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定羅氏 由來 安定羅氏 始祖는 高麗 恭愍王朝에서 三重大匡 門下侍中 安川君 安定伯(삼중대광 문하시중 안천군 안정백)에 봉작(封爵)된 羅天瑞이시다.
고려사에 의하면 시조공(始祖公)께서는 공민왕(恭愍王)19년(서기1370년) 요동(遼東)의 동령부(東嶺府)를 정벌(征伐)할 때 진무(鎭撫)로 출정(出征)하여 우리 군사 일만 오천여명이 회군(回軍)하면서 혹한(酷寒)에 군량미가 떨어져 아사지경(餓死之境)이 되었을 때 수백석의 곡식을 구하여 굶주린 장졸(將卒)들을 구휼(救恤)한 공로와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을 바로 하고자 진력(盡力)한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안정백(安定伯)에 봉작(封爵)되어 안정현(安定縣)을 식읍(食邑)으로 받고 이어 안천군(安川君)에 봉군(封君)되었다.
高麗의 國運이 다함에 시조 공(始祖 公)께서는 아들 합문지후 직경(閤門祗候 直卿)과 함께 식읍지(食邑地)이며 고향(故鄕)인 안정(安定)으로 퇴거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고 고려의 재상(宰相)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키다 졸(卒)하시고 해망산(海望山) 계좌(癸坐)에 묻히셨다. 그런 연고(緣故)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안정(安定)으로 하였다.
貫鄕地 安定 沿革 우리가 관향(貫鄕)으로 삼고 있는 안정(安定)은 신라(新羅) 때부터 매우 중요시 여긴 곳이다.
즉, 오늘날 광역시(廣域市)에 해당하는 소경(小京)이 서기514년 (新羅 智證王15)에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이라는 이름으로 설치(設置)되었고 삼국(三國) 통일 후 서기685년 (神文王 5)까지는 아시혜현(阿尸兮縣)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757년 (新羅 景德王16)에 아시혜현을 안현현(安賢縣)으로 고치고 이웃한 아화옥현(阿火屋縣)을 비옥현(比屋縣)으로 고쳐 함께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사』 지리지 안정현(安定縣)조에 따르면 서기940년 (高麗 太祖23)에 안현현(安賢縣)을 안정현(安定縣)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안정현(安定縣)의 定은 貞이라고도 쓴다고 하였다. 서기1018년 (顯宗9)의 대대적 군현 개편 때 상주목(尙州牧)의 속읍이 되었다. 속읍(屬邑)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는 군현으로 수령이 파견된 주읍(主邑)의 행정 지배를 받는다. 서기1390년 (恭讓王2)에 비로소 안정현(安定縣)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비옥현을 함께 다스렸다. 서기1421년 (朝鮮 世宗3)에는 안정현이 비옥현을 흡수 통합하여 안비현(安比縣)이라 개칭하고, 다시 2년 뒤인 서기1423년에는 비안현(比安縣)으로 고치고, 서기1896년 (高宗 建陽元年)에 경상북도 비안군(比安郡)으로 개칭(改稱)하고, 서기1914년 (倭政5)에 의성군(義城郡)에 합병되어 비안면(比安面)과 안계면(安溪面)으로 되었다.
***比安縣 景德王改阿火屋縣爲比屋 改阿尸兮縣爲安賢 皆爲聞韶郡領縣 高麗顯宗戊午 二縣皆屬尙州任內 改安賢爲安貞 恭讓王二年庚午 始置安貞監務兼任比屋 今上三年辛丑 改爲安比縣監 癸卯 又改爲比安 [세종실록 권제150, 20장 뒤쪽, 지리지 비안현]
***『계곡집(谿谷集)』에 실려 있는 ‘고 봉훈랑 성균관 전적 증 봉직랑 수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나공 묘갈명(故奉訓郞成均館典籍贈奉直郞守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羅公墓碣銘)’에 “나씨(羅氏)는 본래 나주(羅州)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천서(天瑞)라는 분이 공을 세워 비안(庇安)의 안정현(安定縣)을 식읍(食邑)으로 받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마침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縣)의 사람들이 시조공(始祖公)이 거처(居處)하셨던 좌우(左右) 마을을 정승동(政丞洞)이라 하는데 이는 시조공(始祖公)의 아우 원서(元瑞)와 문서(文瑞)가 모두 정승(政丞)이었기 때문이다
始祖淵源 高麗史와 家乘과 貫鄕地에 口傳하는 바를 살펴보면 始祖 天瑞 公은 安定縣 安定里 지금의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 羅基 마을에서 탄생하시고 이곳에서 학문과 무예를 익혀 科擧에 及第하여 王京인 開城으로 가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恭愍王 19년(1370년) 元나라가 遼東에 세운 東寧府를 征伐할 때 진무(鎭撫)로 出征하여 큰 공을 세웠다.
