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huddaka Nikāya, udānapāḷi, 1. bodhivaggo n, 1. paṭhamabodhisuttaṃ (KN 3.1)
제1 품 깨달음 품 Bodhi-vagga(Ud1:1~10) 깨달음 경1(Ud1:1)54) Bodhi-sutta
54) 우러나온 말씀[自說, udāna]을 포함한 본경은
율장『마하왁가』(대품) 제1편 대 편(Mahākhandhaka)의 첫 번째 설명인
깨달음에 대한 설명(Bodhikathā)의 첫 번째 부문(pathamavāra, Vin.i.2)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즉 율장 『마하왁가』도 본경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 1. Evaṃ me sutaṃ —
1. 이와 같이 [1] 나는 들었다.
Ekaṃ samayaṃ bhagavā Uruvelāyaṃ viharati najjā Nerañjarāya
Tīre bodhirukkhamūle paṭhamābhisambuddho.
한때 세존께서는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55)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의 언덕에 있는 깨달음의 나무[菩提樹] 아래에서 머무셨다.56)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sattāhaṃ ekapallaṅkena nisinno hoti vimuttisukhapaṭisaṃvedī .
그때 세존께서는 해탈의 행복을 누리시면서57) 칠 일 동안 단 한 번의 가부좌로 앉아 계셨다.58)
55)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는 paṭhamābhisambuddho를
주석서를 참조하여 풀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처음으로 완전히 깨달은 분이 되시고 나서(paṭhamaṃ abhisambuddho hutvā)라는 말이며
모든 것의 처음이라는 뜻이다(sabbapaṭhamaṃyevāti attho).”(UdA.27)라고 설명한다.
56)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의 언덕에 있는 깨달음의 나무(菩提樹] 아래에서 머무셨다.'는
uruvelāyaṃ viharati najjā nerañjarāya tīre bodhirukkhamūle paṭhamābhisambuddho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우루웰라(uruvelā)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역의 이름이고
그곳을 흐르는 강이 네란자라 강(nadi nerañjarā)이며
그곳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rukkhamūle)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증득하셨다.
여기서 깨달음은 네 가지 도에 대한 지혜이며(bodhi vuccati catūsu maggesu ñāṇaṃ)
그래서 그 나무를 이렇게 깨달음의 나무(Bodhi rukkha), 즉 보리수라고 부르고 있다.(VinA.v.952)
『우다나』의 첫 구절인 본경의 이 구문은 본경을 포함한
『우다나』의 6개 경들(Ud1:1; 2; 3; 4; 11; 30)의 첫 구절로 나타나며
4부 니까야 가운데 D16 §3.34; D21 §1.6; S4:1~3 §1; S4:24 §1; S6:1~2 §1; S47:18 §1;
S47:43 §3; S48:57 §1; A4:21 ~ 22 §1의 13개의 경들과
율장 『마하왁가』(대품)의 맨 첫 구절(Vin.i.1)로도 나타나고 있다.
57) '해탈의 행복을 누리시면서'는 vimuttisukha-paṭisaṃvedī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 해탈의 행복을 과의 증득의 행복(phalasamāpatti-sukha)으로 설명한다.(UdA.32)
계속해서 주석서는 해탈을 다섯 가지 해탈(pañca vimuttiyo), 즉
① 억압에 의한 해탈(vikkhambhana-vimutti)
②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함에 의한(paccanīkavasena pariccattāhi tadaṅga-vimutti, SA.iii.209) 해탈
③ 근절에 의한 해탈(samuccheda-vimutti)
④ 편안함에 의한 해탈(paṭippassaddhi-vimutti)
⑤ 벗어남에 의한 해탈(nissaraṇa-vimuttīti)로 나열하고 이 다섯 가지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⑤ 벗어남에 의한 해탈이란 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sabbasaṅkhata-nissaṭattā)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로부터 해탈한(sabbasaṅkhāra-vimutta) 열반(nibbāna)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주석서는 이러한 열반을 대상으로 가지는 것(nibbānārammaṇā)이
바로 이 과의 증득(phalasamāpatti)이라고 마무리한다.(UdA.33)
다섯 가지 해탈에 대해서는 『맛지마 니까야』제4권
「경이롭고 놀라운 일 경」(M123) §2의 해당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58) “단 한 번의 가부좌로(ekapallaṅkena)'라고 하였다.
