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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는 가까워도 발로는 먼 석화성(수도산,단지봉,좌대곡령,두리봉,가야산)
1. 수도산 동봉에서 바라본 석화성 가야산
融然爲海峙爲山 드넓어 바다가 되고 솟아서 산이 되니
山自奇秀水結蟠 산은 절로 빼어나고 물은 휘감아 돈다
舊聞方丈三韓外 예부터 듣건대 삼한 저쪽의 방장산은
元氣到此應作團 원기가 이곳에 이르러 응당 뭉쳤으리
試登伽耶頂上望 어디 가야산 정상에 올라서 보아라
峯繆海空雲自還 얽힌 봉우리 빈 바다에 뜬구름뿐
神仙可尋有靈迹 신선을 찾을 신령한 자취 있으니
欲將足蹋遍松菅 발로 온 산을 두루 다니고자 했지
―― 읍취헌 박은(挹翠軒 朴誾, 1479~1504), 「사화의 시에 차운하여 이호숙의 유가야산록의 뒤에 적다
(次士華韻。題李浩叔遊伽耶山錄後。)」에서
주1) 사화(士華)는 남곤의 자이다.
주2) 호숙은 중종 때의 문신 이항(李沆)의 자이다. 1498년(연산군 4)에 과거에 급제하여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림의 제거에 앞장선 인물이다. 또한 대사헌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여 실각시켰으며 남곤이 죽자 심정, 김극핍(金克愊)과 함께 권력을 잡았으나 김안로의 복귀로 인해 축출되어
처형당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6
▶ 산행일시 : 2023년 6월 10일(금요무박), 아침에는 맑았다가 점점 연무가 짙어짐
▶ 산행코스 : 수도리 종점,수도암,1,092.9m봉,신선대,수도산,구곡령,송곡령,단지봉,좌대곡령,용두암봉,목통령,
성만재,불기령,두리봉,부박령,가야산(상왕봉,칠불봉),서성재,만물상 능선,백운동주차장
▶ 산행거리 : 도상 25.0km
▶ 산행시간 : 11시간 58분
▶ 교 통 편 : 대성산악회(23명) 버스 타고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0 : 00 – 복정역 1번 출구
03 : 45 – 수도리 종점, 산행시작
04 : 10 – 수도암
04 : 22 – 1,092.9m봉
04 : 58 – 수도산(修道山, △1,317.4m), 휴식, 일출 구경( ~ 05 : 15)
05 : 44 – 구곡령(1,045m)
06 : 10 – 송곡령(1,080m)
06 : 45 – 단지봉(丹芝峰, △1,327.4m), 아침식사( ~ 07 : 05)
07 : 54 – 좌대곡령(座臺谷嶺, 1,257.6m)
08 : 40 – 용두암봉(1,125.6m)
09 : 07 – 목통령(木通嶺, 975m)
09 : 51 – 성만재(1,132.4m)
10 : 30 – 불기령(997.9m)
10 : 56 – 두리봉(1,135.1m), 헬기장, 점심( ~ 11 : 20)
13 : 02 – 가야산 상왕봉(우두봉, 1,430.0m)
13 : 16 – 가야산 칠불봉(七佛峰, △1,432.6m)
13 : 50 – 서성재
14 : 02 – 상아(嫦娥)덤(서장대, 1,136.1m)
15 : 43 - 백운동탐방지원센터 주차장, 산행종료
2. 여명
3. 멀리 가운데는 지리산 천왕봉
4. 앞 왼쪽은 단지봉, 멀리 가운데는 오도산
5. 석화성 가야산
6. 월매산
7. 멀리 가운데는 오도산
8. 일출 직전
▶ 수도산(修道山, △1,317.4m)
오늘 일출시간은 05시 11분이라고 한다. 산행대장님 말씀이다. 산행기점인 수도리 종점 공영주차장에서 수도암까
지 도로 따라 1.5km, 수도암에서 수도산까지 산길 2km쯤 되니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고, 아마 일출을 때맞춰 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수도암까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이고 널찍하여 버스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일출시간을 맞추느라 일부러 도로를 걷게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길이 잘났다고 해도 오르막 3.5km를 1시간 30분에 가기란 힘들다. 아무튼 잰걸음 한다. 옥동천 물소리가
응원한다. ‘인현왕후길’을 잠시 지난다. 난데없는 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인현왕후가 폐서인 되고나서 이곳 수도
산 북동쪽 자락에 있는 청암사(靑巖寺)에 머물렀을 때 거닐었던 길이라고 한다.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가
누구인가? 다시 역사 공부한다. 그의 약전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고, 어머니는 은성 부부인 은진 송씨
(恩津 宋氏)로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 7)에 15세의 나이로 가례를 올리고 숙종(肅宗)의 계비가 되
었다. 왕비가 된 초기에 출궁된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다시 불러들여 후덕한 왕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장희
빈(張禧嬪)이 숙종의 총애로 점점 교만해져 회초리로 다스린 적이 있는데, 이것이 질투를 하였다는 빌미가 되었다.
