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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상과 표현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원
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33)
류양선(柳陽善)
1. 자리행(自利行)
지난번 「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32)」에서는 만해의 시 「오셔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화엄경의 사상을 7언(言) 30구(句) 210자(字)로 축약해서 표현한 의상 대사의 「법성게(法性偈)」를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의상대사는 법성게를 제1구에서 제18구까지의 자리행(自利行)과 제19구에서 제22구까지의 이타행(利他行), 그리고 제23구에서 제30구까지의 변수행자방편급득이익(辨修行者方便及得利益)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 여기서 자리행(自利行)은 수행자가 스스로 진리(깨달음)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고, 이타행(利他行)은 그러면서 동시에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는 것이며, 변수행자방편급득이익(辨修行者方便及得利益)은 수행자가 그런 길로 나아감에 필요한 방편과 그로써 얻는 이익에 대해 설명하는 것인 바, 이 중에서 제19구에서 제22구까지의 이타행(利他行) 4구(句), 즉 “능입해인삼매중(能入海印三昧中) - 능히 해인삼매에 들어가,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 뜻대로 불가사의를 무성히 나타내니,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 중생을 위한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여, 중생수기득이익(重生隨器得利益) - 중생은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네.” 하는 부분과 관련하여, 그 중에서도 특히 “능입해인삼매중(能入海印三昧中) - 능히 해인삼매에 들어가”라는 제19구에 방점을 두고, 그에 따라 만해의 시 「오셔요」를 이해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해인삼매와도 같은 깊은 선정에 들어 ‘당신’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모습을, 달리 말해 해결하기 어려운 큰 고통에 처한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문제로, 어떤 사람은 민족적 사회적인 문제로, 또 어떤 사람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 자아인 ‘나’는 연애시의 화법으로, 저항시의 화법으로, 또 선시(불교시)의 화법으로 ‘당신’을 초대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이 시는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처한 민족의 처참한 현실을, 그 현실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족구성원들을, 그들의 슬픈 마음들을 남김없이 관찰하고 그들에게 보배로운 비를 내려 위로하며 사랑으로 껴안고 있습니다.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 점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시인은 이런 방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민족구성원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설법의 힘은 다름 아니라 깊고 깊은 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이는 만해의 시를 논의할 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에게 오라, 나에게 와서 사랑을 느끼고 진리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해인삼매와도 같은 깊은 선정에 들어, 바다에 선명히 비치는 삼라만상을, 중생세간의 모습을, 민족의 처참한 현실을, 그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의 마음을 모두 관찰하고, 그들에게 보배로운 비를 내려 크게 위로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이 시 내지는 시집 『님의 침묵(沈黙)』이 바로 그 보배로운 비, 즉 간절한 마음으로 깨달음의 세계에 초대하는, 시인의 진심 어린 설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지난번의 이야기가 만해의 시 「오셔요」를 법성게의 이타행(利他行)과 관련하여 해석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법성게의 자리행(自利行)과 관련하여 이 시를 다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의상 대사의 법성게에서 자리행 18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2)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 제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네.
(3)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 이름도 모양도 없이 일체가 끊어져
(4)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 증지로 아는 것이지 다른 경지 아니네.
(5)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 진성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하니
(6)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네.
(7)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어
(8)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로세,
(9)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하나의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10)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 모든 티끌마다 역시 그러하네.
(11)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 한량없는 세월이 곧 한 찰나의 생각이고
(12)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한 찰나의 생각이 곧 한량없는 세월일세.
(13)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 구세와 십세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14)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 뒤섞이지 아니하여 따로 따로 이루네.
(15)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 처음 발심할 때가 곧 바른 깨달음이고
(16)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 생사와 열반이 늘 함께 화합하네.
(17)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이와 사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
(18) 십불보현대인경(十彿普賢大人境) - 십불 보현 대인의 경지로세.
