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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한 두 스님에 대한 회상
20년 넘게 절밥 먹고 살아오면서 많은 스님들의 입적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기 보다는 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 중에서 두 스님은 아직도 기억에 깊게 남아 있다.
설정스님
14개월의 행자생활을 마친 후 사미계를 받고 처음 강원에 입방했던 때가 1984년 가을이었다. 곧 겨울 안거가 시작되었고 큰 방에서 소임을 짰다. 석달 동안의 직책이다. 강원 3년차인 사교반에서 총책임자인 입승이 나오는게 관례다. 그 철 입승은 설정스님이 맡게 되었다. 1년차 제일 하반인 우리는 치문반. 시집살이가 제일 심한 반이다.
나는 후원 별좌 소임을 보게 되었다. 별좌란 절집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스님의 보좌역이다. 입방 전 원주실 시자를 보았으니 후원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당연한 일이었다. 결제에 들어간지 보름만에 방장 구산스님께서 열반하셨다. 당대의 큰 스님인만큼 재를 모실 때마다 엄청난 규모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절집에서 행사가 있으면 제일 힘든 일이 후원일이다. 수백 수천 명의 손님들을 먹이는 일이 어지 보통일이겠는가. 49재를 지내고 나니 정신이 하나 없다. 당시 나의 고질병은 구내염이었다. 혀를 비롯하여 입안 전체 여기 저기에서 염증이 생기는 병이다. 고통이 심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병원에 가도 속수무책이다. 그냥 영양부족과 피곤이 그 원인일 거라는 추측만이 당시 의학계의 빛나는(?) 진단이었다.
그저 소염 항생제 혈관주사를 맞는 것이 유일하게 빨리(3일이면 효과가 나나탄다) 낫는 방법이지만 또 다시 재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병은 십수 년이 더 지난 후 티벳의 포와 수행법으로 고쳤다. 우연히 체질이 좋아져 발병률이 떨어졌는지 포와수행법 덕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포와수행법 이후는 거의 발병하지 않았다. (포와수행에 대해서는 소걀 린포체가 쓴 <티베트의 지혜> 참조).
강원에서는 매일 아침 강의에 들어가기 전 상강례(上講禮례)를 올린다. 불보살 님들께 위없는 법문을 오늘 배우게 되는 것을 감사드리는 의식이다. 큰방 불단 앞에서 절을 올리며 그날 당번 스님이 선창하고 나머지 스님들이 따라하는 형식이다.
상강례는 강원 학인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한다. 그 해 봄 어느날 나는 입안이 아프다는 핑계로 지대방에 누워바렸다. 실제로 너무 아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문제는 치문반 반장에게 말도 하지 않은 무단결석이었다.
상강례가 끝나자 바로 소환되어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새카만 신입이 무단결석한 것은 3천배 참회감이다. 나는 나대로 여차하면 퇴방하여 날아갈 준비를 단단히 했다. 글공부 하기 싫어 절에 들어왔건만 다시 골치 아픈 한문을 새기고 외어야 하는 일이 따분했다.
하루라도 빨리 선방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아무런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버티기로 했다.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데 공사는 무신놈의 얼어죽을 공사여!! 절집이 언제부터 이렇게 살벌하게 된겨! 이제 생각하니 절밥 먹은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풋중의 의기가 가소롭다.
나중에 입승인 설정스님이 지대방(그땐 간병실도 없었다)으로 찾아왔다. 2년 선배이자 하늘같은 입승인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동갑인지는 같이 예비군훈련을 가면서 종무소에서 나온 소집통지서를 보고 알았다.
그가 들어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바로 퇴방하겠노라고 선수를 쳤다. 몸이 아파 대중생활을 하기 어렵노라고 하소연했다(라기보다는 배짱을 부렸다는 편이 맞으리라). 나를 훈계하러 온 입승스님이 멍한 표정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스님이 말하기 시작했는데 요점은 일체가 공하니 병이라는 것 자체도 원래 없다. 그렇게 알고 견디어 내라는 것이다.
말인즉 옳은 말이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러나 범부에에게는 당장 배가 고프고 잠이 오고 길 가다 넘어지면 아프다. 그리고 그런 감각이 전부가 된다. 그 상황에서 이론은 별 쓸모가 없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 그런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여 조화시키는가가 수행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퇴보하여 될대로 대라는 식으로 사느냐 하는 길림길이 된다.