숙종은 장희빈에게서 경종(景宗)이 태어난 후 인현왕후가 질투 때문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며 폐서
인하고 사가에 나가 살게 하였다. 이때 장희빈 측의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 있었다. 그러나 5년 후 김춘택
의 인현왕후 복위 논의가 갑술옥사로 이어지면서 숙종은 1694년(숙종 20) 삼불거(三不去)를 언급하면서 인현왕후
를 복위시켰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밤중에 수도암 가는 길이 고적하다. 옥동천을 거슬러 오른다. 도로 주변에는 하늘 가린 나무숲이 울창하다. 일행들
헤드램프 곁불로 간다. 맨 선두는 준족 또보아 님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살방살방 걷는 가벼운 발걸음이다. 괜히 그
에 따르려다가 때 이르게 오버페이스 할라 아무쪼록 내 걸음으로 가도록 경계한다. 수도암 경내는 불 밝혀 훤하다.
목탁 두드리며 염불하는 소리가 들린다. 말소리 발소리 숨소리 죽인다.
수도암(修道庵)이 이렇게 규모가 큰 대찰인데 암자라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인현왕후가 머물렀다는 청암사
의 부속암자라고 한다. 수도산 가는 등산로는 계단 오른 절집 중간에서 오른쪽 산기슭으로 났다. 헤드램프 불빛이
스님의 염불에 방해가 될까봐 주련을 살피지 않는다. 밤중에 헤드램프 불빛 닿는 데는 다 길로 보인다. 선두는 산자
락 도는 잘난 길을 우선 보고, 머리 들어 이정표가 안내하는 왼쪽 소로의 등로는 보지 못했다. 내가 잠깐 선두가
된다.
아침이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새들이 부상에서 해를 끌어올리느라 야단이다. 한 피치 길게 올라 1,092.9m봉이다.
지도를 보면 굳이 능선을 잡아 오를 필요가 없다. 수도암에 절집 뒤쪽으로 올라 서진하면 쉽게 1,092.9m봉 내린
안부에 이르겠다. 그런 사정을 모르고 1,092.9m을 내리는데 하도 뚝뚝 떨어지기에 이러다가 골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잠시다. 긴 오르막이 이어진다. 길 좋다. 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교향곡으로 들으니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다만 헤드램프 불빛을 보고 달라붙는 날벌레들 쫓기가 귀찮다. 바람이 드는 능선에 서면 전혀 맥을 못 추는 날벌레
들이다. 되똑하게 솟은 암봉에 오른다. 신선대다. 하늘이 트인다. 동녘은 금방이라도 해가 솟을 듯 붉다. 수도산
정상이 멀지 않아도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마음이 급해진다. 신선대 얼른 내려 깜깜한 숲속에 들고
줄달음한다. 땀난다. 가파른 오르막이 수그러들고 ┫자 갈림길이다. 왼쪽이 단지봉으로 이어지고 직진 70m 전방이
수도산이다.
배낭 벗어놓고 수도산을 향한다. 언젠가 오지산행에서 모닥불 님이 수도산을 가는 등로 옆에서 산삼을 캔 적이 있어
사면 훑어보는 눈에 부쩍 힘이 들어간다. 수도산. 암봉이다. 사방 조망이 트이는 빼어난 경점이다. 그에 걸맞게 삼각
점은 1등이다. 무풍 11, 2016 재설. 해가 뜨려면 10분 남짓 남았다. 바람이 제법 차다. 커다란 돌탑이 바람막이다.