우리 군사가 처음 遼城을 공격할 때 火攻으로 軍糧米를 모두 불태우고 城을 陷落하였음으로 回軍할 때 軍糧米가 바닥나고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일만 오천여 병사들이 隊伍가 흐트러져 元나라의 反擊이 심히 걱정스러울 때 始祖 公이 수백석의 곡식을 구하여 군사들을 救恤하여 무사히 귀환하게 한 공으로 門下侍中이 되고 安定伯에 封爵되고 安定縣을 食邑으로 받았으며 이어서 安川君에 封君되었다.
高麗의 運이 다함에 아들 閤門祗侯 直卿을 데리고 故鄕 安定으로 退去하여 杜門不出 不事二君의 貞節을 지키시니 後人들이 杜門洞七十二賢 中 한분이라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始祖 이전의 先系나 生卒年은 傳하는 바가 없다.
◈ 홍양사(鴻陽祠) 본 사우(祠宇)는 안정나씨(安定羅氏) 일문(一門)에서 충절(忠節), 효행(孝行) 및 학덕(學德)이 뚜렷한 육현(六賢)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사우(祠宇)다. 충청북도(忠淸北道) 청원군(請原郡) 내수읍(內秀邑) 비중리(飛中里) 110-1번지에 소재(所在)하며 1970년에 공사(工事)를 시작(始作)하여 3차에 걸친 국비 도비 군비 보조를 받아 1978년에 완공(完工)하였다. 외삼문(外三門)인 경의문(景義門)으로 들어가면 정면 왼쪽에 홍양사묘정비(鴻陽祠廟庭碑)가 정면 오른쪽에 신묘정비(新廟庭碑)가 있고 마당에는 서재(西齋) 모충당(慕忠堂)만 있고 동재(東齋)는 10여 년 전 철거하였다. 묘정비 오른쪽으로 안정나씨삼세충효비(安定羅氏三世忠孝碑), 충신문(忠臣門), 삼효문(三孝門), 충의비(忠義碑)가 있고, 묘정비 뒤로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내삼문(內三門)인 충의문(忠義門)이 있다. 사당(祠堂)은 建坪 12평에 正面 3칸 側面 2칸의 목조와즙 맞배집이다. 상량문(上樑文)에는 단기 4305년(서기 1972년) 9월 4일 미시(未時)라고 되어있다. 특히 충신문(忠臣門)과 삼효문(三孝門)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第41號이며 그 앞에는 정문(旌門)과 夾門이 있다. 모충당(慕忠堂) 뒤쪽 담장 밖에는 현대식 건물의 관리사가 있다. ◈ 안정나씨(安定羅氏) 육현(六賢) ○ 안정백(安定伯) 천서(天瑞) 안정나씨의 시조(始祖)이시다. 고려공민왕 19년(서기1370년) 요동(遼東)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征伐)할 때 진무(鎭撫)로 출정하였다. 요성(遼城)을 함락하고 귀환하던 일만오천여명의 군사는 군량미가 바닥나 추위와 기아로 아사 직전에 처하였다. 그때 시조공이 양곡 수 백석을 구하여 군사들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하여 공민왕으로부터 “公이 전쟁을 그만 두게 하였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한 군공(軍功)과 정사(政事)에 진력한 공으로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안천군(安川君)안정백(安定伯)에 오르고 안정현(安定縣)을 식읍지로 하사(下賜)받았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므로 아들 합문지후(閤門祗侯) 직경(直卿)을 데리고 고향 안정(安定)으로 낙향(落鄕)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고려(高麗)의 재상(宰相)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으로 추앙(推仰)받는 분이다. 「고려사 열전」「두문동72현록」「해동삼강록」등에 그 절의가 실려 있고, 개성(開城)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정절반(貞節班)과 청원의 홍양사(鴻陽祠) 그리고 파주(坡州)의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配享)되었다. 묘소(墓所)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慶北 義城郡 安溪面 安定里) 해망산(海望山) 계좌지원(癸坐之原)에 있다. ○ 충정공(忠貞公) 사종(嗣宗) 字는 광원(光遠)이요 號는 퇴수헌(退修軒)이며 안정나씨 6세로 청주파종중(淸州派宗中)의 中始祖이다. 양산군사(梁山郡事) 유선(裕善)의 셋째 아들이며 할아버지는 죽산현사(竹山縣事) 경손(慶孫)이다. 성종(成宗)20년(1489)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성준(成俊)의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을 배수(拜受)하고 곧이어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다. 성종22년(1491) 여진족(女眞族) 별추(別酋) 우지거(于知車)가 이끄는 철기(鐵騎) 일천을 맞아 싸우다가 조산보(造山堡) 전투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장졸들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성종(成宗)께서 공(公)의 충절(忠節)을 가상(嘉尙)히 여기시어 병조참판(兵曹參判)을 내리셨고, 숙종(肅宗) 43년(1717)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대총제(大摠制) 훈련원(訓練院)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증직(贈職)되고 충정(忠貞)이라 시(諡)하여 정려(旌閭)를 명(命)받았다. 