겉으로는 "예, 그렇지요. 잘 알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제길, 누가 그걸 모른대! 알기는 알지만 당장 눈이 빠질 정도로 고통을 느끼고 거기에 정신을 못차리니까 문제지..." 하며 투덜거렸다.
아무튼 나의 버티기 작전은 성공했다. 3천배 참회는 없던 일이 되었다. 그렇게 두어 달 더 지내다가 선방에 대한 열망을 참을 수 없어 선방을 가기 위해 결국 1985년 5월 초순 걸망을 쌌다. 곧 여름 안거가 시작되는데 미적거리다가는 다시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조바심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통도사 보광전에서 첫 철을 시작하여 그 해 겨울안거까지 두 철을 그곳에서 지냈다.
겨울안거가 끝날 무렵 뜻밖에 설정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말을 들어보니 설정스님은 1년 남은 강원을 다 마치지 않고 중앙승가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상도동 약수암으로 가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책상 앞에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좌탈입망이 아닌 돌연사였다. 나로서는 왜 강원을 마치지도 않고 승가대학을 가고싶어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일이 그 스님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겠지만 말이다.
행자 시절부터 계산해서 그와는 불과 채 2년도 같이 살지 않았지만 옆에서 보니 참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 나이에 죽기엔 너무 아까운 스님이었다. 당시 송광사 불일학생회 책임 지도법사였던 스님의 권유로 큰방 입방 후 그와 함께 순천과 광주 학생회 지도법사 일도 보았다.
겨울 안거를 마친 후 약수암에서 설정스님 49재를 지내고 나오면서 이제는 한 줌 재로 변해 조계산 자락에 뿌려진 설정스님의 생생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제행은 무상한 것이라...
원봉스님
원봉(圓峰)스님은 행자 도반이자 수계 도반이다. 나보다는 6개월 정도 뒤에 들어온 터라 행자실에서는 군대로 말하자면 새카만 졸병이었다. 1984년 초 입산 당시 40세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승려증을 보니 42세 때였다. 그때 나는 그저 나보다 열 두 살 정도 많은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는 15년 연상이었다.
당시 지방 명문인 대전고를 나와 J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회사를 몇 군데 다니다 나중에는 백범사상연구소에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알 필요도 없다) 아내와 이혼하고 딸은 아내에게 맡기고 출가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학교를 다녔다. 이른 바 7080세대다. 1980년대 초 매일 매일 긴박하게 돌아가는 암울한 정치적 현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세상 일을 잊고 입산을 결심한 터라 더 이상의 투쟁은 없었다.
같은 사회과학도 출신이어서인지 우리는 말이 잘 통했다. 지금 생각하면 속물이 전혀 빠지지 않은 철없는 행자들이었다. 나이는 많지만 서열이 낮은 원봉스님(당시는 윤행자)는 늘 상행자의 꾸지람을 받기 일수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기존의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 적응이 힘들다.
무조건적인 하심(下心)같은 '비합리적인' 명령을 논리적, 이성적, 과학적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른 바 아상(我相)이 높기 때문이다. 아상은 아만과 같고 자존심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관념을 철저하게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바탕을 닦는 과정이 행자생활이고 그것을 통과한 사람만이 절집에 남아 있게 된다. 대체로 입산자 10명 중 7, 8명은 석 달 내 하산한다.
어쨌든 나나 원봉스님이나 이미 배수의 진을 치고 들어온 터라 아상을 꾹꾹 누르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나가면 정말 갈 데가 없다. 죽어도 여기서 죽자. 나는 그런 심정이었다. 모르긴 해도 원봉스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일단 복종을 하다보면 중물이 들어 하심이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행자 때는 내가 상행자였지만 사미계를 받는 순간부터 좌차(座次, 앉는 순서)가 바뀐다. 같은 날 계를 받으면 나이 순으로 좌차를 정하기 때문이다. 원봉스님이 당연히 우리반 최고 앞 자리에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10여년 이상(20년 차이가 나는 스님도 있다) 차이가 나는 도반들에게도 절대 말을 놓는 법이 없었다.
절집에서 좌차는 상당히 중요하다. 좌차는 출가 전 그 어떤 상태도 반영되지 않는 철저한 선착순, 'First come, first served' 이다. 단 강원에서는 승납 보다 학년이 우선한다. 즉, 10년 비구라도 강원 신입이면 제일 하판에 앉아야 한다.
강원 하판은 한 철 내내 공양시간에 물과 밥과 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수물 거두는 시중을 하루 세 번 예외없이 들어야 한다. 선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전통은 부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당시 천한 이발사였던 우바리 존자는 먼저 출가한 까닭에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중들었던 귀족 청년들보다 앞 자리에 앉았다.