지난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위의 자리행(自利行) 18구(句)는 제1~4구의 현시증분(顯示證分)과 제5~18구의 현연기분(顯緣起分)으로 나누어집니다. 현시증분(顯示證分)이란 증분(證分)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지만, 이런 제목과는 달리 증분(證分)은 드러낼 수가 없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일까요? 증분을 드러낼 보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외에는 달리 증분을 드러내 보일 방법이 없다는 뜻일까요?
먼저 제1구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라고 말합니다. 법성(法性)이란 온갖 법의 근본 바탕, 그러니까 온 우주에 나타나는 무수히 많은 현상들의 근원적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근본 바탕 즉 근원적 성품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본성(本性)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 제1구를 “법(法)과 성(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번역하든, 그런 까닭에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 제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네.”라고 말하는 제2구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세상이 제아무리 시끄러워도 실은 본래로 고요한 것입니다. 태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넘친다 해도 만물의 근본 바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여여하게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기후위기가 닥치고 전쟁이 일어나도, 진여자성(眞如自性)은 오롯이 온 우주에 가득 차서 미세한 먼지 하나하나에까지 온전히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과 사건들에 속속들이 사무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은 온갖 유위법이 뚝! 끊어진 절대 고요의 자리입니다. 어떤 말과 글로도, 어떤 손짓 몸짓으로도 법성(法性)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3구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 이름도 모양도 없이 일체가 끊어져”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금강경(金剛經)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나오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 모든 유위법(생멸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라는 제4구게(第四句偈)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그렇게 보아야만 언어와 형상이 모두 끊어진 그런 자리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즉 언어와 형상이라는 방편을 빌릴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아 아는 도리밖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제4구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 증지로 아는 것이지 다른 경지 아니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증(自證)으로 아는 것, 온 맘과 온 몸을 던져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아는 것일 뿐, 누가 가르쳐 준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봐야 갈등만 더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의상 대사는 무엇 때문에 그 방대한 화엄경을 축약하여 7언 30구 210자의 법성게를 읊어낸 것일까요? 다름 아니라, 법성게 제29구에서 말하듯,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중생교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니, 현시증분(顯示證分)에 이어지는 현연기분(顯緣起分)이 바로 그런 사정을 말해줍니다. 현연기분(顯緣起分)에서 의상 대사는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간단명료하게 연기법을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실로 불교의 핵심적 원리이니, 불교의 모든 사상체계는 다름 아닌 연기법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따라서 현연기분(顯緣起分)은 현시증분(顯示證分)에 상응하는 불교적 진리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의상 대사는 현연기분을 ‘연기의 체(體)’(제5~6구), ‘다라니의 이용(理用)’(제7~8구), ‘사법(事法)’(제9~10구), ‘세시(世時)’(제11~14구), ‘계위(階位)’(제15~16구), ‘총론(總論)’(제17~18구)의 여섯 부분으로 과문(科文)하고 있습니다.1) 그러면 이제, 위의 여섯 가지 과문을 염두에 두고, 거칠게나마 현연기분(顯緣起分)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의상 대사는 현연기분 첫머리인 제5,6구에서,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 진성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하니,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네.”라고 하여, 연기의 체(體)를 진성(眞性)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성(眞性)’이란 앞의 현시증분(顯示證分)에서 말한 ‘법성(法性)’과 상응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법성(法性)’과 ‘진성(眞性)’은 결국에는 같은 뜻의 용어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법성’이 자증으로 얻은 체험적 진리라고 한다면, ‘진성’은 수행자가 여러 가지 범행(梵行)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자리라는, 그런 함의(含意)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진성(眞性)’은 화엄경의 중요사상 중의 하나인 유심사상(唯心思想)을 통해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화엄경사상으로는 법신불사상(法身佛思想), 보살사상(菩薩思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연기사상(緣起思想), 정토사상(淨土思想)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는 바,2) 이 중 유심사상으로 미루어 본다면, ‘진성(眞性)’은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근원적 성품을 환히 살펴봄으로써, 마침내 이 세상과 온 우주의 온갖 변화무쌍한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를 머금고 있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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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미해주, 『해주스님의 법성게 강설』(조계종출판사, 2022), p.127
