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56]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고
동시에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매듭을 끊는 사람이고
스스로 매듭을 연결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고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다
넘어지는 사람이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떠나가는 사람이고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타데우시 루제비치 (Tadeusz Ro′zewicz·1921~2014)
(최성은 옮김)
/일러스트=김성규
말장난처럼 보이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마지막 행에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의 여운이 무겁다.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며,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작은 치약과 여행용 화장품을 모으는 게 내 취미!) 짐을 쌌다 끌렀다, 한평생이 지나갔다.
마치 내 머리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이 쓴 것 같은 시를 읽고 시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루제비치는 1921년에 태어난 폴란드의 시인이며 극작가로, 2차 세계대전 때 점령군 독일에 저항한 지하 무장 조직에 가담했다. 루제비치의 형도 시인이며 레지스탕스였는데 게슈타포에 처형당했다. 간결하고 핵심을 찌르는 힘이 있는 언어, 죽음의 문턱에 갔다 왔던 사람의 시는 장황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어떻게 서정시를 쓸 것인가, 라고 유럽의 어느 지식인은 절규했다. 인류가 경험한 적 없었던 집단 학살,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쓰였다. 비트코인과 유튜브 이후에도 시는 살아남을까.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니 떠나고 싶다.
#최영미의 어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