그대 아는가,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대와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아픔은 내 인생 전체를 덮었다.
바람은 잠깐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 때문에 잎새는 내내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 이별을 두려워했더라면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별을 예감했기에 더욱 그대에게
열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처입지 않으면 아물 수 없듯
아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네.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여 진정 하는가.
비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1
기차는 오지 않았고
나는 대합실에서 서성거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비옷을 이은 역수만이 고단한 하루를 짊어지고
플랫폼 희미한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조급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어서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이 오르기를 바랐다.
산다는 것은 때로 까닭 모를 슬픔을
부여안고 떠나가는 밤열차 같은 것.
안 갈 수도, 중도에 내릴 수도,
다시는 되돌아올 수도 없는 길.
쓸쓸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언제나 연착했고, 하나뿐인 차표를
환불할 수도 없었으므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버릇처럼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그와 닮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끝내 배웅도 하지 않으려는가,
나직이 한숨을 몰아쉬며 나는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외려
그런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나더군요.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합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하다못해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것은 이런 뜻은 아닐런지요.
언젠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모조리 쏟아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섭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는
그것들을 돌려 줄 대상이 없다는 것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들려 주어야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가을이 오면,
그리하여 내 마음에 쓸쓸한 낙엽이 쌓이면
나는 나의 이름으로 그대를 호명합니다
부르다 부르다 끝내 눈물 떨구고야 말 그대 이름
내 눈물 속에 더욱 빛나는 '그대' 하는 이름 하나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내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네
내 가진 것은 빈손뿐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대 하나 가진 것만 못한데
내 슬픈 사랑아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해지는
이 그리움밖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잎보다 먼저 꽃이 만발하는 목련처럼
사랑보다 먼저 아픔을 알게 했던,
현실이 갈라놓은 선 이쪽 저쪽에서
들킬세라 서둘러 자리를 비켜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지만
애당초 가까이 가지도 못했기에 잡을 수도 없었던,
외려 한 걸음 더 떨어져서 지켜보아야 했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무슨 일을 하든간에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
눈을 감을수록 더욱 선명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기어이 접어두고
가슴 저리게 환히 웃던, 잊을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니었던,
너무도 긴 그림자에 쓸쓸히 무너지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겠지만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추억하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마지막이란 말을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르다 부르다 끝내 눈물 떨구고야 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아름다운 추락
저 나뭇잎 떨어지고야 말리라.
기어이 떨어지고야 말리라.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는 저 나뭇잎은
슬프지 않네. 남아 있는 이를 위해
미련 없이 자신의 한 몸 떨구는,
떨어지는 순간에도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저 나뭇잎의 아름다운 추락을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만 매달려온
내가 부끄러웠다.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려온 나의 집착
억지만 부려 그대 마음 아프게 한
내가 부끄러웠다.
바람 속을 걷는 법 1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바람 속을 걷는 법 2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지.
바람 속을 걷는 법 3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허구 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 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 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 번 안 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바람 속을 걷는 법 4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집 밖을 나섰습니다.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걷기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서 걷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싫었던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잊었다 생각했다가도 밤이면 속절없이 돋아나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천 근의 무게로 압박해오는
그대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당신을
가두고 풀어주는 내 마음감옥을 하시는지요.
잠시 스쳐간 그대로 인해 나는 얼마나 더
흔들려야 하는지, 추억이라 이름붙인 것들은
그것이 다시는 올 수 없는 까닭이겠지만
밤길을 걸으며 나는 일부러 그것들을
차례차례 재현해봅니다. 그렇듯 삶이란 것은,
내가 그리워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하나 맞이했다가 떠나보내는 세월 같은 것.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만 남아
떠난 사람의 마지막 눈빛을 언제까지나 떠올리다
쓸쓸히 돌아서는 발자국 같은 것.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슬픔 안의 기쁨
떠났으므로 당신이
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보내야 했으므로 슬픔이 오기 전
기쁨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네.
훗날, 나는 다시 깨닫기를 바라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못내 가슴 아팠을지라도
내가 간직한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삶은 아름다웠고
또 충분히 행복했노라고........
이쯤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
그대에게 가는 길이 멀고 멀어
늘 내 발은 부르터 있기 일쑤였네.
한시라도 내 눈과 귀가
그대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적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람.
생각지 않으려 애쓰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그 흔한 약속 하나 없이 우린 헤어졌지만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슬픔으로 저무는 사람.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찬이슬에 젖은 잎새가 더욱 붉듯
우리 사랑도 그처럼 오랜 고난 후에
마알갛게 우러나오는 고운 빛깔이려니,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없을까
어디 아늑한 추억들이 안개 깔리듯
조용히 깔리고 말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사는 곳은 없을까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해서 사는
그리하여 괴로운 깨어남이 없는
영원한 숙취의 세계는 없을까
녹슬고 곪고 상처받은 가슴들을
서로 따스하게 다독여주는
그런 사랑의 세계는 없을까
겨울 저편
빛나는 햇살 한 올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비로소 사랑의 칼날에 아름답게 살해되는
그런 안녕의 세계는 없을까
없을까
없을까
드러낼 수 없는 사랑
비록 그 사랑이 아픈 사랑일지라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사랑, 그래서 혼자의 가슴속에만
묻어 두어야 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에 비해서.
