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한국의 땅이름
누가 한반도에 아름다운 땅이름을 지었는가. 오래 전에 살다간 선조들이 지어놓은 땅에 대한 지명을 분석하다 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 많다. 특히 예언성 땅 이름은 경탄할 정도로 딱딱 맞아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땅이름의 우합(偶合)인 셈이다.
오래 전부터 불러오고 있는 땅이름이 후세에 와서 이상하게도 그 땅이름의 뜻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써 땅이름에서 우리 선인들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고, 다시 한번 땅이름의 신비를 실감하게 된다.
서울 금호동은 옛부터 대장간이 많았으므로 ‘무수막’ 또는 한자음으로 수철리(水鐵里)라고 칭하던 것이 1936년부터 오늘의 금호동이 됐다.
옥수동은 ‘옥정수’라는 우물이 유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바위틈에서 나온 이 우물은 그맛이 뛰어나 왕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1960년 도로공사때 매몰됐다.
압구정은 조선조 한명회가 세상일을 잊기 위해 강가의 갈매기를 벗삼아 지내겠다는 정자 이름이다. 말죽거리는 서울 도성을 나와서 삼남으로 출발하는 지점이 있었고 삼남에서 서울 도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말죽거리가 마지막 주막이었다.
삼남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말을 타고 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자신도 복장을 단정히 정리하고 식사도 충분히 하고 말죽도 충분히 먹었을 것이고 서울 도성으로 입성하는 사람도 복장을 단정히 정리하고 먼 길을 온 말에게 말죽을 충분히 먹였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된다.
다른 어느 역보다도 말죽을 많이 먹여야하는 거리였으므로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란다.
또 하나 1624년 ‘이괄의 난’때 인조 일행이 남도지방으로 피난하면서 허기와 갈증에 지쳐 이곳에서 급히 쑤어온 팥죽을 말 위에서 마시고 부랴부랴 과천으로 떠났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청계천은 한양의 중앙을 흐르는 명당수로 태종때부터 둑을 쌓고 폭을 넓히는 등 치수에 힘썼다.
본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다. 석축 제방공사가 영조 때 마무리되자 ‘개천을 깨끗이 치웠다’는 뜻으로 청개천(淸開川)으로 바꿔 불렀으며, 그 후 청계천(淸溪川)이 됐다.
새 도읍을 정하기 위해 무학대사가 무학봉에 올라 지리를 살피고 평지로 내려오자 한 노인이 소를 타고 가다 채찍질을 하며 말했다.
“이놈의 소가 꼭 무학이구나. 좋은 곳 버리고 엉뚱한 곳만 가니” 이에 무학이 공손히 묻자 ‘서북쪽을 가리키며 10리를 더 가라’고 해서 ‘왕십리(往十里)’가 됐다.
판교(板橋)는 다리가 있었던 곳이고, 충무(忠武)는 이순신과 관련이 깊은 곳이며, 잠실(蠶室)은 누에를 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판문점은 대문을 뜯어 임금이 건널 다리를 놓은 곳을 말한다. 6·25 사변 중에 휴전회담이 열렸던 곳이 널문리 가게 앞이었는데, 이 널문리 가게의 중국어 번역이 판문점이다.
원래 지명인 널문리는 옛날 어느 임금이 이 곳을 지나 강을 건너야 되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자 마을 주민들이 대문을 뜯어 임시로 다리를 놓아 건너가게 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옛날에 경상도 사람들이 서울로 장사하러 가거나 과거보러 갈 때는 필히 문경 새재를 통과해야 했다.
장사가 잘 되거나 과거에 합격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 경사스런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되는 곳이 문경이다. 그래서 ‘들을 문 (聞)’자에, ‘경사 경(慶)’ 자를 써서 문경이라고 했다.
새재는 한자로는 ‘새 조(鳥)’에 ‘재 령(領)’으로 너무 높아 새들도 쉬어가며 넘는 곳으로, 예로부터 새가 많아 새재, 혹은 조령이라고 한다. 경상도를 영남지방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령의 남쪽이란 뜻으로부터 비롯됐다.
