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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문화유산여행길’ 수승대 일대 14㎞ 트레킹
국제신문 기사 입력일 : 2017-08-02
유정환 기자
숲길따라 즐비한 문화유산 다리도 쉬고 땀도 식히고…
- 정기필선생 고택·정온선생 종택
- 삼봉산·호음산 등 덕유산 능선
- 신선이 내려와 앉았다는 강선대
- 갈계숲의 가선정·도계정 압권
- 관수루 지나 주차장서 마무리
계곡산행의 대미는 거창 수승대 주변의 문화유산을 엮은 트레킹 길인 ‘문화유산여행길’로 장식하려고 한다. 거창 수승대는 계곡과 거북바위가 멋진 곳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주변 문화유산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거창군은 수승대에서 산과 고개를 넘고 임도를 따라 걸으며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코스를 개발해 널리 알리고 있다. 코스 안내는 거창을 대표하는 빨간색 사과 모양의 표지가 맡았다. 계곡과 지역 문화유산을 동시에 만나고 싶다면 ‘거창한 도시’ 거창으로 달려보자.
산행은 수승대 주차장에서 시작해 척수대(이태사랑바위)~위천교~벚꽃공원~정온 종택~모리재 입구~고개~정자~헬기장 갈림길~성령산 정상~모리재~강선정~강선대~고인돌~만월당~갈계숲~농산리석불입상~용암정~거북바위~관수루를 지나 주차장에서 마무리하는 원점회귀 코스다. 총산행거리 약 14㎞에 순수 산행시간은 5시간가량 걸린다.
수승대 주차장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수승대(搜勝臺) 밖으로 나와 오른쪽 척수대(滌愁臺)를 만난다. 척수대는 수승대 남쪽 들머리 냇물을 향해 돌출한 큰 바위로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 사신이 각기 다른 나라에 가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근심을 씻었다는 곳이다. 이어 솔숲이 나온다. 시원한 그늘에 텐트를 친 야영객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오른쪽 테니스코트와 화장실 사잇길을 지난다. 위천교를 건너 오른쪽 벚꽃공원과 모리재 입구를 지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조선 헌종과 철종 때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 선생이 기거했던 고택인 반구헌(反球軒, 경남 문화재자료 제232호)이 있다. 반구는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건축물로 대접받는 동계 정온 선생의 종택(중요민속자료 제205호)이 나란히 있다. 이조참판을 지낸 선생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화의가 이뤄지자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덕유산 모리에 은거하다 생을 마감했다.
되돌아 나와 모리재(某里齋) 입구로 간다. 잇단 갈림길이 나오지만 모리재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수승대 현수교 갈림길에서 약 300m를 가면 정자가 나오는데 오른쪽에 수승대 유원지와 그 뒤로 일자로 뻗은 건흥산과 아홉산이 보인다. 정자에서 직진하면 헬기장 갈림길이 나온다. 먼저 오른쪽으로 50m 앞에 있는 성령산(448m) 정상에 들른다. 정상에서 직진하면 용암정(龍巖亭) 방면이지만 되돌아 나와 모리재(3.3㎞) 이정표를 따라 직진한다. 이후에도 모리재 이정표를 따라가다 말목고개 생태 터널을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이 나온다. 현성산과 헤어지는 안부 갈림길에서도 모리재(0.6㎞) 방향으로 간다. 모리재로 가는 길에 대봉 삼봉산 호음산 등 덕유산 능선이 펼쳐진다. 이어 임도 왼쪽에 모리재가 있다. 모리재(某里齋)의 재는 고개가 아니라 재실을 말하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 갈림길에서 초록색 울타리가 쳐진 왼쪽으로, 세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강선정을 지나 왼쪽으로 꺾은 뒤 영모동 비석 바로 옆 쉼터 안에 ‘신선이 내려와 앉은 자리’라는 뜻의 강선대(降仙臺) 바위가 있다. 강선대교를 지나 강선대 버스정류장이 있는 오른쪽으로 꺾는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왼쪽으로 꺾어 위천 옆 모암정(帽巖亭)을 끼고 있는 허브농장인 민들레울의 정자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고인돌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고인돌인 농산리지석묘를 지나 쭉 나아가면 장야교가 나온다. 왼쪽으로 꺾은 뒤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용수막회관 옆에 만월당 정종주(1573~1653) 선생을 기려 현종 7년에 세운 고가인 만월당(滿月堂, 경남 유형문화재 제370호)을 만난다. 