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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라 할 수 있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놓고 지금까지 논란이 많다. 그 진실은 무엇일까. | | 1945년 8월 원폭 투하의 숨은 이야기...원폭 투하 없었다면 일본 열도 황무지 됐을 수도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사형선고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놓고 지금까지 논란이 많다.
미국은 어떤 이유로 일본의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극약처방을 내린 것일까.
이것이 과연 전술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나, 아니면 고사 직전의 일본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반면 자폭 항공기부대 가미가제, 자폭 어뢰부대 가이텐, 자폭 보트부대 신요오 등을 운용할 정도로 본토 사수를 외치던 일본군 수뇌부는 무슨 이유로 즉각 백기를 들었을까.
[원폭 투하를 둘러싼 논란 지속]
태평양 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5년 8월. 미국은 B-29 폭격기를 이용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15킬로톤급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21킬로톤급 ‘패트 맨’을 투하했다.
원폭 투하로 인해 히로시마에서 14만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명이 숨졌다. 부상 및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으로 대를 이어 고통당한 사람들 역시 수만명이 넘었다.
일격을 받은 일본 천황은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고, 9월 2일 미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의 항복 조인식을 끝으로 15년 동안 수천만의 인명을 살상한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특히 한국인이라면 아주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는 불가피 했는가’라는 주장이 요즘 들어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다.
다시 말해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끝낼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인 것이다.
반핵, 반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 중에 이 같은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다.
좀 과격한 사람들은 독일에 원폭을 투하하지 않은 것을 들어 “대일 원폭 투하는 황인종을 열등하게 여긴 미국의 인종차별적 전쟁 수행의 증거”라고까지 주장한다.
[2차 대전 후반의 옥쇄 행렬]
미국의 원폭 사용 이유를 알려면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43년 당시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 필요가 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전 태평양을 휩쓸며 불패 행진을 계속하던 일본군은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해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벌어진 과달카날 지상전에서 미군에 패한다.
숙련된 전투원 상당수를 손실함으로써 일본이 수세에 들어서게 된 것.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이제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지만 과달카날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5,000km나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있는 태평양의 섬들은 모두 일본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을 방치해 둔다는 것은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일본군의 수중에 방치해 둔다는 것과 마찬가지 뜻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는 태평양의 섬들을 차례차례 함락시키면서 일본 본토로 전진하는 이른바 ‘개구리 뜀 전략’을 채택했다.
즉 해병대와 육군을 앞세워 이들 섬에 대한 상륙전에 들어간 것.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국가를 위한, 천황을 위한 죽음을 영예로운 것으로 여기는 일본군에게 항복은 곧 치욕이었다.
특히 목숨을 버려서라도 임무를 수행하라고 세뇌 받고 있던 당시의 일본 병사들은 미군이 가는 전장 터마다 문자 그대로 ‘최후의 1명까지’ 싸웠다.
이렇듯 적과 싸우다 전멸한 일본군을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졌다’고 해서 옥쇄(玉碎)라고 표현했다.
1943년 5월 29일. 알류샨 열도의 아투 섬에서 야마자키 야스요 육군 대령 휘하의 병력 2,650명이 상륙한 미군을 맞아 불과 13명의 생존자만 남긴 채 모조리 전멸해 버렸다.
이 것을 시작으로 마킨 섬, 타라와 섬, 퀘젤린 제도, 사이판 섬, 티니안 섬, 괌 섬, 페릴류 섬 등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맞아 끝까지 싸워 극소수의 생존자만을 남기고 모조리 전멸했다.
일본군의 전투는 가면 갈수록 치열해져 1945년 2월 19일 일본 본토 인근의 이오지마에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 2만3,000명은 1,000명도 못되는 생존자를 남기고 모조리 전멸했다.
상륙한 미군 역시 전사자 약 7,000명, 부상자 2만명 이상의 기록적인 인명 피해를 낸다.
1945년 4월 1일부터 두 달 반 동안 계속된 오키나와 상륙전에서는 10만 일본군 중 전사 및 실종 6만6,000명, 일본 민간인 사망 및 실종 15만 명의 피해를 낸다.
하지만 일본은 더욱 경악스러운 대응에 나선다. 미국 항공모함을 향해 내리 꽂히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일본군은 자폭 어뢰부대인 가이텐, 자폭 보트부대인 신요오 등도 운용했다.
‘지능을 갖춘 생체회로로 유도되는 미사일’로 표현되기도 했던 이 자폭부대는 연합군에게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전투에서 군인이 자살적인 공격 또는 자폭 공격을 통해 적을 격퇴하는 행위는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죽음이 100% 보장된 자살공격 전문부대를 만들었고, 그에 맞는 자살용 병기까지 특별 제작했다는 점이 달랐다.