청주국제공항의 비상리, 비하리란 이름은 어떤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비행장이 자리잡은 지역인 충북 청원군 북일면에는 ‘비상리’, 청주시 강서동에 ‘비하리’라는 마을이 있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활주로 끝에 있는 마을 이름이 ‘비하리’이고, 이륙하는 쪽 동네 이름이 ‘비상리’라는 것이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위치와 땅이름이 참으로 신통하게 일치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옛 이름은 제비섬이었는데, 조선조 중기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제비는 비행기, ‘영종’은 긴 마루라는 뜻으로 광활하게 뻗는 활주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섬과 방파제로 잇는 용유도는 당초부터 비행기가 하늘을 높이 날고 내리는 공항이 들어설 자리를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인천 월미도(月尾島)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처럼 주말이면 수많은 인파에 밟히고 있으며, 경남 창녕의 화왕산(火旺山)은 ‘불의 뫼’라는 옛 이름처럼 매년 억새 태우기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충무동 해안통 주변의 생선 상인들이 1946년 10월에 생어상조합(임의단체)을 결성하게 된 것이 오늘날 부산 자갈치시장이 생기게 된 효시다.
원래 남항 일대의 용두산쪽 자갈돌이 많아 자갈치로 불리웠으며, 일제시대에는 남민정으로 지칭되다가 해방이후 영도의 남항동에 대하여 남포동이라 고쳐부르게 됐다.
‘자갈치’란 지명은 자갈 해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활어’만 거래되는 자갈치란 어종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부산 태종대(太宗臺)는 해운대와 더불어 부산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명승지이자 부산 8경의 하나다.
태종대의 유래에 대하여 ‘동래부지’에서는 몇 가지로 설명해놓고 있다. 그 하나는 신라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군사를 조련하여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에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태종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이곳에서 궁인들과 함께 울창한 수림과 수려한 해안의 절경을 즐기며 한유를 했다는 것에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속전에서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사후(射侯)의 장소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남 고흥(高興)은 ‘높은 데서 흥한다’는 뜻 그대로 현재 인공위성을 우주로 실어나를 발사체 기지가 건설 중이다. 특히 우주센터가 들어설 고흥군 소재 섬인 외나로도는 바깥(外)으로 나는(나로) 섬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포스코가 있는 전남 광양(光陽)은 가장 ‘뜨거운(陽) 빛(光)’을 낸다는 의미다. 철을 녹이는 고로(高爐)가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의 장소다.
전남 영광의 땅이름 의미는 ‘신비로운 빛’이다. 이는 종교적(원불교) 영감을 느끼게 하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현재에는 핵 연료봉의 불빛으로 홍농읍에 원자력발전소를 세웠다.
덕유산 남쪽의 남덕유, 다시 그 남쪽 줄기를 훑어가다 보면 ‘육십령’이란 잘 알려진 고개가 나타난다.
백두대간을 동서로 가로 건너는 이 고개에 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라 때부터 요새지였으니,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당해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육십령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며 도적떼가 많아 옛날에 이 고개를 넘으려면 반드시 60명의 사람이 모여야 했다는 얘기가 오늘에도 전하고 있다.
평지나 큰 들이 있는 곳에는 평(坪), 평(平), 야(野), 원(原) 등의 한자가 많이 쓰였는데, 가평, 청평, 양평, 부평, 수원, 철원, 남원 등이 그 예이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에는 옥정리(玉井里)가 있다. 이 마을은 그전에 옥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옥정리라 부른다고도 하고, 혹은 조선 중기에 어느 스님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멀지 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옥정리라 했다고 한다.
옥구군(지금은 군산시에 편입)과 새만금간척지도 마찬가지다. 옥구군(沃溝郡)은 군산시를 에워싸고 있는 지역으로, ‘물댈 옥(沃)’자에 ‘개천 구(溝)’자를 합한 이름인 ‘옥구(沃溝)’는 한자대로 새기면 ‘개천에 물을 댄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제 개천에 물을 대는 현실로 나타나게 됐다. 새만금간척사업은 고군산군도와 비안도를 거쳐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를 잇는 33km의 바다방조제를 쌓아 서울 여의도의 1백40배 규모의 토지를 조성하는 대단위 간척사업이다. 그리고 또하나, 진안군 용담면과 용담댐.
전북 진안 용담면은 일제시대부터 댐 건설의 적격지로 지목, 계획을 확정하고 사업을 검토하여오다가 일본 패망으로 무산됐지만 지난 1992년 착공, 2001년 완공됐다.
