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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1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내적 인간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그만 아내가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까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해 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 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하면서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혼자 다니는 것이 익숙해진 2년 후 버스운전기사가 이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를 하였습니다.
“아줌마는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이 남편은 외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혼자 남겨질 아내를 위해 아내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모자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적으로 만족하면 사람들의 인정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요즘 보니까 카카오 스토리에 부모님과 함께 한 사진을 많이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것만 보고 “신부님은 효자세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진짜 효자라면 그런 말을 유도할 사진들을 올릴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작은 형과 길을 걷고 있을 때 매우 비싼 옷에 반지, 목걸이, 그리고 화장까지 진하게 하고 턱을 들고 걸어가는 아주머니를 보고, “저 아줌마, 왜 저래?”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아이였던 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 속이 비어서 그래!”
그렇습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더 잘나 보이려고 하고, 가난이 부끄러운 사람은 더 부자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보이려는 행동들은 대부분 내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란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는 가난한 집과 청력 장애와 도박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못 배우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공부도 못해서 삼수를 해, 이름도 없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는 많은 노력 끝에 본인이 원하던 성악을 하게 되었고 유명 강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등감은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졸업 후에도 대학 교수님께 성악 지도를 받았는데, 큰 회사들에 가서 수천 명 앞에서 강의하고 온 것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참 잘하고 있구나... 그런데 네가 흘러야 돼!”
그렇습니다. 여전히 열등감을 극복 못하고 있기에, 흐르지 못하고 변화하지 않기에, 그렇게 외적인 것으로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적으로 부족하면 외적으로라도, 하느님에게가 아니면 사람에게라도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내가 외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내적으로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선행도, 기도도, 단식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분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키 높이 깔창을 넣은 구두에서 깔창을 뜯어냈습니다.
키는 더 작게 보일지언정 마음은 편했습니다.
누구를 속이고 있다는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따라서 밖을 향하면 곧 그분을 볼 수 없고 잊어버리게 됩니다.
뱀을 보면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내적인 것 아니면 외적인 것 둘 중의 하나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만족을 원하든지, 사람들이 주는
칭찬이나 인정을 원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만 집중할 수 있을 때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또 집착으로부터 오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적 인간이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1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6,1-6.16-18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기도합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의 신앙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지도자들의 위선적 삶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고생하고 있던 백성들은 신앙 안에서나마 위로와 힘을 얻고자 기대했지만, 성전 주변에는 위선자들이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 조차도 집중하지 못하고 인간의 칭찬을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겉으로는 그럴 듯 해보였지만, 그 기도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엄청나게 요란스럽고 장황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지만, 정작 하느님 앞에 그들의 기도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힐라리우스 교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바다 속 깊은 곳과 짐승의 배 속에서도 기도합니다.”
기도에는 진정성과 열정, 지극정성이 요청됩니다.
건성건성, 적당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듯한 어정쩡한 기도가 아니라, 때로 목숨을 건 기도, 삶 전체를 바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란 한 인간이 자신의 근원이자 시초인 하느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과 마음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거룩하고 진지해야할 기도 행위에서 조차도 하느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위선자들의 대표 선수로 손꼽히는 자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평소에는 가만히 집에 잘 들어앉아 있다가도 기도하는 시간인 9시, 12시, 오후 3시만 되면 길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왕래가 잦는 회당 앞이나 큰 길 모퉁이에 멈춰 서서 멋들어진 폼, 거룩한 표정까지 지으며 열렬히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숨은 일도 다 보시는 예수님께서 가증스런 그 꼴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가치와 위상을 추락시키고 기도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한 인간을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도구로 훼손시킨 위선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제대로 한방 날리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을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장 6절)
공동체 전례, 하느님 백성과 함께 바치는 공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골방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영혼의 깊은 궁방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있습니다.
성당이나 수도원만이 영성의 보고이며 곡창지대가 절대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 하느님과 내가 편안하게 통교할 수 있는 내 작은 독방 역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성당은 물론이고 이 세상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각 개인차가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형태의 기도만 고수하고 거기에만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적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장엄한 공동체 전례가 더 빛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참석하는 개개인의 열정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기도는 자칫 고립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골방에서도 열심히 기도하지만, 똑같은 열성으로 공동체 전례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성전으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023. 6. 21. 수)(마태 6,1-6.16-18)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위선>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이 말씀에서 25장에 있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40)”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의인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말은, 선행을 실천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주님께 한 적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을 한 기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의인들은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그 일이 선행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그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사람들, 해야 할 일이니까 당연히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선행과 사랑은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자랑하고 싶어 하면서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겸손한 척 하는 것도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로만 겸손한 척 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느님의 눈치를 살피자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런 말도 옳지 않은 말입니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루카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연상됩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1-14).”
사람들을 향해서나 하느님을 향해서나 스스로 나팔을 부는 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자선과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그것이 자선과 선행과 사랑인 줄도 모르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래도 그 수준에 도달해서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 모르게, 또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선과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 다음에, 마음속에 저절로 기쁨과 행복감이 가득 차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자기 혼자서 속으로 느끼는 그 기쁨과 행복감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보상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일 수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演技)’일 뿐입니다.
또 위선자들의 단식은, 실제로 밥을 굶더라도,
단식이 아니라 단식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이고,
쓸데없이 헛고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몸으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몸으로 단식해야 합니다.
<단식일로 정해져 있는 날에 단식하려고 그 전날에 미리 많이 먹거나, 아니면 단식일 다음날에 많이 먹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단식이 거짓 단식이었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키는데,
목요일에 미리 고기를 먹거나, 아니면 토요일로 미루었다가 먹는 것도 위선이고, 고기만 안 먹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고기보다 더 비싼 생선회를 먹는 경우도 위선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