2) 이도업, 『화엄경사상연구(華嚴經思想硏究)』(민족사, 1998), p.27 이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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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 진성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하니,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네.”라는 제5~6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표현되는 유심사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 바탕인 성심(性心 - 자성청정심)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 그때그때의 연(緣)을 따라 온갖 식심(識心)으로 나타나는 그런 마음의 작용에 대한 언급이지요. 그렇게 이루어진 식심이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 다름 아닌 이 세상의 갖가지 현상과 사건들이며, 우주 안의 많은 생명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많은 사물들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우주 전체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진성(眞性)’이란 무명(無明)에 훈습되어 온갖 현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진여(眞如)라고 하겠는데, 유심사상으로 보면 그 진여가 바로 누구에게나 간직되어 있는 여래장이요 자성청정심인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표현되는 유심사상과 관련하여 원효 대사의 깨달음에 대한 유명한 설화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난번에 의상 대사가 원효 대사와 함께 고구려 땅을 거쳐 당나라로 유학길을 가던 중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지만, 그 뒤 의상 대사는 서해를 건너는 배를 따고 당나라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의상 대사는 이 두 번째 유학길도 원효 대사와 함께 출발합니다. 그러나 원효 대사는 도중에 깨달음을 얻고 신라로 돌아오고, 의상 대사는 홀로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중국에 가고자 하여 바닷길 관문인 당주(唐州)에 가서 배를 타려 했다. 그런데 도중에 억센 비를 만나 길가의 흙구덩이 사이에 몸을 숨기고 비바람을 피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몸을 피한 곳은 바로 낡은 무덤의 해골 곁이었다. 아직 비도 멎지 않고 땅은 질척거려 갈 수 없어서 다시 무덤 안에서 머물게 되었다. 원효는 밤중이 되자 귀신 같은 것을 느끼고 탄식했다. 흙구덩이라 생각하니 편안했는데 귀신 집이라 생각하니 탈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생하면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구덩이와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고, 또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뿐이니(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겠냐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원효는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갔고, 의상은 끝내 중국에 가겠다고 하여 마침내 상선을 타고 중국에 이르렀다.3)
위의 설화는 “원효의 기신론 사상에 대한 위대성이 평가된 뒤에 만들어진 설화”4)로 생각된다고 합니다. 원효 대사의 대승기신론 사상에 대해서는 전에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일심이문(一心二門)을 말하는 대승기신론의 사상 역시 화엄경의 유심사상과 상통하는 대승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위의 인용에 보이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은 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뜻이니까요. 위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 역시 연기의 체(體)를 설명하고 있는 법성게 제5~6구와 같은 맥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현연기분(顯緣起分)의 서론에 해당하는 제5~6구, 즉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 진성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하니,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네.”라는 대목을 화엄경의 중요사상 중의 하나인 유심사상으로 살펴본 셈입니다. 의상 대사는 제5~6구에서 이렇게 말한 다음, 연기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 즉 시공간적인 법계연기에 대해, 이어지는 게송으로 요점 정리하듯 읊어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만해의 시 「오셔요」를, 특히 이 시의 제4연을 현연기분(顯緣起分)의 결론에 해당하는 법성게 제17~18구와 관련지어, 그리고 본론에 해당하는 법계연기와 관련지어 이야기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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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병삼, 『의상』(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3), p.60에서 재인용.
4) 위 책,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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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법성게 제17~18구는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이와 사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 십불보현대인경(十彿普賢大人境) - 십불 보현 대인의 경지로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인 즉,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곧 정각을 이룬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과 대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니 말입니다. (여기서 십불(十佛)이란 무착불(無着佛), 원불(願佛), 업보불(業報佛), 지불(持佛), 열반불(涅槃佛), 법계불(法界佛), 심불(心佛), 삼매불(三昧佛), 성불(性佛), 여의불(如意佛)이라고5) 합니다.)