일단 출가한 이상 이전의 지위는 없던 일이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출가의 의미가 없을뿐더러 승가의 질서는 무너지고 만다.
선방에서도 상판은 전망 좋은 앞 산을 바라보며 앉지만 하판은 침침한 뒷 담을 보고 앉아야 한다. 강원이 없는 단독 선방이라면 진지(공양시중)도 하판 몫이다. 물론 이런 규정은 출가한 순서대로 깨닫는 것은 아니므로 도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없다. 모든 조직사회가 그렇듯 이것도 다만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안전판일 뿐이다.
여름 안거를 마치고 잠깐 만행을 다니다가 다시 통도사로 돌아오니 객실에 원봉스님이 와 있었다. 선방 방부를 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겨울 한 철 같이 살았다. 2년차인 우리는 당연히 제일 하판에서 놀았다. 다행히(?) 통도사는 총림이라 강원 학인들이 있어 공양 시중은 면했다. 당시 그곳 선방은 강원을 졸업하고 온 스님들부터 선방에서 장판 때가 잔뜩 묻은 구참 수좌들까지 기라성같은 스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때 색시처럼 예쁘장하고 얌전한 H스님을 6년 전 길상사에서 우연히 만났다. 주름살이 참 많이 늘어 있었다. 이듬해 극락암에서 같이 살았던 35세의 팔팔했던 J스님을 몇 년 전, 16년 만에 쌍계사 선원에서 보았는데 50이 넘은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아마 그 스님들도 나를 보고는 '오호! 20대 후반의 그 앳된 스님이 이제 많이 늙었군!' 하며 세월의 간단없는 행진을 느꼈을 것이다.
겨울 안거 중 설정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원봉스님 역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원봉스님 역시 치문반 때 같이 학생회 지도법사 일을 했다. 입적한 설정스님에 대한 이런 저런 추억을 나누던 중 한 가지 불만을 얘기한다. 자기는 설정스님도 대전고 출신인 줄 알고 있었고 설정스님도 자신이 대전고 선배인줄 알고 있었을텐데 전혀 모른 척 해서 괘씸한 생각이 아직도 남아 있노라고 했다.
출가한 사람이 출신학교를 따져서 무었하리오마는 아직 절밥 먹은 지 얼마되지 않아 선후배 사이가 엄격했던 명문고 출신의 자부심이 남아있었을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속가물이 깊이 배어 있는 늦깎이라는 뜻도 된다.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는 것이 절집의 불문율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고향, 학력, 직업 등등 온갖 지나간 흔적을 심심풀이 땅콩 먹듯 이야기 주제로 올리는 것도 부인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어쩔 것인가. 승가 역시 독립된 영역이 아닌 중생계의 한 부분이니...
원봉스님과 다시 만난 것은 86년 겨울이었다. 나는 그 때 통도사에서 같이 살았던 C스님이 주지로 있는 소백산의 한 조그만 암자를 방문했다가 지독한 감기가 들어 선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얼마 후 원봉스님과 연락이 되어 합류했다. 그리고 서너 달 같이 지내다 결제가 다가오는 87년 봄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90년 봄 나는 5년만에 송광사로 들어가 선원에서 1년 살고 후원으로 내려와 6개월 원주를 살았다. 그리고 91년 말부터 토굴 담을 쌓는 공사를 했다. 석 달에 걸친 작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사제(사제긴 해도 수계 도반이다) 대경스님로부터 원봉스님이 입적했다는 뜻밖의 연락이 왔다. 1992년 3월 1일이었다. 당장 내일 아침 천은사에서 다비를 한다고 한다. 대경스님은 내 뒤를 이어 원주를 살고 있었다.
부랴부랴 먼 길을 돌아 광주 터미널 근처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겨우 천은사에 도착했다.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호숫가에 스님들이 모여 있었다. 이미 불을 지핀 모양이다. 도반들 중에는 연락이 닿은 보림, 정인스님이 왔다. 현재 길상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는 덕조스님은 대만 유학 중이어서 오지 못했다.
송광사에서 현봉스님과 영진스님, 일귀스님이 오셨다. 원봉스님의 사형인 오성스님과 성우스님, 그리고 수선사에서 한 철 같이 살았던 화엄사의 만해스님도 보였다. 속가 형님 두 분도 연락을 받고 왔다. 모두들 갑작스런 원봉스님의 입적 소식에 허탈해 했다. 오후에는 추적 추적 비가 내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 지도법사를 했던 금산사 청년회 회원들도 소식을 듣고 금산사 스님들과 함께 오후에 왔다.