동녘은 장관이다. 운해는 뭇 산들을 간단히 넘는다. 남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이 망망대해 고도이고, 서쪽에는 덕유
산이 첩첩 산을 거느린 맹주다.
북쪽은 월매산이 나 또한 준봉이라고 주장한다. 해가 뜨는 순간은 천지가 고요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가 들리는 듯하다. 텔레비전에서 방송을 시작할 때의 광경이다. 우리는 이 한 장면으로 오늘
산행의 보람이 차고 넘친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가야산을 석화성(石火星)이라고 한다. 수도산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택리지(擇里志)』의 복거총론 ‘산수’에서 언급하였다.
“경상도에는 석화성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만 뾰족한 돌이 불꽃처럼 잇달아 있고, 공중에 따로 솟아 극히 높고
빼어나다.(慶尙一道無石火星而惟陜川伽倻山石尖連行如火炎離立空中極高且秀)”
눈이 시도록 사방 둘러보고 또 둘러보고 내린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 틀어 암봉을 오른다. 수도산 동봉이
다. 여기 또한 수도산 정상에 뒤지지 않는 경점이다. 가야산이 거침없이 보인다. 눈으로는 퍽 가깝다. 그러나 발로는
20km는 될 것이라 멀고멀다. 상당히 사나운 슬랩과 돌길을 더듬거리며 내린다. 그리고 깊은 수해(樹海)에 잠긴다.
마치 달리기 경주하듯 내닫는다. 왼발은 경상북도 땅을, 오른발은 경상남도 땅을 밟는다.
9. 멀리 하늘금은 덕유산 연릉
10. 일출
13. 일출 직후 가야산
14. 수도산 동봉에서 바라본 가야산
15. 일출 주변
▶ 단지봉(丹芝峰, △1,327.4m), 좌대곡령(座臺谷嶺, 1,257.6m), 용두암봉(1,125.6m)
내리막이 멈칫한 데는 구곡령이다. 그런 다음 봉봉을 오르내린다. 하늘 가린 울창한 숲길이다. 덕순이가 살고 있는
지 살필 여념이 없다. 이다음 안부는 ┣자 갈림길이 난 송곡령이다. 송곡령에서 단지봉까지는 줄곧 오르막이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오르다가 0.8km 남겨두고는 단지봉이 위세를 맘껏 부리는 된 오르막이다. 0.8km가 1km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뒤로 자꾸 물러나던 공제선이 마침내 더 물러날 데가 없다. 미역줄나무 덩굴 숲 헤쳐 단지봉이다.
그간 나도 변했겠지만 단지봉이 더 변했다. 여기 오면 항상 조망이 좋았다. 보해산, 금귀산, 박유산, 지리산 연릉이
환상의 그림 같았다. 사실 나는 오늘 산행에서 수도산에서의 일출보다는 단지봉에서의 조망을 더 기대했다. 그랬는
데 미역줄나무 덩굴은 시야를 가리게 웃자랐고, 날씨는 연무가 밀려들어 근경조차 흐릿하니 눈 들어 볼 것이 없다.
단지봉 정상 표지석은 우람한 자연석으로 세웠고 데크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삼각점은 ‘가야 447, 1981.5 재설’이다.
데크전망대 바닥에 둘러앉아 휴식 겸해 아침밥 먹는다. 날씨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기는 조망을 즐길
데가 별로 없기도 하다. 미역줄나무 덩굴 숲을 뚫는다. 아직 미역줄나무가 덜 자라 몸으로 부딪쳐서라도 뚫고 갈 만
하지만 한여름에는 무진 애를 먹으리라. 길게 내려 좌대곡령을 한껏 높여 놓고 오른다. 좌대곡령(座臺谷嶺)은 고개
가 아닌 경점인 암봉이다. 좌대곡령의 ‘臺’를 ‘壹’로 잘못 쓰거나 잘못 알아 ‘좌일곡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토지
리정보원 지형도의 오기 때문이다.
