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선장역으로 영업을 개시해서 개통 50년만에 현재의 '도고온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개통 85년만에 온양온천-신례원 선로이설을 하면서 동시에 지금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설된 도고온천역.
새로 생긴 번쩍번쩍한 도고온천역에 비하면 상당히 낡은 역이지만,
삽교호 들판과 함께하는 특유의 한적한 분위기는 신 도고온천역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
85년 서민의 애환을 실어 날랐던, 온천역에서 내려 온천을 가기 위해 헤매던 사람들의 추억들과,
한 세기의 세월을 묻어둔 흔적들까지 과감히 희생하고, 속도에 모든 것을 내준 멋진 기차역, 도고온천역.
속도와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현대 사회에서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은 그는 스스로 당당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빈 껍데기만 남은 구 역사지만 85년 세월의 흔적은 차마 지워지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추억을 희생한 댓가를 당당히 받고 있는 것이다.
선장역을 출발한 열차는 가로수 건널목을 지나 약한 구배를 넘어 오른쪽으로 크게 곡선을 돈 다음,
다시 왼쪽으로 엄청난 곡선반경을 돌아 그 끄트머리에서 도고건널목과 만난다.
온양시내버스와 예산군내버스의 종점이 바로 옆에 있는 도고건널목.
바로 이 곳이 도고온천역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도고건널목을 건너자마자 분기기와 분기선이 나오고, 열차는 서서히 도고온천역에 진입한다.
도고온천을 진입하면서 속도를 점점 줄인다.
그런데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 본선 양 옆으로 나 있던 대피선 두 가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서히 철길 철거작업을 본격화하려는 철도시설공단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미 분기기까지 뽑혀있었던 것을 보면, 본선마저도 머지않아 철거하려는 듯 하다.
이렇게 본선 옆으로 이제 막 철거된 선로가 한가득 쌓여있다.
본선까지도 머지않아 이런 고철신세가 된다고 생각하니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미 구 도고온천역 구내는 철거를 위한 여러가지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몰려온다. 왼쪽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통들은 뭐가 그리 신난지 해맑게 웃고만 있다.
신 도고온천역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쓸쓸이 퇴역하는 구 도고온천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지금 당장에라도 열차가 올 것 같은 느낌이다.
딱딱한 돌 승강장도, 화가 가득한 가로등도, 정리정돈된 역목까지 모두 그대로이다.
다만, 온양온천-신례원 구간의 폐역들이 그렇듯 이 곳도 화물홈에 큰 가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저 건물을 중심으로 이 곳을 모두 철거해버릴 예정인지...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든다.
파란색으로 덧입힌 지 1년도 채 안 되어 버려진 폴사인이 혼자 쓸쓸하게 남아있다.
굳이 이설을 코앞에 놔두고 폐역처리가 되지 않았던 선장, 학성, 신창역을 모두 버리고 온양온천 표기까지 해야 했을까...
검은색 그대로 두었더라면 훨씬 가치가 있었을 역명판인데...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설되는 그 날까지 계속 검은색을 고수하고 있었던 서울, 장항방면 안내판이 있어 다행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 당장에라도 열차가 달려올 것 같은 분위기인데...
보면 볼수록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미 뜯겨져 나간 철길, 그 위에 홀로 남은 건널목.
퇴역한 역의 말로가 처량하기만 하다.
따스한 햇살을 그대로 남아 사방에 내비치는 건물.
비록 건물 자체는 상당히 멋없는 초기형 凸역사지만,
주변의 아름다운 역목들이 없던 멋을 만들어내고 더욱 살려준다.
이렇게만 보면 건물 안이 정말로 개방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도고온천역은 12월 21일 이후로 신 역사로 이전해 이 곳은 열차가 섰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역을 관리하는 사람이 철수한지도 어언 3달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지만, 추운 날씨를 버텨내고 아직까지도 난초가 초록 잎을 발산하고 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밝은 햇살을 듬뿍 맞이하는 난초처럼,
구 역사 또한 제 모습을 잃는 고난과 역경이 생기더라도 그런 어려움을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전혀 동떨어진 곳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줬으니 말이다.