이어 북상교에서 왼쪽으로 가면 높이가 22m에 달하는 200~300년 된 소나무, 물오리나무, 느티나무 등이 2㏊에 걸쳐 군림을 이룬 갈계숲(거창군 천연보호림 제2호)이 있다. 갈계숲은 조선 명조 때의 유학자인 석천 임득번과 그의 아들 갈천 임훈 등 삼형제와 문인들이 시를 지으며 노닐던 곳으로 숲에는 가선정(駕仙亭), 도계정(道溪亭), 병암정(屛岩亭), 신도비 등이 세워져 지조 높은 선비들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장야교로 돌아와 건너면 오거리가 나온다. 도로를 직진해 두리농장 표지석 뒤 농산리석불입상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완만한 숲길로 150m를 들어가면 농산리석불입상(보물 제1436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리농장 쪽으로 나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사거리에서 위천과 거창 방향인 오른쪽으로 꺾는다. 트레킹 길 안내도에는 직진해 행기숲을 지나 용암정으로 길이 연결돼 있다고 돼 있지만 수풀이 우거져 길 찾기가 불가능하다. 길을 찾느라 50분가량 지체하다 보니 슬슬 부아가 치민다. 분기별로 군에서 코스를 점검해도 이런 일은 없을 텐데 아쉽다. 사거리에서 네 번째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직진하다 용암정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꺾는다. 용암정(龍巖亭, 경남 문화재자료 제253호)은 1801년(순조1) 용암 임석형 선생이 위천 강변의 바위 위에 지은 정자로 경관이 뛰어나다. 이어 용암정 오른쪽으로 난 위천 옆길을 따른다. 갈림길이 나오면 직진한다. 오른쪽 길은 성령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위천을 바라보는 전망대에 이어 거북바위가 보이는 전망대(출입금지 안내판 설치)를 지난다. 덱이 끝나는 지점에서 계곡과 거북바위가 있는 왼쪽으로 꺾는다. 직진하면 요수 신권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요수정(樂水亭)을 만날 수 있다. 거북바위와 관수루(觀水樓)를 지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수승대 주차장이 나온다.
# 교통편
- 부산서부터미널서 거창 이동
- 위천 농어촌버스 수승대 하차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거창으로 가는 버스(오전 7시10분, 8시20분, 9시30분, 10시30분, 11시40분)를 탄다. 이어 거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뒤편 서흥여객터미널에서 위천행(월성 병곡 산수 황점 송계사) 농어촌버스(오전 6시, 6시35분, 7시, 7시40분, 8시, 9시, 9시30분, 10시30분, 11시, 11시30분, 12시30분)를 타고 수승대에서 하차하면 된다.
산행을 끝내고 수승대에서 서흥여객터미널로 가려면 월성 병곡 산수 황점 송계사에서 출발하는 버스(출발지 기준 오후 3시10분, 3시40분, 4시35분, 5시10분, 5시30분, 6시25분, 6시50분, 7시40분, 8시10분)를 타면 된다. 이어 거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행 버스(오후 3시10분, 4시10분, 5시, 5시50분, 6시40분)를 탄다. 시간이 안 되면 동대구역으로 이동해 열차를 타면 된다.
문의=스포츠레저부 (051)500-5147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글·사진=유정환 기자 defiant@kookje.co.kr
수승대(搜勝臺)
심산유곡의 산수를 즐기다
문화재 지정 : 명승 제53호
소재지 : 경남 거창군 위천면
원학동은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알려진 ‘안의삼동’ 중의 하나다. ‘안의삼동(安義三洞)’은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일컫는다. 화림동에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심진동에 풍류암, 장수사, 용추폭포가, 원학동에 수승대가 위치한다. 안의(安義)는 오늘날 함양군과 거창군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소백산맥 줄기의 동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은 매우 험준한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원학동은 위천을 따라 월성계곡의 아래 지역에 위치한 동천이다. 조선시대에 동은 오늘날과 같은 행정지명이 아니라 동천을 의미하는 글자로 맑은 계류가 흐르고 산수가 아름다우며 경치가 좋은 계곡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러한 원학동천의 중심에 바로 수승대가 자리하고 있다. 수승대의 계곡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이루면서 흐르는 물길이 조형해 놓은 비경이다.
