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 페인팅
박수현
밤
사막을 가로지르는 쌍봉낙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바람은 능선의 기하학적인 장정裝偵을 지운다 바람과 모래의 입술이 맞닿은 텍스트는 다시 백지다 한기가 엄습하는 밤, 육탈한 뼈만 남는 단호한 시간 전갈좌가 밤새 사막의 지붕에 도사리고 있다 무주지無主地의 모래톱에서 별빛들이 붐빈다
아침
모래 눙선이 노파의 턱밑 주름처럼 호弧를 그린다 밤새 곱은 손을 비비던 사막은 아침 햇살에 사프란빛으로 쾌활하다 능선의 늑골을 향해 검은 개미를 먹고 사는 도깨비도마뱀이 기어가고 새들은 색종이 조각처럼 공중을 난다 어린 유칼리나무 잎새들이 쟁쟁거리는 순간 모래 소용돌이를 온몸이 밀고 가는 카라반들
정오
모래들이 흰 하늘로 스타카토식 고음의 노래를 바친다 너무 많은 태양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극사실주의, 팽팽한 스테인리스스틸 판처럼 은유도 없는 시선뿐이다 모래 속에 묻어둔 타조알을 찾아 와디를 헤매거나 소금에 절인 짐승의 살코기를 먹인 까마귀를 쫓아 물을 찾는 삼부르족 여인들 발목을 지운 자코메티의 후예들이다
저녁
태양이 각도를 조금씩 눕히면 사막은 카옌 후추빛 허밍을 낮게 부른다 낮이 다 타버린 자리에 노을은 낮과 밤을 가르는 도끼처럼 때론 에뮤 깃털 부츠를 신고 걸어온 발자국들을 빗질하며 찾아든다 저물녘, 낙타는 모래 속에 묻은 새끼의 울음소리로 사막을 건너고 차르르 모래 물결 따라 사막은 사라진 누란樓蘭의 방언을 써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밤
지하철 구로역 출구에서 초록 버스를 갈아탄다 버스의 YAP 광고 화면, 엄지손가락으로 그린 모래 꽃다발이 여인의 긴 머리채로, 중지와 검지는 박쥐우산을 받쳐 든 남자와 공원의 벤치를 불연속적으로 배치한다 눈 감으면 나는 모래보다 가벼워진다 까슬한 모래 알갱이들이 목젖을 타고 흘러내린다 사막의 사구에 쟁여진 만다라曼茶羅들 모호크족 머리 장식 같은 볏을 세운 새들이 어떤 그늘을 물고 머리 위를 빙빙 돈다 내 몸에는 철 지난 포도알 같은 눈알들이 매달리 지만 뒤도 앞도 보이지 않는다 느리게 숨 쉬는 검보랏빛 카라부란이 행간 속에 묻어둔 울음을 흩뿌린다 차창 밖으로 벌써 백만 번째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자귀나무
벽시계 속 숫자들을 주머니에 넣고 호두알처럼 굴려본다
깊어진 벽시계 속 오후 3시 계단을 내려서면
툇마루 끝에 선 아이는 기침을 하고
한낮은 하얗게 증류되어 싸리울을 넘어가고
기울어진 추녀 끝이
우물가 자귀나무 그림자가 빙빙 돌아가고
손톱이 까만 아이의 늑골에서 분홍 꽃술들이 열리고
댓돌 위 검정 고무신 위로 피점이 흩어지고
아이는 꽃길로 들어서고
발자국을 뗄 때마다 꽃송이들이 검게 뭉그러지고
깨진 솥 때우소, 빵구 난 백철 남비 밑구녕 때우소
담장 너머 땜장이 쉬어터진 목소리를 들으며
여름은 몽유처럼 분홍잠에 들고
망가진 분홍색 자귀나무가 머리맡에서
자귀 자귀 아이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었다
다시, 까마귀 떼가 점점이 자귀나무에 내려앉고
늙은 아이는 분홍 꽃자루 한 다발을
늑골 속에 비벼 넣고
벽시계 속 숫자들은 쿠쿨룩 잔기침을 흘리고
― 박수현 시집, 『샌드 페인팅』 (천년의시작/2020)
박수현
경북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연합 기행시집 『티베트의 초승달』 『밍글라바 미얀마』 『나자르 본주』 등 출간. 2011년 서울문화재단 작가창작 활동 지원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지원금 수혜. 현 시인협회 중앙위원. 〈온시溫詩〉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