단지봉은 좌대곡령에서 바라볼 때 특히 아름답다. ‘단지(丹芝)’라기보다는 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인 둥그
스름한 ‘단지’로 보인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을 간다. 바람이 선선하다. 더러 빽빽하게 우거진 키 큰 산죽 숲과
미역줄나무 덩굴 숲을 뚫기도 한다. 외길이다. 길게 내린다. 그러다 데크계단 오르막이 나타난다. 이 산중에 데크계
단이라니 어색하다. 예전에 제법 짭짤한 손맛 보며 오르내렸던 용두암봉이다.
데크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원경은 연무로 흐릿하다. 가야산이 수도산에서 보던 것보다 더 멀어진 것 같다. 가야
산의 관문인 두리봉과 그에 이르는 장벽의 능선이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한다. 하여 탁주 분음하며 용기를
북돋운다. 가파른 데크계단 통통 내리고 깊은 수해에 잠수한다. 용두암봉을 다듬는 터에 산죽이 울창했던 등로도
다듬었다. 양팔 벌려 산죽을 헤치지 않아도 될 만큼 넓게 베어냈다. 두 차례 오르내리다가 뚝 떨어져 바닥 친 안부는
목통령이다.
17. 반원 님과 빛샘 님, 무서운 산꾼들이다.
18. 예전(2009.1.10.)에 단지봉은 이랬다, 그때는 가야산에서 수도산으로 진행했다.
왼쪽부터, 산아, 스틸영, 베리아, 대간거사, 상고대, 도봉거사, 가난한 영혼, 신가이버, 주유천하, 산울림, 사계, 한메
19. 단지봉
20. 점점 오리무중이다
21. 멀리 가운데가 단지봉
22. 멀리 왼쪽이 단지봉, 용두암봉에서
23. 용두암봉에서 바라본 가야산
▶ 두리봉(1,135.1m), 상왕봉(우두봉, 1,430.0m), 칠불봉(七佛峰, △1,432.6m)
수도산에서 가야산에 이르는 장릉 중에 가장 고도가 낮은 데가 목통령이다. 목통령 고도가 1,000m가 가까운 975m
인데도 그렇다. 목통령에서 두리봉까지 3km가 힘듦에 있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하다. 특히 V자 협곡
으로 보이던 불기령 통과가 난구간이다. 성만재를 포함한 준봉 3좌를 넘어야 하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행
히 눈 밝은 빛샘 님 덕분에 어려운 걸음을 상당 부분 희석할 수 있었다.
빛샘 님이 사면을 누빌 필요가 없이(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등로 주변에서 덕순이를 곧잘 찾아내었다. 나와 반원 님
은 덕순이를 보듬기에 바빴다. 그 덕순이로 산행 마치고 나서 달달한 덕순주를 조제하여 수대로 마셨다. 빛샘 님에
대해 얘기를 더 하자면, 내가 그간 빛샘 님을 몰라봤다.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무서운 산꾼’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난봄에 주작 덕룡 만덕을 갈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 진면목을 오늘에야 보았다.
오늘 산행 도상거리 25km를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시종 선두를 유지했으니, 예전에 오지산행에서 영희
언니와 산아 님이 여러 남자 잡듯이(오지산행에 처음 나온 내 친구들이 연희언니를 얕잡아보고 금방 앞지를 듯 뒤따
르다가 종내 기진맥진하기 일쑤였다), 빛샘 님이 꼭 그 짝이다. 어떤 이는 반원 님이 리딩를 잘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리딩으로 될 일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뒤따르며 보는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반원 님은 부부 티를 내느라고 그러
는지, 빛샘 님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훌쩍 앞서 가버리곤 했다. 그 잰걸음 중에서도 풀숲
에서 덕순이를 찾아낸다는 건 실로 묘안(妙眼)이 아닐 수 없다.
성만재(1,132.4m)도 고개가 아니라 산봉우리다. 봉봉을 길게 내리면 불기령으로 가는가 보다 하고 잘못 알기를
세 번이다. 1,153.8m봉 넘고서야 남동쪽으로 방향 틀어 내리기 시작한다. 안타깝도록 뚝뚝 떨어진다. 용두암봉에서
이 V자 협곡을 보지 않았더라면 골로 잘못 가는 줄 알았으리라. 불기령(佛起嶺). 고도 997.9m나 된다. 돌들이 모여
있는 ┣자 갈림길 안부다. 분계령 또는 적현(赤峴),불귀령(不歸嶺)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분계령으로 지났다.