수승대는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가운데 위치한 거북바위(龜淵岩)가 중심이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요수정, 계곡의 진입부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는 요수정의 반대쪽에 마주하고 있다. 요수와 관수는 모두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풍류의 멋을 음유하는 말이다. 요수정과 관수루에서는 거북바위가 위치한 수승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북바위는 수승대에서 가장 중요한 경관 요소다.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 하는데,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m2에 이른다. 구연대라는 명칭은 마치 바위가 계류에 떠 있는 거북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비록 키는 작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은 노송들이 곳곳에 자라고 있는 거북바위에는 수승대의 문화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다. 퇴계 이황이 이곳을 수승대라고 이름 지을 것을 권한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는 시와 이에 대한 갈천 임훈(林薰)의 화답시 〈갈천장구지대(葛川杖廐之臺)〉, 더불어 옛 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 차 있다.
계곡의 건너편에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둔 학자로 향리에 은거하며 소요자족했던 요수 신권(愼權, 1501~1573)이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던 요수정(樂水亭)이 서 있다. 이 정자는 구연대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수승대의 경관을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요수는 아름다운 원학동 계곡에 살던 신권의 성정을 짐작하게 하는 정자의 명칭이다. 요수는 《논어》의 〈옹야(雍也)편〉에 나온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는 글로 옛 선비들이 심산유곡의 산수를 즐기며 늘 마음에 두었던 문구다. 요수정은 1542년 구연재와 남쪽의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중건한 뒤 다시 수해를 입어 1805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수승대의 동쪽에는 구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요수 선생이 1540년(중종 35)에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1694년(숙종 20) 구연서원으로 명명되었는데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 등이 배향되어 있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1740년(영조 16)에 세워졌다. 관수(觀水)는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등장하는 문구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흘러간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며 물의 속성을 강조한 글이다. 군자의 학문은 웅덩이를 채우는 물과 같아서 한 웅덩이를 가득 채운 후 비로소 그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학문의 방법을 담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동천의 계곡에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물을 관조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 심오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모양의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주암 위에는 오목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장주갑(藏酒岬)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막걸리 한 말이 들어가는데 일정한 때에 시험을 보아 합격한 제자들만이 장주갑에 부어놓은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수승대는 옛날에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수승대가 위치한 이 지역은 원래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백제 말, 신라가 백제 사신들을 환송할 때 그들을 슬프게 돌려보냈다고 해서 수송대라고 했다. 그러다가 퇴계 이황이 이곳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수송’이라는 이름을 ‘수승’으로 바꾸어 명명한 후로 오늘날까지 수승대로 불리고 있다. 퇴계는 이름을 바꾸면서 수승대에 대한 〈명명시(命名詩)〉를 남긴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하노니
搜勝名新換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逢春景益佳
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
遠林花欲動
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陰壑雪猶埋
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
未寓搜尋眼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惟增想像懷
언젠가 한 동이 술을 가지고
他年一樽酒
수승의 절경을 만끽하리라
巨筆寫雲崖
글 : 김학범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거창 수승대 – 찾을 때는 들뜨고 떠날 때는 시름겹다
한국조경신문 기사 승인일 : 2023.02.06.
온형근 박사(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해거불여강거(海居不如江居), 강거불여계거(江居不如溪居)
살만한 곳의 선호도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거뜬하게 서술한다.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계곡에서 사는 것만 못하다.”라고. ‘거창 수승대(搜勝臺)’가 위치한 위천(渭川)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길이다. 위천은 약 80리(32.89㎞)의 청량한 계곡 물길로 북상면의 ‘용암정(龍巖亭)’ 일대의 숲과 바위 사이를 흘러 위천면의 수승대에 이른다. 이어서 마리면의 ‘사락정(四樂亭)’을 돌아 거창읍의 ‘건계정(建溪亭)’ 천연 암반을 씻으며 동쪽으로 흘러들어 ‘합수(合水)’에 도달하고 합천댐을 채우고 낙동강 본류에 흘러든다.