위사카 달의 보름에(visākhāpuṇṇamāya) 아직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을 때(anatthaṅgateyeva sūriye)
패하지 않는 으뜸가는 자리인(aparājitapallaṅkavare)
금강의 제단[金剛壇, vajirāsane]에 앉으신 때로부터 시작하여(nisinnakālato paṭṭhāya)
단 한 번도 일어서시지 않고(sakimpi anuṭṭhahitvā) 가부좌를 트신 그대로(yathā ābhujitena)
단 한 번의 가부좌로(ekeneva pallaṅkena)라는 뜻이다.” (UdA.31; VinAT.iii.132)
Atha kho bhagavā tassa sattāhassa accay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ahitvā
rattiyā paṭhamaṃ yāmaṃ
paṭiccasamuppādaṃ anulomaṃ sādhukaṃ manasākāsi —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칠 일이 지난 뒤 그 삼매로부터 출정하셔서 밤의 초저녁[初夜]에59)
연기를 발생하는 구조로[流轉門]60) 이처럼61) 잘 마음에 잡도리하셨다.62)
59) '밤의 초저녘[初夜]에는 rattiyā paṭhamaṃ yāmaṃ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깨달음 경」2(Ud1:2) §1의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60) “'발생하는 구조로[流轉門, anulomaṃ]'라고 하셨다.
이것은 ‘무명을 조건으로 [업]형성들[行]이'라는 등의 방법으로 설하신
무명 등으로 시작하는 [12연기의] 조건의 형태가 (avijjādiko paccayākāro)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attanā kattabbakiccakaraṇato)
발생하는 구조라고(anulomoti) 말씀하신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시작해서 끝에 도달하도록 하면서 설해졌기 때문에
(ādito paṭṭhāya antaṃ pāpetvā vuttattā)
혹은 전개됨에 의해서 발생하는 구조로 되기 때문에(pavattiyā vā anulomato)
발생하는 구조인데(anulomo) 그런 ‘발생하는 구조로(anulomaṃ)'라는 뜻이다.”(UdA.37~38)
61) 여기서 ‘이처럼'은 iti를 옮긴 것이다.
이 용어는 PTS본에는 "yāmaṃ paṭiccasamuppādaṃ anulomaṃ sādhukaṃ manasākāsi iti :
imasmiṃ sati …”로 편집되어 나타나고
VRI본에는 “yāmaṃ paṭiccasamuppādaṃ anulomaṃ sādhukaṃ manasākāsi —
iti imasmiṃ sati …"로 편집되어 나타난다. 역자는 전자로 읽어서 옮겼다.
그런데 주석서는 iti를 'imasmiṃ sati …'와 함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UdA.38)
VRI본의 편집이 주석서의 입장과는 더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62)부처님의 성도 과정과 성도 후의 일화를 담고 있는
『맛지마 니까야』「성스러운 구함 경」(M26)에 해당하는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MA.ii.181 ~ 186)에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7X7=49일 동안에 하셨던 일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흥흥거림 경」(Udl:4) §1의 해당 주해를 참조할 것.
♦ “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yadidaṃ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ī”ti.
2.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
즉 무명을 조건으로 [업]형성들[行]이, [업]형성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識]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名色)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슬픔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老死優悲苦惱]이 발생한다.63)
이와 같이 이러한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64) 라고.65)
63) 여기「깨달음 경」1/2/3(Ud1:1~3)에 나타나는 무명 등의
12연기의 구성 요소들에 대한 설명은 『초기불교 이해』 299쪽 이하의
<(5) 12가지 연기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정의>를 참조하고
『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의 <I. 연기의 방법 - §3. 기본 정형구>(제2권 179쪽 이하)의
해설도 참조하기 바란다.
64) “'이와 같이(evaṃ)'라는 단어는 설명되는 것(niddiṭṭha)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명 등의 원인(kāraṇa) 때문에 있는 것이지
자재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na issaranimmānādīhīti dasseti),
'이러한(etassa)'이라는 것은 이미 말한 것의(yathāvuttassa)라는 뜻이다.
'전체(kevalassa)'라는 것은 섞이지 않은 혹은 모두의(asammissassa sakalassa vā)란 뜻이다.