불기령 지나고부터는 비법정탐방로다. 금줄을 넘는다. 왜 여기서부터 가야산 상왕봉 직전까지 막았을까 궁금했는
데, 반달가슴곰이 출몰하니 조심하시라는 안내문을 보고서야 짐작한다. 반달가슴곰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두리봉 오르는 길이 불기령 내리는 길보다 더 수월하다. 숫제 엉금엉금 기어가지만. 빛샘 님과 반원 님은 선두
로 보이지 않게 가버렸다. 그 두 분만 멀쩡한 것 같고 나머지는 눈에 초점을 잃었다. 그저 관성으로 걷는다. 두리봉.
사방 나무숲 가려 아무 조망이 없다. 조금 더 가면 땡볕이 가득한 헬기장이 나오고 그 옆 숲속 공터에서 점심밥 먹는
다. 입맛이 쓰디쓰다. 물에 말아 넘긴다.
두리봉을 내리는 길은 잘났다. 두리봉을 한참 내리다 문득 내가 남산으로 이어지는 수도지맥 길로 잘못 가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갈림길을 확인하려고 뒤돌아 오른다. 나침반과 지도를 볼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제대로 가고 있다. 울창한 산죽 숲을 양팔 벌려 헤치고 나아가다 팔심이 부치면 허리를 잔뜩 구부려 지나기도 한다.
안부는 미역줄나무 덩굴 숲이다. 이제 긴 오르막이 이어진다. 부박령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코박이재
(1,071.0m)는 땅에 코 박고 오른다.
지도에 애써 눈을 돌린다. 상왕봉이 아직 멀었을지도 몰라서다. 모르는 게 낫다. 돌길을 오른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고 금줄을 넘는다. 너른 평원에 올라선다. 바람조차 시원하다. 연무는 가시지 않았다. 사방이 뿌옇다.
그러나 비법정탐방로에서 해방되기는 이르다. 좀 더 가서 카메라가 설치된 목책을 넘어야 한다. 모자 푹 눌러쓰고
목책을 넘는다. 카메라가 감지했는지 경고 방송이 나온다. 못 들른 채하고 여러 등산객들 속에 섞인다.
24. 왼쪽 멀리는 비계산
25. 광활한 사초 풀밭
26. 칠불봉(맨 오른쪽)과 그 동릉
27. 상왕봉(우두봉)
28. 함박꽃나무
29. 칠불봉에서 바라본 그 동릉
30. 가야산 남쪽 지능선
상왕봉 0.1km. 데크계단을 설치했다. 내 다시 살아난다. 씩씩하게 오른다. 상왕봉(우두봉) 정상 표지석과 인증사진
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우비정(牛鼻井)에는 거무튀튀한 물이 가득하다. 조선 중기의 학자 남계 이중
무(柟溪 李重茂, 1568∼1629)는 「가야록(伽倻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상에 두 우물이 있는데 서로 통
하여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날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 비에도 넘치지 않는다. 이끼가 그 바닥에 가득 끼었는
데도 맛을 보니 역시 달고 시원하였다. 이름을 ‘우비정(牛鼻井)’이라고 하였다. 이 산의 봉우리의 이름이 ‘우수’이므
로 우물 이름을 우비라고 한 것인가.”
이중환은 이중무보다 120년 후세 사람인데 이중무의 「가야록(伽倻錄」를 보지 않았다.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
‘산수’ 편의 내용이다. 상봉은 지금의 상왕봉인 듯하다.
“해인사 서북쪽이 상봉인데, 돌 형세가 사면으로 깎아지른 듯하여 사람이 오를 수 없다. 그 위에 평탄한 것이 있는
듯하나 알 수가 없다. 그 꼭대기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덮여 있는데, 나무꾼과 목동들이 봉우리 위에서 들려
오는 풍악 소리를 가끔 듣는다 한다. 절 스님 말로는 큰 안개가 끼면 산 위에서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
(寺西北爲伽倻上峯石勢戌削四面人不可升上似有平坦處而人不得以知之也其上恒有雲氣罩羃樵童牧竪時聞樂聲出
於峰上寺僧或傳大霧中山上有馬跡聲云)
또한 가야산 상봉과 백운대를 올랐다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도 그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우비정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은 어쩌면 상왕봉은 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
내용이다.