홍양사(鴻陽祠) 외삼문 우측(外三門 右側)의 홍살문이 바로 그 정문(旌門)이다. 墓所는 청원군(淸原郡) 현도면(賢都面) 매봉산(梅峰山)에 있다. ○ 장음정공(長吟亭公) 식(湜) 字는 정원(正源)이요 號는 장음정(長吟亭)이며 안정나씨 8세이다. 아버지는 지평(持平) 세걸(世傑)이요 할아버지는 경파 중시조(京派 中始祖) 계종(繼宗)이다.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잠시 선릉참봉(宣陵參奉)에 봉직(奉職)하다가 귀향(歸鄕)하여 당대(當代)의 명현(名賢)들과 도학(道學)을 강론(講論) 교유(交遊)하며 오직 인재양성(人才養成)에 정진(精進)하였다.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城)선생은 공(公)을 평(評)하여 도학과 문장이 압동제일(鴨東第一)이다라고 하였다. 간배(奸輩)들의 무고(誣告)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아우 부제학공과 함께 피화(被禍)되어 흥양(興陽)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강계(江界)에서 사사(賜死)되고 선조(宣祖)3년에 아우 부제학공과 함께 신원복관(伸寃復官)되었다. 공(公)이 無男하여 백씨(伯氏) 사직 옥(司直 沃)의 三男 윤례(允禮)로 후사(後嗣)를 이었다. 墓所는 남양주 삭다니(朔端里) 죽산공 선영(竹山公 先塋) 백호등(白虎嶝)에 있다. ○ 부제학공(副提學公) 숙(淑) 字는 善源이요 號는 정음(淨陰)이며 안정나씨 8世이다. 아버지는 지평(持平) 세걸(世傑)이요 할아버지는 경파 중시조(京派 中始祖) 계종(繼宗)이다. 公은 천자영수(天資英秀)하여 중종(中宗)19년(1524)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及第)하였다. 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일 때 간신배(奸臣輩)들의 무고(誣告)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仲兄 장음정(長吟亭)과 함께 피화(被禍)되어 철산(鐵山)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이듬해 경원(慶源)에서 사사(賜死)되고 선조(宣祖)3년에 仲兄과 함께 신원복관(伸寃復官)되었다. 公이 찬(撰)한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행경흥도호부사(行慶興都護府使) 사종(嗣宗)의 행장(行狀)이 있다. 墓所는 남양주(南楊州) 삭다니 죽산공 선영(竹山公 先塋) 맞은편 언덕에 있다. 묘소(墓所)에는 아주 희귀(稀貴)한 백비(白碑) 즉 글자가 전혀 없는 하얀 비(碑)가 서있다. ○ 구포공(鷗浦公) 만갑(萬甲) 字는 몽뢰(夢賚)요 號는 구포(鷗浦)다.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급(級)이고 증조(曾祖)는 한림공(翰林公) 익(瀷)이다. 인조(仁祖) 때 文科에 及第하여 증조로부터 4대를 이어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한다. 公은 성품(性品)이 순수(純粹)하고 강직(剛直)하여 출사(出仕)후에 내직(內職) 외직(外職) 귀향(歸鄕)과 유배(流配)를 수없이 반복(反復)한다. 직간(直諫)으로 파직(罷職)되어 낙향(落鄕)하여 지내던 병자(丙子)년 겨울에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자진(自進)입성(入城)하여 관향사(館餉使)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국난극복(國難克服)에 큰 공을 세운다. 호란(胡亂) 후(後)에 모함(謀陷)으로 영해(寧海)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용서받고 영주(榮州)에서 卒하다. 정사훈(靖社勳) 등 원종훈(原從勳) 누(累)로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된다. 公의 著書인병자록(丙子錄)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墓所는 경기도 구리시 사노리(九里市 四老里)에 있다. 묘역(墓域)과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京畿道有形文化財) 第126호다. ○ 명촌공(明村公) 양좌(良佐) 字는 현도(顯道) 號는 명촌(明村)이다. 아버지는 해주목사(海州牧使) 성두(星斗)이고 할아버지는 증직 좌의정(贈職 左議政) 만갑(萬甲)이다. 노서(魯西) 윤선거(美村 尹善擧)를 사사(師事)하여 문장(文章)과 성리학(性理學)에 통달(通達)하였다. 동춘당(同春堂)송선생(宋先生)이 천거(薦擧)하여 희릉참봉(禧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郞) 충청도사(忠淸都事)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삭령군수(朔寧郡守)를 제수(除授)하나 모두 不就하고 오직 학문과 인재양성에 전심하다가 노서 윤선거(魯西 尹善擧)의 누명(陋名)을 벗기고자 상소(上疏)를 하다가 영변(寧邊)으로 유배(流配)되었다. 69세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拜命하였다. 公은 始祖 안천군(安川君)의 묘비문(墓碑文)을 찬(撰)하였다. 墓所는 경기도 구리시 사노리(九里市 四老里) 조고(祖考) 구포공묘(鷗浦公墓) 아래에 있다. [출처] 安定羅氏 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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