이렇게 극심한 저항에 부딪친 미군이 받은 물질적,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다.
규슈, 혼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을 직접 공격했다가는 과연 얼마만한 인명손실이 날 것인가? 그리고 유럽 전선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미 패배한 마당에 국민들에게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충분한 명분이 있을 것인가?
[미국의 막대한 사상자 예측]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인 ‘다운폴’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다운폴 작전의 하부 작전으로 규슈 상륙작전인 ‘올림픽’ 작전, 그리고 혼슈 상륙작전인 ‘코로넷’ 작전이 구상됐다.
올림픽 작전의 예정일은 1945년 11월 1일, 코로넷 작전의 예정일은 1946년 3월 1일이었다.
올림픽 작전에서는 34만명, 코로넷 작전에서는 57만명이 일본에 상륙해 싸울 예정이었다.
일본 역시 ‘결호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한 본토 방어 태세를 다지고 있었다.
종전 직전 일본 본토에 주둔한 육군 사단 수는 총 65개. 그러나 그 중 충분한 무장과 탄약을 지급받은 것은 절반 이하인 30개 사단에 불과했다.
다급해진 일본은 15~60세까지의 민간인 성인 남성과 17~40세까지의 민간인 성인 여성까지 모두 동원해 향토 방위대를 편성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무장은 잘해봐야 구식 소총 또는 민간용 총기였고 대부분은 죽창과 낫, 일본도 등으로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세균병기를 감염시켜 설령 죽더라도 그 시신을 생물학적 부비트랩으로 사용하려는 계획까지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실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요컨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국민은 얼마든지 죽어도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결사적인 군민합동 항전태세를 알게 된 미국은 다운폴 작전 내용에 일본 내 25개 대도시를 독가스로 공격한다는 내용까지 끼워 넣는다.
독가스 공격은 25개 도시의 인구 500만명이 전멸하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었다.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전사상 가장 처절한 전투가 될 것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6월 18일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이 출석한 가운데 열린 미국 합동참모본부 회의에서 다운폴 작전 진행시 발생할 미군 사상자 예상치가 논의됐다.
육군과 해군의 여러 전문가 및 고관들이 다양한 예측을 내놓았지만 최소한 25만명의 미군이 전사․부상․실종당하고 전쟁이 16개월 이상 더 연장될 것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군 전사자만 50만명이 발생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것은 당시의 미국으로서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일본 열도, 황무지 됐을 수도]
1945년 7월 16일. 미국 로스 알라모스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리에 끝난다.
그리고 열흘 후인 7월 26일에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4개국 수뇌가 독일 포츠담에서 모여 일본의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의 처리에 관해 논의한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항복 조건은 제국주의적 지도 세력의 제거, 전쟁 범죄자의 처벌, 연합국의 일본 지배, 일본 영토 제한, 철저한 민주화 등으로 규정되었지만 당시 일본 총리인 스즈키 칸타로는 7월 28일의 성명을 통해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제 미국에게 원폭 이외에 더 나은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원폭을 사용하지 않으면 미국인 수십만명과 일본인 수백만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본토 상륙전을 벌여야 했다.
결국 8월 6일 티니안 섬에 주둔해 있던 제509 혼성항공단 소속 B-29 ‘에놀라 게이’호가 폴 W. 티베츠 대령의 조종으로 비행, 일본 제2군사령부가 위치한 히로시마에 15킬로톤급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다.
히로시마는 완파되었고, 일본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그들의 반응은 미약했다.
아무도 항복하려 들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무리 미국이라도 저런 무기를 2발 이상 갖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첫 원폭을 맞았음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결국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21킬로톤급 원자탄 패트 맨을 투하했다.
그제서야 상황을 납득한 일본 천황과 대신들은 포츠담 선언의 요구사항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물론 원자폭탄이 수십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전후 미․소간 전면 핵전쟁 위협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냉전시대를 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폭이 사용되지 않았더라면 두 번에 걸친 일본 본토 상륙전과 무차별적으로 전개될 화생방전으로 인해 일본 열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했을 것이다.
천황을 비롯한 일본 지도부가 조선으로 거처를 옮겨 항전을 계속했을 경우 우리나라도 결코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안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어간 일본인 1명은 수백명 이상의 동포 목숨을 구한 셈이 된다.
이런 것이 아마도 역사의 비정한 산술이자 아이러니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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