그렇다면, 법계연기의 총결론인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라는 구절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렇습니다. 현연기분(顯緣起分)의 결론은 다름 아니라 그 서론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연기법의 원리를 암시하고, 본론에서 연기법으로 나타나는 현상 즉 법계연기에 대해 설명하고, 결론에 와서 그 연기법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니까요. 달리 말해, 현연기분(顯緣起分)의 서론 - 본론 - 결론은 긴밀히 이어져 있는 것이니, 결론은 이미 서론에 은밀히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연기분(顯緣起分)의 결론 첫 구(句), 즉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는 말은 그 서론인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 진성(眞性)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하니,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네.”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에서 ‘이(理)’는 “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한 ‘진성(眞性)’,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사(事)’는 그 ‘진성(眞性)’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한 결과로 나타난 이 세상의 온갖 현상과 사건들이며, 나아가 천지에 가득한 삼라만상(森羅萬象)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 즉 온 우주를 채우고 있는 모든 존재들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법성게 현연기분의 구성을 보면, 서론에서는 이(理 - 진성)에 대해 말하고, 본론에서는 이(理)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하여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사(事)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사(事)와 사(事)가 서로 막힘이 없음을 법계연기로 설명한 다음, 결론에서는 그런 까닭에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이런 원리에 따라서 지난번에 살펴본 이타행(利他行) 4구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현연기분의 총결론인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이와 사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라는 것은 더 나아가 법성게 제1구 즉 현시증분(顯示證分)의 첫 구절인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 호응하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첫 구절을 보통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라고 해석하는데, 생육신 중의 한 사람으로 불가에 귀의한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은 “법(法)과 성(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라고 해석하였습니다.6) 이런 해석이 다음의 제2구 즉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 제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네.”라는 구절과 더욱 잘 호응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떻게 해석하든 제1구의 법(法)은 제17구의 사(事)와, 제1구의 성(性)은 제17구의 이(理)와 상응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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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십불(十佛)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수미해주, 앞 책, p.433 이하 참고.
6) 설잠스님 찬(撰), 무비스님 강설, 『김시습의 법성게 선해(禪解)』(담앤북스, 2024), p.7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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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현시증분(顯示證分)의 첫 구절인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法)과 성(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라는 구절은 현연기분(顯緣起分)의 결론인 제17구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라는 구절과 결국에는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시증분(顯示證分)의 첫 구절과 현연기분(顯緣起分)의 결론 구절이 결국 같은 뜻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연기법을 투철히 알기만 하면, 자증(自證)으로 얻은 체험적 진리와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연기즉공(緣起卽空)이니, 온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에는 공성(空性)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듯,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법성게로 말하자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요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입니다.
이제, 여기까지 와서야, 만해의 시를 다시 읽어볼 계제에 이르렀습니다. 만해의 시 「오셔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보드라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危險)을 위하여는 황금(黃金)의 칼도 되고 강철(鋼鐵)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落花)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準備)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虛無)와 만능(萬能)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無限)인 동시(同時)에 무궁(無窮)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强者)와 약자(弱者)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오셔요」 전문
제1연에서부터 시적 자아인 ‘나’는 ‘당신’을 애타게 부릅니다. ‘나’에게 올 때가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애타는 부름은 제2.3.4연에 계속 이어집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라고 말입니다.