위천의 상류 구간인 성천(星川)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내와 하얀 반석’의 계곡이라 여름이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 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 ‘위천’의 고을인 원학동(猿鶴洞)을 “본래 동천복지라 칭하는 곳(素稱洞天福地)이고 맑은 내와 하얀 반석이 상하 오십리(淸川白石上下五十里)에 걸쳐 있다”고 하였다. 이런 ‘청천백석’의 으뜸가는 명승지가 수승대 주변의 경관이다. 이규경의 ‘낙토가작토구변증설(樂土可作菟裘辨證設)’은 60여 곳 정도의 낙토(樂土)를 소개한다. 남사고, 비기, 정감록, 택리지 등을 참고하여 선정하였다. 은일할 수 있는 험준한 산악과 강으로 접근성이 낮은 곳이다. 나라의 권세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심상의 공간이 아닌 실재의 장소이다. 수승대는 낙토인 이곳 원학동의 핵심 지역이다.
수승대는 거북 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인 구연암(龜淵岩)을 지칭하지만, 지금은 명승으로 지정된 자연유산이다. 이 일대의 구연서원, 관수루, 요수정, 함양재 등의 역사문화경관과 계곡을 아우른다.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이었던 ‘안의삼동(安義三洞)’은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일컫는다. 화림동에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심진동에 풍류암, 장수사, 용추폭포가, 원학동에 수승대가 위치한다. 수승대 일대는 1982년 국민관광휴양지, 1995년 거창국제연극제, 2008년 명승 지정으로 이어져 야외수영장, 썰매장, 야영장, 오토캠핑장, 야외무대, 스탠드 등의 이질적 경관과 혼재한다.
「구연서원지(龜淵書院誌)」와 이건창(1852~1898)의 「명미당집」에서 찾은 수승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安義之龜淵洞 山水之勝甲于嶠嶺中 有一巖狀如伏龜而臨水 上可座百有人 數十株老松成蓋 本羅濟使价相送之所 名曰愁送臺(구연서원 중건기) : 안의 구연동은 산수의 승경이 영남 최고이다. 물에 거북이가 엎드린 모양의 바위 위에 백여 명이 앉을 만하고, 수십 주의 노송이 덮고 있다. 본래 신라와 백제의 사신이 송별하던 곳으로 이름을 ‘수송대’라 불렀다.
臺舊名愁送 不知其所自 或云當新羅百濟時 兩國之使 相送于此 輒不勝其愁 故以稱.[「수승대기」「명미당집」, 한국고전종합DB] : 대의 옛 이름은 신라와 백제 사신이 서로 보내며 그 시름을 번번이 이기지 못하여 근심을 보낸다는 ‘수송(愁送)’이라 칭하였다.
그러니 지금의 수승대라 불리기 이전에 수송대(愁送臺)로 호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별의 정서를 만남의 기쁨으로 바꾼 수승대
근심으로 이별의 정서를 다스리는 ‘수송대(愁送臺)’는 퇴계 이황(1501~1570)으로 인하여 들떠서 찾아가는 빼어난 승경인 ‘수승대(搜勝臺)’로 거듭난다. 퇴계는 장인이 머물던 마을의 정자를 ‘사락정’으로 작명하고, 맞이하고 보낸다는 ‘영송(迎送)’이라는 마을 이름을 빼어난 경치를 맞이한다는 ‘영승(迎勝)’으로 제안한다. 이 마을에서 장인 회갑연 동안 머무는데 구연서원과 요수정을 경영하던 황산마을 신권(1501~1573)의 초청을 받는다. 그러나 급한 일로 방문하지 못한다. 최고의 풍광을 지닌 ‘수송대’의 명칭을 ‘수승대’로 부르자고 넌지시 운을 떼며 오언시를 읊는다.
搜勝名新煥(수승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봄을 맞은 경치 더욱 좋으리)
遠林花欲動(먼 숲 꽃망울은 터지려 하고)
陰壑雪猶埋(그늘진 골짜기는 눈에 묻혔네)
未寓搜尋眼(좋은 경치와 사람 찾았으나 만나지 못해)
唯增想像懷(마음에 회포만 더해 가네)
他年一尊酒(다음에 한 동이 술로)
巨筆寫雲崖(큰 붓으로 구름벼랑에 시 쓰려네).
