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을 잔뜩 여며야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날씨다. 강남역 네거리를 막 지나는데 철탑이 보였다. ‘아 맞다, 저 위에 사람이 있지.’ 삼성에서 처음 노조를 만든 김용희 씨가 지난여름부터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그는 한 평도 안 되는 데서 웅크린 채 100일 넘게 버텨왔다. 오죽하면 올라갔을까.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오늘도 추운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많았다.
거대한 권력과 자본이라는 벽 앞에서 한 개인이 그들의 부당함을 알리기란 대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다. 하지만 그 억울한 일을 나만 겪고 끝날 문제가 아님을 알기에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불 보듯 뻔한 데도 곡기를 끊는다. “단식 농성은 사회 제도적, 법적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차별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투쟁의 현장으로 삼는 행위”(이보라, 「단식 농성자의 건강권」에서)라는 말에 백번 공감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어느 새 병원 앞에 이르렀다. 서울 면목동에 위치한 녹색병원은 몇 해 전부터 인권치유센터를 설립하고 소외된 사람 특히 인권침해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진료하고 있다. 이 병원 내과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이보라(40) 씨, 그는 우리나라에서 단식 농성 환자를 가장 많이 진료한 의사다.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진료실에서 병원 로비까지 황급히 달려온 듯 발갛게 상기된 그가 기자 일행을 맞았다.
“아직도 많죠.” 단식 농성이 조금 줄지 않았을까 물어보니 기대와는 다른 말이 돌아왔다. “서울이나 수도권까지는 저희 병원으로 오시면 되지만 지방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다고 들었어요.” 단식 농성을 하다 상태가 나빠졌을 때 내원해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기 어렵단다. 그 말은 단식 농성자를 진료한 경험이 풍부한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뜻도 된다.
마음이 답답해왔지만 한편으론 단식 농성자들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진료가 이뤄질까 싶었다. “자기의지로 단식을 결정한 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단식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자기 사정을 얘기해봤자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불신감이 커지겠죠.” 사실 이보라 씨도 농성 현장을 찾을 때마다 느꼈던 어려움이었다. 의사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환자와 신뢰 관계 즉, 라포를 형성하기 어렵고 진료는 더뎌지고. 이러다 환자가 쓰러지면 어떡하나, 등에 땀이 솟고 발을 동동 구르던 때도 많다. 주로 노사 협상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진 농성장이 많았는데 처음엔 그들이 주고받는 용어조차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모르면 무슨 말인지 알 때까지 계속 물었어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지금도 현장에 가면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일쑤라고 이보라 씨는 덧붙인다.
인터뷰를 시작한지 10분이나 되었을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오늘 오후 녹색병원에 입원하여 진료 받을 수 있는지 문의하는 전화다. 내원 환자는 도로공사 톨게이트 수납원들이었다. 사측의 말도 안 되는 고용 처분에 지난 6월 수납원들은 톨게이트 옥상에 올라 천막을 쳤다. 이보라 씨도 뜨거운 여름 토요일마다 그들을 만났다. “약 처방을 처음에 1-2주치만 해갔어요. 이 정도면 되겠지 한 거죠.” 그러나 40일 넘게 도로공사 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경북 김천 본사로 다시 점거 투쟁이 진행되기에 이르렀고 옥상에 있던 마지막 여섯 명이 병원에 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