“점심으로 흰죽을 쑤어서 먹고 길을 떠났다. 이곳부터는 산길이 더욱 험하여 걸음걸이가 아주 힘들어졌다. 벼랑을
부여잡기도 하고 험악한 곳을 오르기도 하면서 마치 고기 꿰미처럼 한 줄로 서서 나아갔다. 앞사람은 뒷사람의 머리
꼭지에 붙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꿈치를 올려다보면서 거의 6~7리 쯤 가서야 비로소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하는 곳
에 올랐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힌 데가 없고 다만 저 하늘의 구름만이 먼 산과 아스라한 안개 끝에 서로 붙어 있을
뿐이다.”
바위틈에서 기화(奇花)를 본다. 처음 보는 꽃이다. 언뜻 보기에는 흰 꽃이 작아서 볼품이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쁘다. 흰참꽃나무(Rhododendron sobayakiense Y.Watan. & T.Yukawa var. koreanum Y.Watan. &
T.Yukawa)이다. 학명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산림청에서 희귀식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가야
산과 덕유산, 지리산의 산정 바위틈에서 자란다고 한다. 흰참꽃나무가 한번 내 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걸음마다
눈에 띈다.
상왕봉으로 오른 데크계단을 그대로 내려와 칠불봉을 향한다. 0.2km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칠불봉 가는 길도
데크계단의 연속이다. 칠불봉(七佛峰). 가야산의 주봉이다. 삼각점은 ‘가야 26, 2003 재설’이다. 왜 ‘칠불봉’이라
작명하였을까? “불교 범어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여, 가야산은 불교 성지란 의미를 갖는다. 가야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상왕봉(우두봉)의 ‘상왕’도 불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든 부처라는 뜻이다.”(향토문화전자대전). 칠불봉을
중심으로 연이은 7개의 암봉을 부처로 본 것은 아닐까?
31. 서성재 가는 길
32. 흰참꽃나무,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35. 만물상 능선
36. 만물상
▶ 만물상
하산. 발걸음이 사뭇 가볍다. 길고 가파른 데크계단을 내린다. 우리가 역행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성재에서
칠불봉을 오르는 중이다. 데크계단 끝나면 완만한 돌길이 나오고 얼마 안 가 데크로드가 이어진다. 서성재. 용기골
과 만물상 갈림길이다. 백운동주차장까지 각각 2.6km와 3.0km이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용기골로 하산한다. 반원
님과 빛샘 님도 전에 만물상을 두 번이나 갔었다며 용기골로 가겠다고 한다. 나는 가야산을 몇 번 왔었지만 만물상
은 들르지 않았다. 만물상을 간다.
빛샘 님이 500ml 페트 생수병을 건네준다. 거기는 암릉 암봉이라 고스란히 뙤약볕을 쬐게 될 거라며 물을 충분히
준비하시라고 한다. 나는 암릉 섞인 3km이라지만 1시간 30분이면 넉넉할 것이라 약간의 물만 있어도 버티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결과론적으로 오만할뿐더러 매우 안이했다. 빛샘 님이 건네준 생수가 ‘샘에서 솟아 나온 맑은
물’을 넘어 그야말로 ‘생수(生水)’였다.
만물상을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서 가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탐방인원은 300명으로 제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산
길에 만물상을 가는 것은 제한이 없다고 한다. 만물상 입장 아치문 표어가 눈길을 끈다. ‘매우 어렵다’라고 하며,
웬만하면 ‘용기골로 하산하시라’고 종용한다. 그러니 더 가고 싶어진다. 몰려드는 탐방인원을 제한할 정도이니 등로
는 좀 잘 정비했을까. 그랬다.