-‘기제수승대(寄題搜勝臺)’, 이황
퇴계의 ‘수승대를 쓰다’라는 오언시이다. 슬픔의 정서를 벅찬 감흥의 정서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예로부터 어딜 나선다는 것은 시 한 줄 읊을만한 승경을 찾아나서는 일로 비견된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더불어 말을 나눌 수 없듯이(不學詩 無以言)” 시를 모르면 사리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감정과 사상을 아름답고 부드럽게 끄집어내는 데에 풍류 명승만한 곳이 또 있으랴.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들렸을 선유(仙遊) 풍광을 퇴계는 스킵(skip)한다. ‘좋은 경치와 사람(尋眼)’을 찾았으나 아직 나누지 못해 회포는 쌓이겠지만 다음에 한 동이 술과 큰 붓으로 풍류청운(風流淸韻)을 나누자 약조한다. 예나 지금이나 ‘다음에’라는 기약 없는 약속처럼 맥빠지는 게 없건만, 동갑내기 신권의 화답시는 고마움과 정중함으로 가득하다.
林壑皆增采(숲골짜기는 온갖 풍채를 더하는데)
臺名肇錫佳(대의 이름을 아름답게 바로잡아 하사하네)
勝日樽前値(좋은 날 걸맞게 술동이 앞에 두고)
愁雲筆底埋(구름 같은 근심을 붓 끝에 묻네)
深荷珍重敎(보배같은 소중한 가르침 깊이 짊어지고)
(......)
-‘수승대봉화퇴계운(搜勝臺奉和退溪韻)’, 신권
요수(樂水) 신권의 ‘수승대 퇴계의 운에 화답하여’라는 오언시이다. 구구절절 긍정의 답글이다. 좋은 날 술 한 잔 나누자며, ‘수송’이라는 이름을 붓으로 묻고 귀중한 가르침 보배처럼 간직하겠다며 생각을 다진다. 퇴계의 시와 요수의 답시를 보고 갈계마을의 임훈(1500~1584)은 생각을 달리한다. 수송대(愁送臺)는 수송대일 뿐이라고 뒤튼다.
花滿江皐酒滿樽(강가에 꽃 가득하고 동이에 술도 가득한데)
遊人連袂謾粉紛(벗하자고 소맷자락 잡아도 어지럽게 뿌리치네)
春將暮處君將去(봄은 점점 저물고 그대도 장차 떠나니)
不獨愁春愁送君(봄을 보내는 근심만이 아니라 그대 보내는 시름도 있다네).
-‘해수송의이시제군(解愁送意以示諸君)’, 임훈
갈천(葛川) 임훈의 ‘수송의 뜻을 풀어서 그대들에게 보이다’라는 칠언시이다. 퇴계가 수승으로 개명한 것에 대하여 해명하는 시이다. 술동이 가득한 꽃피는 날을 노래한다. 그러나 셋째 행에서 ‘그대도 장차 떠나니’라는 ‘군장거(君將去)’의 팩트를 시전한다. 여기 살지 않고 떠날 사람이 이름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비아냥댄다. 종래의 이름인 수송을 고수한다. 봄을 보내는 걱정보다 그대 떠남이 근심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삶의 외로운 존재를 시름겨워하는 의경(意境)이 시의 깊이를 더한다.
퇴계 이후 수승대는 내로라하는 명사의 풍류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수승대에 와서 시 한 수 읊지 않고 어찌 청사에 이름 한 자 올리겠는가. 퇴계 이전의 수송대와 이후의 수승대는 생동감이 다르다. 영원한 현재를 살 듯 계속 시경(詩境)으로 재현된다. 지속과 지향은 차이와 반복의 속성을 지닌다. 매번 다른 시간에 살기에 다른 존재가 된다. 재현은 똑같을 수가 없다.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은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감을 드러난다. 근래에 ‘성락원’의 역사성 논란으로 전국 명승 별서정원의 고증을 위한 전수 조사로 문화재청은 수승대의 명칭을 삼국시대의 명칭인 수송대로 변경하는 공고(2021.09.02.)를 내었으나 거창군이 반대하였고, 이후(2021.11.10.) 문화재청은 ‘수승대’ 현행 명칭을 유지하기로 밝혔다.