'괴로움의 무더기[苦蘊, dukkhakkhandhassa]'란 괴로움의 덩어리(dukkhasamūha)라는 뜻이고
중생(satta)이 아니고 영혼(壽者, jīva]도 아니고
아름다움이나 즐거움 등(subhasukhādi)도 아니라는 뜻이다.
‘발생한다.(samudayo hoti)'란 생성이 있게 된다(nibbatti sambhavati)라는 뜻이다.” (UdA.44)
비슷한 설명이 『청정도론』제17장(XVII) §50에도 나타난다.
65)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
즉 무명을 조건으로 [업]형성들[行]이 …
이와 같이 이러한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라고‘는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yadidaṃ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와
다음 경의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Ud1:2 §2)와 함께 연결되어서
연기의 추상화된 정형구로 나타나고 있다.
본서에서처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와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가
12연기의 유전문의 정형구(Ud1:1 §2)와 환멸문의 정형구(Ud1:2 §2)에 분리되어서 나타나는 경우는
『맛지마 니까야』제2권「갈애 멸진의 긴 경」(M38)에서 §19와 §22로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과
『빠띠삼비다 막가』(무애해도, Ps.i.114)에서 발생구조만이 언급되는 것 외에는
니까야의 경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연기의 추상화된 정형구와 12연기의 유전문, 환멸문, 순관, 역관 등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해, 230~231를 참조할 것,
그리고 이 연기의 디 상화된 정형구에 대한 담마빨라 스님의 심오하면서도 긴 주석은
『우다나 주석서』(UdA.38~42)에 들어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Masefield가 번역한
『The Udana Commentary I』의 66~72쪽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 Atha kho bhagavā etamatthaṃ viditvā tāyaṃ velāyaṃ imaṃ udānaṃ udānesi —
3. 그때 세존께서는 이 의미66)를 아시고 그 즉시 바로 이 우러나온 말씀을 읊으셨다.67)
66) 여기서 '의미'로 옮긴 용어는 attha이다.
범어 일반에서 attha(Sk. artha)는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초기불교에서는 주로 ① '이로운 것, 이익' ② '뜻, 의미
③ '이치, 목적, 주제, 본질'이라는 세 가지 뜻을 나타낸다.
냐나몰리 스님은 이 셋을 각각 ① beneft, good ② meaning
③ purpose, aim, goal, need로 정리하고 있다.(NMD s.v. attha)
① '이로운 것, 이익'의 뜻으로 쓰일 때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로움과 이익과 행복 을 위하여”(D14 §3.22 등)라는 문맥 등에 많이 나타난다.
② ‘뜻, 의미'로는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D2 S40 등)라는 정형구에서 보듯이
'의미(attha)와 표현(byañjana)' 이라는 문맥에서 많이 쓰인다.
③ '이치, 목적, 주제, 본질'의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그들이 [드러내는] 그 궁극적인 이치는 청정하나니(tesaṃ so attho paramo visujjhati)"(It3:49 §4)
등으로 나타나며 특히 아비담마에서는
빠라맛타(paramattha, parama + attha, 구경, 궁극의 이치, 궁극적인 것)라고 정착이 되었고
중국에서는 勝義, 眞實, 第一義(승의, 진실, 제일의) 등으로 번역하였다.
이 문맥에서 attha는 인도의 육파철학, 특히 논리학에서의 빠다르타(padārtha,
Pāli: padattha, pada + attha, 논의의 주제, 즉 그 파에서 주장하고 정리하고 논의하고
관심을 가지는 근본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여기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역자 서문 §2를 참조할 것.
aāttha가 가지는 이 세 가지 뜻이 모두 본경 이 문맥의 attha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지만
특히 세 번째의 의미가 강하다. 바로 다음 주해도 참조하기 바란다.
67) "'이 의미를 아시고(etamatthaṃ viditvā)'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처럼 무명 등을 통해서 [업]형성들[行] 등의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난다고 말씀 하셨는데
모든 측면에서(sabbākārena) [앞에 서술된 부분의] 이 의미를, 아시고라는 뜻이다.
‘그 즉시 바로(tāyaṃ velāyaṃ)'라는 것은
그 의미를 아신 그 즉시에(tassa atthassa viditavelāyaṃ)라는 말이다.