담수가 끝나자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참으로 기이하게도 댐이 가두고 있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그대로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용담’이란 ‘용 용(龍)’자에 ‘못 담(潭)’자의 지명으로 ‘용이 자리를 틀고 있는 깊은 연못’이란 의미를 현실화했다. 댐 완공 후 수몰선을 따라 물에 잠겨 호수의 형상이 용의 모양을 이루고 있으니, 용담면이라는 이름과 실제 현실이 맞아떨어지게 된 셈이다. 그래서 용이 살 수 있는 땅이 되었다.
‘안천 정천 주천이 용담을 이루면 마령은 용이 되어 상전으로 백운타고 오르리라. 성인 출현 성수라 부귀영화 아닐손가. 진짜 평안한 금골 진안일세 구리골이 아니로소이다.’
본래 안천은 안자천이고, 정천은 정자천 주천은 주자천이다. 안천 정천 주천이 합수하여 용담이 된다는 것은 유교 현인들인 안자(顔子, 安廻), 주자(朱子, 朱熹), 정자(程子, 程伊川)를 거쳐 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이며, 부귀를 겸한 ‘진짜(鎭) 평안(安)한 세상을 이룬다’는, 진안의 지명풀이는 신비 바로 그 자체다.
옥녀봉 중턱에 자리 잡은 진안군 부귀면 황금리 가치(歌峙)마을은 지금으로 부터 약 3백년전에 형성되었다고 전하는 가운데 옛날 옥녀라는 선녀가 노래를 부르며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일명 ‘노래재’라고 불렀다. 지금도 일반적으로는 모두 ‘노래재’라고 부르고 있으나 글자붙임으로 해서 ‘가치(歌峙)’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섬진강은 진안군에서 시작하여 전남을 거쳐 경남 하동을 지나 남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고려시대 1385년,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만 쪽으로 피해 갔다고 한다. 그 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고 했다고 한다.
충견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임실군의 오수(獒樹)의 ‘오(獒)’자는 개의 이야기에서 생겨난 땅이름을 암시하고 있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도중 만취한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개로부터 비롯된다. 개의 시체를 그 자리에 고이 묻어주고,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무덤가에 꽂아주고 후일의 표적으로 했다고 한다.
전북 정읍시 산외면 목욕리(沐浴里)는 원래 물이 맑고 좋아서 선녀들이 목욕하던 곳이라 하여 ‘멱수’, ‘목욕소’라 했던 것을 일제시대에 개명했다고 하는데 온천이 나온다고 한다.
전주의 마당재는 고개가 마당처럼 넓어서 마당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고려시대에는 야단이 설치되고 법석이 열렸다고 한다. 구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정 주변을 가리켜 야단법석(野壇法席)자리였기 때문이다.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의 아침재(朝峙)는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성수산 도선암(현 상이암)에 들어갈 때 아침에 넘었다고 해서 지어진 지름이다.
임실군 성수면 왕방리(枉訪里)는 이성계가 지리산을 거쳐 도선암으로 갈 때 이곳에서 안개를 만나 헤매이면서 머물렀다 하여 생긴 이름이며, 성수면 수철리(水鐵里)는 이성계가 지리산을 거쳐서 도선암으로 갈 때 이곳에 와보니 수천리(數千里)를 걸어 왔다 하여 부른 이름이란다. 그러나 아픈 지난날도 숨쉬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황산대첩비’ 등 무려 20여 기의 문화재를 철거 대상으로 지정했으며, 마을 이름에 사용된 ‘왕(王, 임금)’자를 ‘왕(旺, 성하다)’자로 바꾸는 등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제멋대로, 일방적으로 바꾸었다.
정읍시 농서동 흑암(黑巖)마을은 본래 현암(玄巖)마을이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친일을 거부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는 시커먼 마을’이라며 흑암으로 바꿨다는 얘기하며, 고부면 주산(舟山) 마을의 이름은 당초 죽산(竹山) 이었으나 ‘배가 산으로 간다’, ‘배가 떠나버린 마을’이라는 의미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말 이성계가 잠이 들었다가 닭울음 소리를 듣고 깨어나 왜적을 무찌른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장수군?용계(龍鷄)‘마을은?용계(龍溪)’로 장수군의 구시봉은 일제가 깃대를 꽂아 우리 국토를 측량한 데서 ‘깃대봉’으로 바뀐 채 지금까지 불리워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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