맑은 내와 흰 반석에 새긴 청천백석(淸川白石)의 흥취
수승대 거북바위는 높이가 10미터에 이른다. 고소공포 증세가 있는 나같은 사람은 생각만으로 그 느낌 안다. 그래도 올라갈 수만 있다면 감내하고 신선의 풍광을 훔쳐볼 생각이다. 남쪽 암벽과 북쪽 암벽에 빼곡하게 바위글씨를 새겼는데, ‘수송대’와 ‘수승대’를 나란히 새긴 곳은 북쪽 암벽이다. 그 밑에 퇴계가 대의 이름을 지었다는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와 갈천 임훈이 지팡이 짚고 신발을 끌던 곳이라는 ‘갈천장구지소(葛川杖屨之所)’를 세로 제목으로 새긴 후, 앞의 5언시 ‘기제수승대’ 40자와 갈천의 7언시 ‘해수송의이시제군’ 28자를 비교할 수 있게 한 곳에 새겨 후인들이 대의 이름의 변천사를 증좌하도록 한 배려는 가히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거북바위에 시문을 처음 새긴 연도는 1543년 요수 신권의 시 2편이 1~2번째 순서로 새겨지기 시작하여 1743년, 1810년, 1813년, 1865년, 1906년, 1900년대 중반, 1966년으로 이어진다. 위의 ‘기제수승대’와 ‘해수송의이시제군’은 1810년에 10~11번의 순서로 새겨졌고, 마지막 27번째 시문은 괴당 신대성의 ‘개축시’이다. 북쪽 암벽 19수, 남쪽 암벽 8수로 모두 27수의 시문을 새겼다. 423년의 시공을 넘나드는 바위글씨가 새겨진 셈이다. 각자(刻字)한 시기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특정 시대에 유행처럼 바위글씨 새기는 행위를 즐겼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위에 소개한 시문의 순서대로 위치를 그림에서 보면, 이황의 시는 (10), 신권의 시는 (2), 임훈의 시는 (11)에 있다. 이를 제대로 읽으려면 거북바위에 투명한 ‘구암잔도’라도 만들어 둘레길을 내야 할 참이다. 계절마다 최고의 날에 설치와 철수가 쉬운 ‘유동형 투명잔도’를 도입할 만하다고 제안한다.
수승대 거북바위 주변의 물길은 바위에 부딪치며 맴돌면서 깊은 연못처럼 소를 이룬다. 연못처럼 짙은 물색을 지니는 특징을 살려 구연암(龜淵岩)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수승대 너럭바위는 연못 강역을 충분히 띄워 위치한다. 너럭바위에 앉아 거북바위를 쳐다 볼만한 감상 거리를 확보하였으니 천혜의 안배인 것이다. 이 너럭바위가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말한 ‘원학동 낙토’의 ‘맑은 내 하얀 반석’을 대표하는 승경이다.
수승대 너럭바위 / 온형근
단순히 넓어서가 아니라
태생이 끝없이 펼쳐지는 바위
그 틈으로 갈라져 가는 물줄기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었다는 세필짐洗筆㴨
그렇다면 벼루를 갈던 바위라는
연반석硯磐石도 틀림없이 이 근처
그렇다 그래서 암반에 새긴 흥취를
그 신명을 말릴 수가 없는데
붓 가는 대로 글 쓰다 산수의 다정을 흔들어
수승대 한쪽에 오목한 웅덩이에 묻은
장주갑藏酒岬 한 말의 막걸리는 누가 얻어먹을까
마신 티를 내지 않으니 들여다보는 저으기 큰 관심
시경詩境 절로 피어오르는 수승대 너럭바위에 서성인다.
-2022.11.14.
하얀 반석 위로 명징한 물이 흐르거나 닿지 못하여 드러난 은백색 화강암은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 거북바위를 쳐다보면 절로 시경이 일어난다. 반쯤 위로 드러낸 너럭바위에 벼루를 갈던 연반석(硯磐石)이 있다. 좁게 갈라진 바위 틈새로 흐르는 물에 붓을 씻는다. 그렇게 사용하라고 친절하게 세필짐(洗筆㴨)이라 바위글씨를 새겼다. 도저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풍류의 공간이다. 거기다 오늘의 장원시에게 내 줄 한 말의 술도 보관할 장주갑(藏酒岬)에 준바하였다.
내를 건너 양쪽의 관수루와 요수정에서 흐믓한 미소 머금고 다소곳이 손짓한다. 거북바위에 오른다. 실제로 백여 명이 앉을 만한지, 내려보는 풍광은 머금던 시를 절로 풀어낼지를 가늠한다. 시를 읊으며 내려와 섬솔과 수승대 사이에 있는 영귀정 바위에 걸터앉는다. 관수루 마주보고 왼쪽 바위의 욕기암과 오른쪽 풍우대는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단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는 은유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욕기풍우영귀(浴沂風雩詠歸)의 의미를 속깊은 가슴에 새긴다.