'이 우러나온 말씀을 읊으셨다(imaṃ udānaṃ udānesi),'라는 것은
그 의미를 아셨을 때(tasmiṃ atthe vidite) 원인과 원인에서 생긴 법들을 꿰뚫어 아는
위력을 밝히는 것이며(hetuno ca hetusamuppannadhammassa ca pajānanāya ānubhāvadīpalkaṃ)
‘참으로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로 시작하는 이 우러나온 말씀을 읊으신 것이다.
이것은 기쁨과 함께하고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somanassa-sampayutta-ñāṇa samuṭṭhānaṃ).”(UdA.44)
한편『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이 의미를 아시고(etamatthaṃ viditvā)’를
“그 경우(측면)를 아신 뒤에(taṃ kāraṇaṃ jānitvā)” (SA.i.144)로 설명 하고 있는데
attha를 kāraṇa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나나몰리 스님은 kāraṇa의 용례로 ① act of causing to do ② instrument ③ cause, reason
④ case, instance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NMD s.v. kāraṇa)
한편 Ireland는 본 문장을 “Then, on realizing its significance,
the Lord uttered on that occasion this inspired utterance.” (Ireland, 13 등)로 옮겼고,
타닛사라 스님은 “Then, on realizing the signifcance of that,
the Blessed One on that occasion exclaimed:” (Thanissara, 26 등)로 옮겼으며,
Masefield는 “Fathoming this matter at that time the blessed One gave rise to this Udāna.”
(Masefield, 74~75)로 옮겼다.
이처럼 앞의 두 역자는 attha를 significance(중요성)로 옮겼고 후자는 matter로 옮겼다.
♦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 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
♦ Athassa kaṅkhā vapayanti sabbā,
♦ yato pajānāti sahetudhamman”ti. paṭhamaṃ. ∴
“근면하고 참선을 하는 바라문에게68)
참으로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그의 모든 의문들은 사라지나니
원인을 가진 법을 꿰뚫어 알기 때문이로다.”69) {1}
68) “근면하고 참선을 하는 바라문에게(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라고 하셨다.
여기서 '근면하고(atāpino)'란 바른 노력[正勤]으로 정진하는 자(sammappadhānavīriyavato)이고
'참선을 하는(jhāyato)'이란 대상을 명상하고(ārammaṇūpanijjhāna)
특징을 명상하는 것(lakkhaṇūpanijjhāna)으로 참선을 하는 자이다.
'바라문에게(brāhmaṇassa)'란 사악함을 내몰아 버린(bāhita-pāpassa)
번뇌 다한 자에게(khīṇāsavassa)라는 뜻이다.”(Ud A.44)
한편 '사악한 법을 내쫓아 버린 바라문(yo brāhmaṇo bāhita-pāpa-dhammo)'이라는 표현이
본서 Ud1:4 §3과 Ud1:5 §3의 우러나온 말씀에 나타나는데 부처님께서는 바라문,
즉 brāhmaṇa라는 단어의 유래를 문자적으로 이처럼 bāhitapāpadhamma로 설명하신다.
그리고 본서「아자깔라빠까 경」(Ud1:7) §3에 해당하는 주석서도
“사악한 법들을 내몰았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에서 바라문이다
(bāhitapāpadhammatāya paramatthabrāhmaṇo)"라고 바라문을 정의하고 있는데
주석서도 brāhmaṇa를 bāhita+dhamma로 설명한다.(UdA.70)
다른 주석서들도 여기서처럼 “사악함을 몰아내어(bāhita-pāpa)
번뇌가 다한(khīṇāsava) 바라문"(SA.i.20, cf. AAT.ii.203)이라고 바라문을 설명한다.
『법구경』(Dhp) {388}, {396) ~{423} 등에서도 부처님은 바라문(brāhmaṇa)으로 불려진다.
아울러『맛지마 니까야』제3권「와셋타 경」(M98) §10 이하의 게송들과
『법구경』의 바라문 품(Dhp.390~423) 등에서 부처님께서는 진정한 바라문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계시는데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가 다하고 번뇌가 다한 성자야말로 진정한 바라문이라고 강조하신다.