밝힐 수 없는 사랑.
결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사랑,
그러나 그 사람에겐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가슴이 잿더미가 되는 줄 모르고.
사랑이라는 이름보다도 늘 아픔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던 그대.
살다보면 가끔 잊을 날이 있겠지요.
그렇게 아픔에 익숙해지다 보면
아픔도 아픔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겠지요.
사랑도 사랑 아닌 것처럼 담담히 맞을 때도 있겠지요.
사랑이란 이름보다는 아픔이란 이름으로 그대를 추억하다가.
무덤덤하게 그대 이름을 불러 볼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올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제쯤 그대 이름을 젖지 않은 목소리로 불러 볼 수 있을지,
사랑은 왜 그토록 순식간이며
추억은 또 왜 이토록 오래도록 아픔인 것인지...
눈이 멀었다
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줄
까맣게 몰랐다.
비오는 날의 일기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
난 창문을 열고 하루종일 밖을 내다보았다.
비오는 이런 날이면 내 마음은
어느 후미진 다방의 후미진 낡은 구석 의자를 닮네.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네.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
당신을 만난 날이 비오는 날이었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었으니
안녕, 그대여.
비오는 이런 날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진다.
그럴수록 난 그대가 그리웁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다.
그를 만났습니다
그를 만났습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반갑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방금 만나고 돌아오더라도
며칠을 못 본 것 같이 허전한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아프고 괴로울 때면
가만히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여 주는
그를 만났습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디 먼 곳에 가더라도
한 통의 엽서를 보내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그를 만났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그대
그대라는 두 글자엔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그대라고 부르기만 해도
금새 내 눈이 젖어오는 건
아마도 우리 사랑이
기쁨이 아닌 슬픔인 탓이겠지요
지금 내 곁에 없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리운 그대여
이렇게 깊은 밤이면
더욱더 보고 싶어지는 그대여
그대는 아십니까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내내 당신에게
흘러가고 있는 강이 되었다는 것을
쉬임 없이 당신을 향해서 흐르고 있는
사랑의 강이 되었다는 것을
그 강의 끝간 데에 아마 노을은 지리라
새가 날고 바람은 불리라
오늘밤 쯤
그대의 강가에 닿을 수 있을는지
막상 달려가 보면 망망대해인 그대
어디에도 없는 그대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를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도 못 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삶의 향기
당신의 삶이
단조롭고 건조한 이유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아주 가슴아픈 일로 인해
가슴이 시려오는 때도 있으며
주변의 따뜻한 인정으로 인해
가슴이 훈훈해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게 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기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절망스럽기도 하며
살아 있기 때문에 햇살이 비치는
나뭇잎의 섬세한 잎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삶이 단조롭고 건조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내가 살아 있음을 느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는 얼마나 살 만한 것인지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그립다는 것은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당신을 보내고 난 후에야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당신을 보내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난 자리에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낙엽 지고, 어둠이 내려 앉았지만 해는 떠 오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며칠 못 보아도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를 떠나간 당신을 나는 끝내 떠날수 없었음을.
당신은 나를 버릴수 있었지만 나는 끝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을.
내 안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 이제는 나 조차도 꺼내기 힘든 당신,
아아 하필이면 나는 당신을 보내고 나서야 알수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단 하루도 당신 없이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작은 기도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게 하소서.
그리움으로 가슴 아프다면
그 아픔마저 행복하다 생각하게 하소서.
그리워할 누가 없는 사람은
아플 가슴마저도 없나니
아파도 나만 아파하게 하소서.
둘이 느끼는 것보다 몇 배 더하더라도
부디 나 한 사람만 아파하게 하소서.
간구하노니
이별하고 아파하는 이 모든 것
그냥 한번 해보는 연습이게 하소서.
다시 만나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다시는 헤어져 있지 앟게 하기 위한
그런 연습이게 하소서
이정하
1962년 대구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9년 경남신문,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네이버 검색>
[작품집]
시 집
『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이 되어 눈물만 글썽이게 하는가 - 1991 』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 1994 』
『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1997 』
『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 1999 』
『 한 사람을 사랑했네 - 2000 』
『 어쩌면 그리 더디 오십니까 - 2001 』
『 혼자 사랑한다는 것은 - 2002 』
산 문 집
『 우리 사는 동안에 - 1992 』
『 소망은 내 지친 등을 떠미네 - 1993 』
『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 1996 』
『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 1997 』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1 - 1998 』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2 - 1999 』
『 아직도 기다림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 1999 』
『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