경남 거창 수승대…텅 빈 하늘 가로지르는 길이 240m 출렁다리…발 아래는 '한낮 은하수'
영남일보 기사 입력일 : 2023-02-03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깨끗한 마을이다. 겨울이라 조용한 마을이기도 하다. 지금은 식당과 펜션과 민박집과 편의점 등등 갖은 편의시설이 있는 관광지이나 간판 없는 돌담집들이 있고, 말끔히 정돈된 집터가 있고, 가지런히 가꾸어진 텃밭이 있고, 또 재(齋)가 있고, 정(亭)이 있고, 서원이 있으니 오래전부터 이 땅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온 마을일 게다. 마을 앞에는 화강암 흰 바위들이 곱게 늙어 계곡을 이룬다. 계곡의 볕받이에는 차가운 냇물이 분분히 흘러 얕은 웅덩이가 되었다가 깊은 소가 되었다가 하는데, 바위틈 사이마다 흩뿌려진 응달에는 얼어붙은 계류와 쌓인 눈이 억만 개의 조각으로 빛나 골짜기는 적연히 한낮의 은하수다.
덕유산 자락의 남쪽 산줄기 둘러싸인 골짝
백제서 신라 가는 사신 송별했다 해 '수송대'
퇴계 '근심 잊을 만큼 빼어나' 수승대로 불러
◆은하리 또는 어나리의 수승대
골짜기는 덕유산 자락의 남쪽에, 호음산에서 부종산으로 이어지는 동쪽 산줄기와 매봉에서 성령산으로 이어지는 서쪽 산줄기 사이에 넉넉히 펼쳐져 있다. 골짜기의 마을은 거창 위천면 황산리에 속해 있는데 냇물과 냇가의 흰 돌이 은하수 같아 예부터 은하리(銀洞里)라 했다. 서원 아래의 마을이라 어나리(원하리·院下里)라고도 했고, 물고기를 잡는 곳이라 어천(漁川)이라고도 불렀다. 계곡에는 평평하고 아주 넓은 너럭바위가 있다. 삼국이 대립하던 옛날, 이 바위에서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송별했다 하여 '수송대(愁送臺)'라 했다 한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는 뜻이다.
마을 안 은하리길을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황산리는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거창신씨 집성촌인데 중종 때 선비인 요수(樂水) 신권(愼權)은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 골짜기에 은거해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널찍한 계곡에 가로놓인 주홍빛 현수교를 지나 조금 오르면 계류 가운데 작은 섬처럼 자리한 솔숲 너머로 수송대 너럭바위가 환하다. 신권은 너럭바위 앞 큰 거북 모양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 지었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다. 아래로는 바윗돌을 듬성듬성 놓아 흐르는 물을 막고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년인 1540년 즈음에는 암구대 옆 물가에 '구연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마을을 아예 '구연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년 뒤에는 냇물 건너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따 '요수정'이라는 편액을 했다. '요수'란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논어의 '지자요수(知者樂水)'에서 따온 것이다.
그즈음 신권은 퇴계 이황으로부터 찾아오겠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러나 한양으로 급히 떠나야 했던 퇴계는 걸음 대신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퇴계는 이 아름다운 골짜기에 '수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근심을 잊을 만큼 빼어나다'는 의미다. 1543년 이른 봄날이었다고 한다. 시는 힘이 세고, 퇴계라는 이름은 더욱 힘이 세다. 그 이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은하리 계곡 전체를 이르는 이름이 되었다.
수승대 계곡 혹은 수승대 국민관광지는 겨울철 눈썰매 타고 여름철 물놀이 즐기는 피서지로 유명하다. 신권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구연재는 1694년에 '구연서원'이 되었다. 서원 입구에 '관수루(觀水樓)'라 적힌 문루가 장대히 섰다. 물을 보는 누각, 관수루. 맹자는 물을 보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 관수루에서 수승대를 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승대에 올라 맑은 웃음으로 서성이다 훌쩍 떠나간다.