바라문 집단의 출현(brāhmaṇa-maṇḍala)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디가 니까야』제3권「세기경」(D27) §22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맛지마 니까야 주석서』는 “'참선을 하라(jhāyatha).'는 것은
대상을 명상하는 것(ārammaṇ-ūpanijjhāna)으로 38가지 대상을,
특징을 명상하는 것(lakkhaṇ-ūpanijjhāna)으로
무더기[蘊], 감각장소[處] 등을 무상 등으로 명상한다는 말이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증장시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MA.1.195)로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38가지 대상은 38가지 명상주제(kammaṭṭhāna)를 말한다.
『청정도론』에서 명상주제는 모두 40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는데
주석서 문헌에서는 이처럼 38가지로도 나타난다.
38가지로 정리한 것은 경에 나타나는 10가지 까시나 가운데
마지막의 두 가지 까시나(허공의 까시나와 알음 알이의 까시나)를 제외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까시나는 네 가지 무색의 증득 가운데
처음의 둘인 공무변처의 증득과 식무변처의 증득에 포함되기 때문에
주석서 문헌에서는 이를 제외하고 38가지 명상주제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청정도론』에서는 이 둘을 제한된 허공의 까시나(paricchinnākāsa-kasiṇa)와
광명의 까시나(āloka-kasiṇa)로 대체해서 모두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경에 나타나는 열 가지 까시나 등에 대해서는
본서「답바 경」1(Ud8:9) §2의 해당 주해를 참조할 것.
40가지 명상주제에 대해서『청정도론』III.103 이하와
『아비담마 길라잡이』제9장 §6 이하와 <도표19.1>을 참조할 것.
69)『우다나 주석서』는 부처님께서 정등각을 체득하고 읊으신
우러나온 말씀의 선후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UdA,208 ~ 209)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세상 경」(Ud3:10) §3의 해당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우다나 주석서』는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으로 아래에 적고 있는
『법구 경』의 게송(Dhp{153} ~ {154})을 들고 있다.(UdA,208)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지혜를 얻지 못하여 치달려왔다.
집 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드디어] 그대는 드러났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Anekajāti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Gahakār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Gahakāraka diṭṭho si, puna gehaṃ na kāhasi;
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ṅkhataṃ;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 ajjhagā. ti, Dhp.23 {153}~{154})
계속해서『우다나 주석서』에서 담마빨라 스님은 본서 여기 Ud1:1~Ud1:3에 나타나는
이 세 개의 우러나온 말씀은 부처님의 두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적고 있다.(UdA.208)
그리고 부처님의 세 번째 우러나온 말씀은 본서「세상 경」(Ud3:10) §3의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여여한 자는 모든 존재들을 넘어섰도다.”로 끝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UdA.208)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세상 경」(Ud3:10) §3의 해당 주해도 참조할 것.
『법구경』에 실려 있는 이 게송(Dhp {153}~{154})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은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DA.i.16 = 『디가 니까야』제3권 부록 『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 §42(567쪽) 참조)
한편『법구경 주석서』는『법구경』에 나타나는 이 오도송은
스승께서 깨달음의 나무 아래에 앉으셔서 우러나온 말씀을 통해서 읊으신 뒤
나중에 아난다 장로가 질문을 하자 말씀해 주셨다고 설명한다.
(imaṃ dhammadesanaṃ satthā bodhirukkhamūle nisinno udānavasena udānetvā aparabhāge
ānandattherena puṭṭho kathesi, DhpA.iii.127)
『율장 주석서』가운데 바라이죄에 대한 주석(pārājikakaṇḍa-atthakathā)의
서문(ganthārambhakathā, VinA.i.17)에서도 붓다고사 스님은
『법구 경』의 이 오도송(Dhp {153} ~{154})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율장『마하왁가』(대품)에서는 본서에 나타나는
Ud1:1~Ud1:3을 첫 번째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러나 이것은 [12연기 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수행을 하시던 그날에
일체지(一切知)를 얻으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가득한 지혜로
조건(paccaya, 緣, 緣起)의 구조를 반조 하실 때 일어난 감흥어의 게송이지,
[깨달으신 후에 첫 번째로 읊으신 게송이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esā pana pāṭipadadivase sabbaññubhāvappattassa somanassamayañāṇena
paccayākāraṃ paccavekkhantassa uppannā udānagāthāti veditabbā, VinA.i.17; DA.i.16 =
『디가 니까야』제3권 부록 『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 §42(567쪽) 참조)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비록 율장『마하왁가』는 본서에 나타나는 이 세 가지 게송을 맨 처음에 언급하지만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은 위에 소개한 오도송 (Dhp {153}~{154})이라는 것이
『율장 주석서』에서 붓다고사 스님의 설명이다.