자살이었다. 우리는 전혀 몰랐지만 지병이 있었다. 청년 회원들 말에 의하면 법회 중 아주 고통스러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염려하는 청년들에게 원봉스님은 내 병은 내가 잘 아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다. 나중 유서를 보니 암이 발전하여 더 이상 병원에서 치료가 불능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스님은 남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조용히 걸망을 챙겨 천은사로 왔다. 걸망이라고 해야 가사와 발우 그리고 갈아 입을 옷 한 벌이 전부다. 통도사 선방에서 그리고 소백산 암자에서 살 때 보니 정말 짐이 없는 스님이었다. 누가 옷을 해준다 해도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스님은 자신의 임종 장소를 천은사로 택했다. 천은사 선방에서 예전에 한철 살았다고 한다. 아마 그 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며칠 객실에서 머물던 스님은 어느날 오후 뒷산으로 올라가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라 시신은 한참 지난 후 춘란을 캐러 올라갔던 마을 청년에 의해 발견되었다. 2월 29일 발견되었으니 입적 후 17일간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한 겨울이어서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은사의 연락을 받고 대경스님이 도반들에게 연락하고 바로 천은사로 달려가 시신을 염했다. 이미 꽁꽁 얼어 있는 시신을 펴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옷 속에는 속가 형님과 천은사 주지스님에게 드리는 글과 처절한 '열반송'이 들어 있었다. 성실한 대경스님은 그것을 복사하여 도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향년 51세. 유서를 쓰는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니 얼마나 비감했을까. 스스로 목숨을 거둔 스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암이 발전함에 따른 엄청난 고통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고통의 강도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자살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종단의 복지제도도 없고 후원해 줄 반연도 없이 행운유수 떠도는 운수납자에게 요양시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일 뿐이다. 그런 것을 감수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출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문제는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회생불능의 상태인 원봉스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마 나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입적한 나무 아래에 놓여 있었다는 <베리나인골드> 반 병. 차마 맨정신으로는 자신의 목에 줄을 걸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이혼을 했지만 한 때 사랑했던 아내와, 한 점 혈육인 딸아이의 얼굴도 떠올랐으리라. 고통을 참으며 술 한모금 넘기며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겨울비가 내리는 오후 내내 연못 가 다비장에서 타는 시신을 지켜보았다. 엉덩이 근처에 유난히 기름이 많아 오래 탔다. 암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스님의 유골을 수습하여 쇄골하고 스님의 원대로 지리산 자락에 뿌리며 다음 생애는 부디 튼튼한 몸을 받아 좀 더 일찍 출가하시기를 기원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쁨도 슬픔도 아닌 담담한 소리의 목탁과 요령 소리가 지리산에 울려 퍼졌지만 그 소리에 맞추어 법성게를 염송하는 스님네들의 목소리에 약간의 처량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생사윤회의 큰 바다에서 나고 죽는 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이어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순서만 다를 뿐 누구나 그리고 언제든 자기 차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곧 평정심으로 돌아왔다. 나는 야운스님의 자경문 한 대목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주인공아, 네가 도를 만난 것은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에서 의지할 나무를 만난 것과 같으니 짧은 생에 어찌 도를 닦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는가.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라. 이번 생에 발을 헛디디면 만 겁에도 만나기 어려우리니, 모름지기 열 가지 계법을 지켜, 날마다 새롭게 부지런히 닦아 물러나지 말고, 속히 정각을 이루어서 돌이켜 중생을 제도할지니라.
사시 불공 후 천은사에서 3재를 지내고 도반들끼리 모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해마다 한 번 겨울 안거 해제 후 원봉스님의 재도 모실 겸 도반들 모임을 가지자고 했다. 그러나 '생업'에 바쁘다 보니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공염불이 되고 있다.
수계도반 11명 중 2명은 속퇴하고 1명은 입적했고 1명은 타종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남은 이는 7명. 수계한지 20년이 넘었건만 아직 같이 모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나도 그렇지만 참 무심한 중들이다. 모두들 절집에서 우스게로 말하는 '각각등보체'들이다.
소백산 시절 달 밝은 밤이면 암자 뒤 산으로 올라가 '일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를 목청껏 부르던 원봉스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원봉스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0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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