◆은하수 건너 다시 수승대
구연서원을 지나면 야자매트가 깔린 현대의 길이 계곡을 따라 오른다. 고개를 들면 이마 위 높고 높은 허공에 출렁다리가 걸려 있다. 매트 길을 지나 128개의 계단이 있는 데크 산책로를 시나브로 오르면 도로다. 길을 건너면 부종산을 오르는 계단이 시작된다. 단이 높은 계단을 202개 정도 오르면 출렁다리의 동단이다. 숫자에 자신은 없다. 헉헉대느라.
출렁다리는 지난해 10월에 완공된 것으로 지상 50m 높이에 지주 없이 걸린 현수교다. 길이는 240m로 제법 길다. 절지동물 같은 다리다. 지네의 등을 타고 꿀렁꿀렁 전진하는 것 같다. 다리 가운데에서 수승대 골짜기를 내다본다. 너럭바위도 거북바위도 요원하여 희미하고, 정자도 서원도 식당도 민박도 숲으로 은거했다. 먼 산은 먼 것을 보고, 물길은 은하수처럼 흐르고, 37번 국도는 제 갈 길을 간다.
출렁다리의 서단은 성령산이다. 산정으로 향하는 등산길도 있고 계곡으로 곧장 내려가는 계단 길도 있다. 단의 높이가 편안한 276개의 계단을 내려온다. 이 숫자에도 자신은 없다. 두리번대느라. 계단을 내려오면 계곡 옆으로 숲길이 좁게 이어진다. 안전을 위해 박아 놓은 두툼한 나무 말뚝에 이끼가 앉았다. 햇빛이 빗살무늬로 내려앉은 자리에는 이끼꽃이 피었다. 간간이 새가 울었고 물소리는 가까웠다가 멀어졌다. 거창신씨의 무덤 두 기를 지나면 곧 요수정의 옆모습이 솔숲 사이로 보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환한 얼굴의 거북바위가 있다. 둘은 사이가 좋다. 요수정 뒤편에는 구연재를 지은 이듬해인 1541년에 요수 선생이 직접 지었다는 담장 높은 '함양재(涵養齋)'가 있고, 그 아래에 원각사 절집이 있다. 원각사는 60년대 지해스님이 수승대 골짜기 토굴에서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룬다 하여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요수정에서 구연교라 새겨진 통통한 무지개다리를 건너 너럭바위에 오른다. 희디희고 넓디넓다. 그 너른 너럭바위의 단 차에 기대어 좁고 곧은 물길이 나 있다. 물은 당당하게 흘러 거북바위 앞으로 거침없이 쏟아졌다가 구연으로 잠긴다. 바위에 '세필짐(洗筆)'이라는 각자가 있다. '흐르는 물에 붓을 씻는다'는 말이다. 그 곁에는 물방울 모양의 얕은 웅덩이가 있고 그 위에 '연반석(硯磐石)'이라는 이름이 단아한 필체로 새겨져 있다. '먹 가는 돌'이란 뜻이다. 연반석에 먹 갈아 글 쓰고 세필짐에서 붓을 씻었다는 얘기다. 동그란 바위 구멍에는 막걸리 한 말을 넣어 놓고 장주갑(藏酒岬)이라 부르면서 글이 좋을 때마다 꿀꺽꿀꺽 막걸리를 들이켰다지. 언젠가 막걸리 한 말 부려 놓아도 될 날이 오려나? 어이쿠, 오토바이 탄 사람이 달달달 서원 앞을 지나며 내다본다. 핸들 앞에는 손글씨로 '순찰'이라 적은 골판지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다. 잘 걸었고, 잘 쉬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거창IC로 나와 군청, 법원 쪽으로 우회전해 직진, 중앙교사거리에서 좌회전해 3번 국도를 타고 진주, 함양, 수승대 방면으로 간다. 말흘교차로에서 37번국도 무주, 위천 쪽으로 빠져나가 마리삼거리에서 오른쪽 무주, 설천 방면으로 가면 된다. 수승대 입장료는 무료, 주차료는 3시간 이하 무료다. 출렁다리는 동절기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50분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시설물 점검을 위해 휴장한다. 출렁다리는 수승대에서 출발해 갈 수 있고, 다리 바로 아래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수승대에서 출발해 계곡 동편 길을 따라 올라간 뒤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 서편으로 내려오는 길을 추천한다.
[성령산&수승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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