제2연으로 넘어가면서 ‘나’는 ‘당신’이 오실 곳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제2연에서는 ‘나의 꽃밭’으로 오라고, 제3연에서는 ‘나의 품’으로 오라고, 제4연에서는 ‘나의 죽음 속으로’ 오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라고,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라고, “나의 죽음의 뒤에 서”라고 합니다. 그렇게 당신이 오시기만 하면,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다고, “당신의 위험(危險)을 위하여는 황금(黃金)의 칼도 되고 강철(鋼鐵)의 방패도” 되겠다고,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準備)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읽고 보니, 지난번에 이야기했다시피 이 시의 제2연은 연애시로, 제3연은 저항시로 제4연은 선시(불교시)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의상 대사의 법성게(法性偈)를 공들여 읽어 왔으니, 그 법성게에 비추어 이 시의 제4연에 담겨 있는 선시(불교시)적 측면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집 『님의 침묵(沈黙)』에 수록된 만해의 다른 시편들도 거의 그렇듯이, 선시(불교시)적 성격이야말로 이 시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시의 제4연에서는 화엄사상적 서술을 담고 있는 문장 넷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네 문장을 검토하기에 앞서, 시적 자아인 ‘나’가 ‘당신’에게 ‘나의 죽음 속으로’ 와서, “나의 죽음의 뒤에 서”라고 말하는 부분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세상에서 흔히 생각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뜻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선정에 들어서 도달한 적멸(寂滅 - 니르바나)의 상태를 선정에서 나오면서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멸멸이(生滅滅已)하여 적멸위락(寂滅爲樂)하는 그런 죽음 말입니다. 지금까지 읽어온 법성게를 빌려 말하면, 해인삼매 속에서 마음 바탕인 진성(眞性)에 이르러, 그런 마음을 온전히 지닌 채로 번뇌(煩惱)가 들끓는 생멸(生滅)의 이 세상으로 돌아와, 그것을 이 세상의 언어인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죽음’이란 유위법의 식심(識心)이 온전히 죽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환히 밝아진 그런 경지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네 삶의 가장 깊은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죽음은 허무(虛無)와 만능(萬能)이 하나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이 첫 번째 화엄사상적 서술입니다. 여기서 ‘허무(虛無)’는 텅 빈 마음 바탕, 그러니까 ‘진성(眞性)’과 같은 말입니다. 그 진성이 연(緣)을 만나 수많은 유위법(有爲法)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이 ‘허무(虛無)’를 아무런 건물도 없는 빈 터전에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경우 만능(萬能)은 그 ‘허무(虛無)’에서 일어난 온갖 현상들, 그러니까 빈터에 지어진 갖가지 종류의 건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능(萬能)은 허무(虛無)에서 나왔다가 다시 허무(虛無)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허무에서 다시 만능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러한 천변만화(千變萬化)는 시시각각 영원무궁하게 지속됩니다. 그래서 여여(如如)한 것이지요. 이런 사정을 법성게를 빌려 말하면, 제1구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法)과 성(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고”, 제17구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만해가 “죽음은 허무(虛無)와 만능(萬能)이 하나입니다.”라고 하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다음, 시적 자아는 “죽음의 사랑은 무한(無限)인 동시(同時)에 무궁(無窮)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이 두 번째 화엄사상적 서술인 바, 이 문장은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 진성(眞性)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하여,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네.”라는 법성게 제5,6구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온 세상 온 우주의 만물은 진성(眞性)이 연을 따라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진성은 공간적으로 끝없이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다함이 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시적 자아는 “무한(無限)인 동시(同時)에 무궁(無窮)”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진성은 광대무변하고 영원무궁하게 가시적인 모든 만물과 모든 현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적멸(寂滅 - 니르바나)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적멸(寂滅)이며 공성(空性)이면서, 또한 자성(自性)이며 본성(本性)입니다. 그런데 시적 자아는 이를 그저 ‘죽음’이라 말하지 않고 ‘죽음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깊은 선정에서 적멸(寂滅)에 들었다가 ‘사랑’으로 이 세상에 돌아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가시적인 진리는 가시적인 사랑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죽음의 사랑은 무한(無限)인 동시(同時)에 무궁(無窮)입니다.”라는 문장은 다름 아닌 성기사상(性起思想)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기(性起)는 곧 여래성기(如來性起)이니 성기사상은 곧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과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성기사상(性起思想)은 “원효(元曉), 의상(義湘) 등에게 있어서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과 동일한 것으로”7)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성기(性起)로 인한 것이며, “모든 중생(衆生)은 여래장(如來藏)이라 불려 마땅하다.”는8)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죽음의 사랑’은 곧 불성(佛性)의 성기(性起), 그러니까 부처님의 출현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생심(衆生心) 중에 현재 현기(現起)해 있는 기상(起相) 그대로가 바로 여래(如來)의 성기(性起)”입니다.9) 더 나아가,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모두 법신불(法身佛 - 비로자나불)의 분신(分身)이며, 따라서 여래장(如來藏)입니다.