역의 내부는 사방으로 문이 꽁꽁 잠겨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다.
꽁꽁 잠긴 내부는 여느 폐역과 다름없이 잡동사니들이 정신없이 널부러져 있고, 내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저 왼쪽에서 표를 사고, 사진에 보이지 않는 오른편 맞이방에서 TV를 보며 열차를 기다리던 때가 문득 그리워진다.
역사 오른쪽 기둥에는 조그맣게 파란색 기둥판이 남아있다.
도고온천역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유물'이다.
이런 형식의 역명판이 최후까지 남아있던 곳이 경북선 보문역이었는데, 영화 '그 해 여름'을 촬영할 때 떼 버리더니
결국 역사를 소리없이 철거해버리고 말아 더 이상 이런 형식의 역명판을 현업중인 철도에서는 볼 수 없다.
그나마 기둥에 붙어있는 이런 형식의 역명판은 몇몇 곳에 남아있긴 하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명물'인 것은 마찬가지다.
도고온천역 오른편을 돌면 주택가가 위치하고 사방이 꽉 막혀있는 조그만 공간이 나타난다.
역 안의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을 주택가도 아닌 애매한 '음지'이지만,
이 곳을 그냥 지나쳐서는 큰 코 다친다.
통일호 시절에 쓰이던 시간표와 요금표가 이 곳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천안-장항간 통일호가 서민들의 애환을 실으며 하루 세 번 씩 운행하던 시절.
도고온천역이 최고로 호황기를 누리던 때이기도 했다.
통일호와 대부분의 무궁화호가 정차하며 각각 예산과 아산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선장역'이 도고온천역 관리역이었기에, 이 시절에는 선장역 열차시간표까지 같이 붙어있었던 것 같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명물'이 여기에도 또 하나 있는 셈이다.
도고온천역 역사가 막혀있기 때문에 역사 왼쪽을 돌아 큼직한 부속건물과 가건물이 있는 곳으로 빠져나온다.
2006년 5월 소화물 취급을 완전 폐지되면서 대한통운이 더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선로까지 철거해 버렸으니 더 이상 이 곳에 대한통운이 남아있을 일도 없을 것이다.
열차가 더 이상 이 곳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 세 달이 지났건만,
도고온천역은 아직도 여기에서 영업을 하는 것 마냥 당당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작년에 걸어놓은 관광열차 플랜카드까지도 그대로 걸려져 있으니,
누가 봐도 현업중인 곳으로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열차는 다니지 않는 곳.
있을 것 같은 곳에 정작 있어야 하는 것이 없으니 더욱 황량할 뿐이다.
도고면사무소, 도고우체국, 도고지구대가 모두 구 도고온천역 근처에 있다.
선장면으로 가는 길목이자 예산, 아산 버스의 종점이기도 한 이 곳.
그렇기 때문에 기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마을이었는데,
이젠 더 이상 열차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이쪽 주민들은 2km 떨어진 신 도고온천역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정작 신 도고온천역을 이용해야 할 도고면 주민들은 도고온천역보다 온양온천역을 더 자주 이용할 것이다.
여기에서 버스로 20분이면 충분히 온양온천역에 도달하는데다,
신역까지 가는 버스 연계가 굉장히 취약하고 도보로도 30분 이상 걸어야해,
오히려 온양온천역보다도 도고온천역 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속도를 위해 접근성을 과감히 버리고 완전한 시골동네 한복판으로 이사를 간 도고온천역.
과연 10년 후에도, 그리고 20년 후에도 이 풍경이 멀쩡히 남아있을까.
새로운 도고온천역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그 모든 것이 정말로 궁금해진다.
첫댓글 크 글보니깐 방랑벽이 도지네요... 최근에는 어디 다닌데가 없어 이곳에서 여행기를 읽음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데 정말 어디 좀 다녀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