정작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이제 시작된다. 아치문 지나 잘 생긴 돌을 깐 오르막이다. 빠른 걸음 12분 올라 상아
덤(서장대, 1,141m)이다. 기암괴석이 도열한 그 정상은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상아덤을 내리는 데크계단에서 만물
상의 전모를 살필 수 있다. 층층바위로 이룩한 봉봉 암봉이 상상 밖으로 이럴 수도 있구나 할 만큼 묘하다. 안부는
하늘 가린 숲속이다. 곧 데크계단으로 암릉을 돌아 넘고 다시 안부로 내리기를 반복한다.
모자상, 부처바위, 곰바위, 상어바위를 골라내기 어렵다. 걸음걸음이 전후좌우 원경근경 경점이라 발걸음이 당초
예상보다 더디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암봉 오르내리며 짜릿한 손맛 볼 데는 모조리 막아놓았다. 오로지 눈으로 보는
만물상이고 그 능선이다. 여전히 원경은 흐릿하지만 만물상 근경은 화려하고 기이하다. 암릉 기암괴석은 능선이
맥을 놓을 때까지 이어진다. 한편 서성재에서 만물상을 가급적이면 가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칠불봉을 거쳐 온 하산 길일 것. 지치고 다리 힘이 풀렸을 때다. 아무리 데크계단이라지만
1,000m가 넘는 여러 암봉을 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일행 어느 누구도 전에 간 적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가지 않겠다는 이유도 알겠다. 나라도 이다음에 누가 함께 가자고 한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하겠다. 경치보다는
지치고 힘이 들어서다. 백운동주차장으로 내리는 길 바로 옆에 있는 가야산 야생화식물원을 들를 기력도 없다.
주차장 한쪽에 간단한 뒤풀이 자리를 마련했다. 입에 닿는 건 덕순주 뿐이다. 서울 가는 길, 올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 두 좌석을 차지하고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지만 너무 지쳐서인지 억지 졸음도 오지 않는다.
38. 만물상
40. 가야산 주릉, 가운데가 칠불봉
41. 뒤돌아본 만물상, 멀리 가운데가 상아덤(서장대)이다
42. 뒤돌아본 만물상, 멀리 왼쪽이 상아덤(서장대)이다
43. 하산 길 징검다리 등로
첫댓글 수도산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풍경이 발군입니다. 석화성의 별명이 딱 어울리네요. 걷기 힘든 긴 길 풍경 잘 봤습니다.
이날 그 풍경으로 만족했습니다.
이러다 일출 산행에 맛들일까 봐 걱정입니다.^^
가야산(석화성)의 일출이 끝내주네요, 장거리산행에 고생이 많으셨는데, 덕순이와 만물상까지 보시다니...애쓰셨습니다^^
가야산 정상에서 보는 일출은 더 장관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거기서 보는 일출은 겨울에나 가능하겠지요.^^
1타3피에 옛추억 소환까지 4피고만유~ㅎㅎ 이젠 20이상은 무리라 언감생심입니다 ㅜㅜ
3피는 일출, 덕순이, 흰참꽃나무?
아닌 게 아니라 어제 오늘 틀립니다.ㅋㅋ
더운데 가야산까지 가셨네요. 무리하신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풍광은 좋습니다. 저희는 놀며쉬며 ㅋ
관절 보링 한 번 한다는 생각으로 갔습니다. ^^
멀리 저의 고향 거창 가조 오도산과 비계산이 보이네요.
사진으로나마 반갑네요.
도자는 이번주에 금원산을 간다고 하는데, 고향이 더욱 그립습니다.
금원산 밑이 고향인 돌아가신 산그림애형님도 보고 싶네요.
아름다운 경치 구경 잘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거삼방 그 시절이 Those were the days 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졸업하기 전에 거창 가북면 중촌을 거쳐서 수도산과 가야산을 갔던 기억이 나네요.
억새가 끝없이 펼쳐져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억새밭이 크진 않았던 것 같은데.... ㅎㅎㅎ
옛날 운동화와 낡은 바지에 허접한 텐트 하나 달랑 들고 동네 불알 친구들과 1박으로 갔었는데, 그 때는 참 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척 좋은 동네에서 사셨네요.
일찍부터 산에 개안을 하셨습니다. ㅋㅋㅋ
두분 오랜만에 사진으로 뵙네요. 새벽 가야산 조망이 대단합니다.
여명을 보고 걷는 것이 무박산행의 즐거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