이제, 화엄사상을 담고 있는 세 번째 ⸱ 네 번째 문장을 읽어볼 차례입니다만, 여기서 잠시, 화엄경의 연기사상과 관련하여 4종법계(四種法界)에 대해 이야기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4종법계란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화엄종 제4조인 징관(澄觀)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법계연기는 다시 이문(二門)으로 연다. 첫째 개합(開合)이고, 둘째 석상(釋相)이다. 지금 처음 연기의 법계란 계(界)도 아니고 불계(不界)도 아니다. 법(法)도 아니며 불법(不法)도 아니다. 이름(名)도 모양(相)도 없지만 억지로 이름을 붙이면 무장애법계(無障礙法界)라 하며 (이 무장애법계는) 적요허광(寂寥虛曠)하고 충심포박(冲深包博)해서 만유(萬有)를 다 갖추고 있으니 즉 이것은 일심(一心)이다. 이 무장애법계에 사(事)와 이(理) 두 문이 있는데, 색심(色心) 등의 상(相)은 사(事)이며, 체성(體性)이 공적(空寂)한 것은 이(理)라 한다. 사(事)와 이(理)가 서로 융(融)한 것은 즉 장애가 없기 때문이니 법계에 세 가지 종류를 나눌 수 있으니, 첫째, 사법계(事法界), 둘째 이법계(理法界), 셋째, 무장애법계(無障礙法界)이다. 또 무장애법계에 둘이 있어서 즉 사종법계로 나누어지니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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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기영, 「화엄사상의 현대적 의의」,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편, 『한국화엄사상연구』(동국대학교 출판부, 1986), p.335
8) 위와 같음.
9) 전해주, 『의상(義湘) 화엄사상사(華嚴思想史) 연구(硏究)』(민족사, 1994), p.141
10) 광명 역주, 『법성게(法性偈)』(솔과학, 2010),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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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일체의 현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이를 열어서 합치면 일심(一心)이고. 다시 상(相)을 해석하면 4종법계(四種法界) 즉 사법계(四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법계란 가시적인 현상이고, 이법계란 본체이며, 이사무애법계란 그러한 현상과 본체의 걸림 없는 관계이고, 현상과 현상이 융섭하여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니, 그것이 곧 사사무애법계라는 것입니다. 법계연기란 바로 이 사사무애법계를 가리키는 것인 바, “이런 사사무애의 경계가 일어나는 이유는 체상(體相)으로는 이사상즉(理事相卽)이기 때문에 사사상즉(事事相卽)이며, 작용에 있어서 이사상입(理事相入)이기 때문에 사사상입(事事相入)이 된다는 것”이지요.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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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위 책,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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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만해의 시 「오셔요」 제4연에서 화엄사상을 서술하고 있는 네 문장 가운데 앞의 두 문장, 즉 지금까지 읽어본 “죽음은 허무(虛無)와 만능(萬能)이 하나입니다.”라는 문장과 “죽음의 사랑은 무한(無限)인 동시(同時)에 무궁(無窮)입니다.”라는 문장은 곧 이사무애법계의 표현이며, 이에 따라 사사무애법계의 표현인 세 번째 문장과 네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적 자아는 세 번째 문장에서, “죽음의 앞에는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법계연기 즉 사사무애법계를 설하는 법성게 제7~16구를 통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먼저, 법성게 제7,8구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어”라고 하여 상입(相入)의 원리를,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로세,”라고 하여 상즉(相卽)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입상즉(相入相卽)의 원리로 다음에 이어지는 제9~14구의 공간적 ⸱ 시간적 법계연기(사사무애법계)를 비추어 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제9,10구에서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하나의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 모든 티끌마다 역시 그러하네.”라고 하여 공간적 법계연기를 설명하고 있는 바, 이는 곧 “죽음의 앞에는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됩니다.”라고 하는 세 번째 문장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됩니다. 이어서 제11~14구에서는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 한량없는 세월이 곧 한 찰나의 생각이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한 찰나의 생각이 곧 한량없는 세월일세.”라고 한 다음,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 구세와 십세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 뒤섞이지 아니하여 따로 따로 이루네.”