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있은 두바이월드컵.
우리 팬들의 시선은 ‘트리플나인’이 출전한 1경주 「고돌핀마일」에 집중됐지만
이날 9개 경주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두바이 월드컵」이었다.
최고의 흥행카드이자 세계 더트 챔피언 ‘애러게이트(Arrogate)’가 출전했으니 우승은 당연한 결말이겠다.
이로써 ‘애러게이트’는 지난 연말 「브리더즈컵 클래식」부터 올 1월 「페가수스 월드컵」,
그리고 이번 「두바이 월드컵」으로 이어진 머니게임에서 절대승자로 올라섰다.
이 대회들에 걸린 상금만 2,800만 달러였으니
단 3경기만에 ‘캘리포니아크롬(California Chrom)’의 수득상금 기록을 갈아치운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언브라이들즈송(Unbridled's Song)’의 수말로 킨랜드 이얼링에서 56만 달러에 낙찰된 이력을 보면
애초에 기대치가 컸던 유망주인 것은 분명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데뷔가 늦었고 만 3세가 된 작년 4월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45,000달러 1200m 미승리마 경주에서 3등을 해 일단은 기대에 못 미쳤다.
하지만 2전 째인 1700m 미승리마 경주를 맞아서는 선행에 나서 4마신 차 여유 있는 승리를 거뒀다.
동년배들이 2,400m 「벨몬트 스테익스」를 치를 무렵
‘애러게이트’는 산타 아니타에서 생애 첫 승을 올린 것이다.
이어 곧바로 6월 말과 8월 초 2-3승 째를 수확한 ‘애러게이트’는 3주만에,
정말 뜬금없이 제4의 3관경주라 일컬어지는 「트래버스 스테익스(GⅠ)」를 선택한다.
4만∼6만 달러 클레이밍을 오가다 125만 달러 G1 경주에 도전한 것에 의아한 시선이 모아진 것은 당연했다.
2000m로 거리를 늘려 도전한 ‘애러게이트’는 1번 게이트 이점을 앞세워 선행을 장악했고
마지막엔 거리를 더 벌려 무려 13마신 차 대승을 거둔다.
프리크니스와 벨몬트의 승자 ‘이그재저레이터’‘크리에이터’,
시즌 내내 꾸준했던 ‘건러너’‘데스틴’ 등이 모두 출전한 것을 고려하면
편성이점이라고 폄 하기는 어려운 결과였다.
‘애러게이트’의 거침없고 경악스러운 행보는 11월 「브리더즈컵 클래식(GⅠ)」에서 마침내 화룡점정 했다.
당대 최고의 챔피언인 ‘캘리포니아크롬’과의 맞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1년여의 부상 공백 후 컴백해 7전 전승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며
정점에 올라있던 ‘캘리포니아크롬’과 신성 ‘애러게이트’의 맞대결은
3관마 ‘아메리칸패로’의 은퇴경기였던 2015년과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선행에 나선 ‘캘리포니아크롬’과 추격하던 ‘애러게이트’는 완벽하게 둘 만의 경기로 만들었고
접전 끝에 ‘애러게이트’가 반 마신 차 판정승을 거뒀다.
도장 깨기의 완결판이었다.
올 1월, 세계 최대 상금인 1,200만 달러의 「페가수스 월드컵」에서는
초대 챔피언 자리를 놓고 두 마리가 다시 맞붙었다.
‘애러게이트’가 한 차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여전히 무게는 양분됐고
‘캘리포니아크롬’이 절치부심 설욕할 것인지에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패배 후유증이었는지 ‘캘리포니아크롬’은 경주 내내 무기력했고 완벽하게 KO패 당했다.
상대전적 2전 2패를 안고도 이클립스 어워즈의 연도대표마로 선정된 것이 머쓱했을 정도다.
마땅한 상대가 없었던 이번 「두바이월드컵」에서 ‘애러게이트’가 우승하는 그림은 당연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변수가 발생했다.
선행까지 예상됐던 ‘애러게이트’가 생전 없던 출발난조를 보였고
설상가상 옆 말과 충돌하며 맨뒤로 처진 것이다.
조교사 밥 배퍼트가 무사히 경주를 마칠 수 있기만 바랐다고
우승 인터뷰에서 밝혔을 만큼 가슴 철렁한 순간이었다.
헌데 이 때 드라마가 나왔다.
건너편 직선주로부터 성큼성큼 따라붙어 중위그룹까지 올라오더니
마지막 코너 2개를 돌면서 상대의 주폭도 무시한 채 단숨에 선두권으로 올라선 것이다.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2000m 내내 펜스에서 4-5m 떨어져 운영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 주행거리는 출전마 가운데 가장 길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결승선 전방 200m에서 선두를 굳혔고
2분02초159라는 괜찮은 기록으로 2마신 여 차 우승을 차지했다.
경험 많은 상대들이 13마리나 포진해 있었고
사고에 가까운 돌발변수까지 맞닥뜨린 상황에서 이런 만화 같은 스토리라니.
명마 보존법칙이라도 있는 건지,
2015년에 무결점한 3관마 ‘아메리칸패로’를 배출했던 북미 경마계는 작년 극심한 3세마 기근에 시달렸다.
3관경주 승자가 제 각각이었던 게 그 증거다.
그 순간 ‘애러게이트’가 혜성처럼 튀어나왔고
최고 권위의 대회들에서 최고의 상대들을 차곡차곡 잠재우며 역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매 경주가 어찌나 비현실적인지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