한편『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담마상가니』제2권 부록
『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 §§39~40(510~512쪽 참조)은
본서 여기 Ud1:1 ~Ud1:3에 나타나는 세 개의 우러나온 말씀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적고 있다.(DhsA.17 =『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 §39)
그런 뒤에 “그러나『법구경』을 암송하는 자들은 … [위의 게송] …
이것이 첫 번째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DhsA.18 = §40)라고 하면서
『법구경』의 위의 오도송(Dhp {153}~{154})을 적고 있다.
이처럼 같은 붓다고사 스님이 지은 주석서 가운데『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 등은
『법구경』의 오도송(Dhp {153}~{154})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는 입장이고,
『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은 본서 Ud1:1 ~ Ud1:3에 나타나는
세 개의 우러나온 말씀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는 입장이다.
같은 붓다고사 스님이 지은 주석서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입장이 다른 것은
붓다고사 스님이 주석서를 지을 때 저본으로 사용한 각 각의 경들에 대한
싱할리 주석서 등의 필사본들의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붓다고사 스님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쿳다까빠타』(小誦經)의 주석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법구경』의 오도송(Dhp {153} ~{154})은 부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처음이다.
(sabbassāpi buddhavacanassa ādi), 그러나
이것은 마음으로써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는 처음이지만 말로써 말씀하신 것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tañca manasāva vuttavasena, na vacībhedaṃ katvā vuttavasena),
그런 뒤에 본서 Ud1:1 ~ Ud1:3의 게송들이 말로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처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KhpA.13)
*流轉門(苦集)을 緣起라고 설하시는 경문
S12:20(paccaya sutta)에서는 還滅門은 나타나지 않는다.
(還)滅을 (緣)起라고는 할 수 없다.
[Iti kho, bhikkhave, yā tatra 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 – ayaṃ vuccati,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첫댓글 초기 불전 연구원에서 최근
[우다나]가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육입(saḷāyatana)은 욕계 중생들의 舊業(과거 누겁의 업에 의한 결과물/태어남 - 이것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
이 6입(6근)이 '나'라고 취한 결과물(5취온 명색->6근). 즉 개체의 획득(착각된 '나') 즉 個人.
이러한 구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무명을 연한여 행, 행을 연한 식. 이러한 식을 연한 명색, 명색은 연한 육입)
그 과보는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음. 숨을 쉬지 못해도 죽음.
몸에 상처가 생기면 아픔. 가르켜 주지 않아도 근이 성숙하면 성욕이 발동함.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新業을 지을 가능성이 아주 아주 높음.
그것은 신구의(3업)
[최 봉수] 교수님의 설명처럼 거의 대부분은
아주 악독한 행위를 하거나 아주 선업을 행할 가능성 보다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에 어울리는 행위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행위.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최소한 인간답게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그 이상의 수승하신 행동은 대단하신 것.
사두사두사두
우다나의 <깨달음 경>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특히 길다란 각주를 다 옮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올리신 글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만 모아보았습니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의 언덕에 있는 깨달음의 나무[菩提樹] 아래에서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해탈의 행복을 누리시면서 칠 일 동안 단 한 번의 가부좌로 앉아 계셨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칠 일이 지난 뒤 그 삼매로부터 출정하셔서
밤의 초저녁[初夜]에 연기를 발생하는 구조로[流轉門] 이처럼 잘 마음에 잡도리하셨다.
2.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 즉 무명을 조건으로 [업]형성들[行]이, [업]형성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識]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名色)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슬픔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老死優悲苦惱]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이러한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라고.
3. 그때 세존께서는 이 의미를 아시고 그 즉시 바로 이 우러나온 말씀을 읊으셨다.
“근면하고 참선을 하는 바라문에게
참으로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그의 모든 의문들은 사라지나니
원인을 가진 법을 꿰뚫어 알기 때문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