라고 하여, 시간적 법계연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또, 과거 어느 때에 ‘티끌’이 모여서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되었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한 찰나에 수렴되며, 동시에 한 찰나의 생각이 곧 영원무궁한 세월과도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시간은 뒤섞이지 않고 따로 따로 구분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이 살던 시대가 일제강점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사사무애법계를 이야기하면서, 굳이 ‘군함(軍艦)과 포대(砲臺)’를, 그리고 ‘강자(强者)와 약자(弱者)’를 예로 든 것입니다. 즉 불교적 진리를 이야기하는 이 시의 제4연에도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시적 자아는 네 번째 문장에서, “죽음의 앞에는 강자(强者)와 약자(弱者)가 벗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십현연기(十玄緣起) 중의 하나인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온 세상 온 우주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어느 한 사물도 스스로 혼자 생겨나거나 독립하여 존재함이 없이 서로 주(主)가 되고 반(伴)이 되어, 모든 것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12) 그렇습니다. 모든 상대적인 또는 대립적인 개념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강자든 약자든 눈앞의 현상만 보고 서로 대립시켜 부르는 명칭일 뿐, 실제로는 전혀 차별이 없는 것이지요. 강자는 약자가 있어야만 강자가 되고 약자는 강자가 있어야만 약자가 됩니다. 강자를 주(主)로 보면 약자가 반(伴)이지만, 약자를 주(主)로 보면 강자가 반(伴)입니다. 이처럼 강자든 약자든 모두 상대에게 의지해서만 성립하기에, 실은 강자와 약자는 서로 벗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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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위 책,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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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한다면, 화엄사상적 서술의 세 번째 ⸱ 네 번째 문장에서, ‘죽음의 앞에는’이라는 구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된다 하고, ‘죽음의 앞에는’ ‘강자(强者)와 약자(弱者)’가 벗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마음 바탕 자리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앞에는’이라는 구절이 뜻하는 것은 깊고 깊은 선정에 들어, 적멸(寂滅)의 자리 즉 마음 바탕인 진성(眞性)의 그 자리에서, 온 세상의 모든 현상과 사건들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자리 앞에 놓인 세상을 보니, 모든 현상과 사건들이 서로 서로 스며들어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의 앞이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 하나임을 분명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성(眞性)이 세상 만물에 허공처럼 스며들어 있어서, 모든 현상과 사건들에 속속들이 사무쳐 있어서, 그래서 무측(無側)이기에 하나를 들면 온 우주가 들리게 됩니다. 이사무애(理事無礙)이니 당연히 사사무애(事事無礙)가 됩니다. 그래서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되고, ‘강자(强者)와 약자(弱者)’가 벗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의 구조를 살펴볼 때에도, 이러한 진리는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연애시로 쓰인 제2연과 저항시로 쓰인 제3연에도 역시 제4연에서 말하는 불교적 진리가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맨 처음에 제4연의 착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시상(詩想)이 일제강점기라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부딪히고, 또 시집 『님의 침묵(沈黙)』을 일관하는 연애시의 형식과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이 시의 제2,3,4연은 각 연이 서로 독립해 있으면서도 한 편의 시작품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기는 해도, 역시 이 시의 핵심은 제4연에 있고, 그리하여 제4연이 제2,3연에 진리의 빛을 뿌려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의 전체 구조에서, 제1연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하면서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라고 말하는 제1연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실 때가 되었으니 어서 오라는 말은 제2,3,4연에 되풀이되면서 이 시 전체를 감싸들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토록 간절히 말하는 제1연이야말로 이 시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류양선(柳陽善) 프로필
문학평론가 가톨릭대 명예교수 다시올문학상, 김우종문학상 대상 수상
저서: 『한국농민문학연구』, 『한국근현대문학과 시대정신』, 『한국현대문학의 탐색』
『순결한 영웅 윤동주』, 편저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며』, 『윤동주 시인을 기리며』
공편 『윤동주 시인과 함께』, 장편소설 『이 사람은 누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