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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Antonio Puerta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
-아서 웰즐리-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위기에 처한 프랑스에 홀연히 나타나 전유럽을 발라버리고 황제가 된 사나이.
당대에 수많은 장군들이 있었으나, 전쟁에 있어서 그를 따를자가 없었다.
애초에 '작전술'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1. 이탈리아 원정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의 귀족 아들로 태어났다. 초창기 그의 활동을 보면 민족주의자로 보이는데,
코르시카의 독립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군에 복무하면서
프랑스혁명에 빠져들었고, 코르시카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렸다.
루이 16세가 사형당하자 각 나라들은 깜짝 놀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공한다.
참가한 나라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나폴리, 피에몬테, 교황령, 프로이센, 샤르데나, 포르투갈, 스페인(제1차 대프랑스 동맹)
툴룽에서 포병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천재적인 전술로 왕당파의 반란군을 제압했고, 초급장교에서
사단장으로 진급,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25살에 대장이 되었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당시 이탈리아에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이 싸우고 있었는데, 3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자 나폴레옹에게
4만명의 군대를 주어서 전장에 투입한다. 4월달에 투입된 그는 곧바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5월달에 밀라노를 점령했고
한달만에 사르데냐 왕국군을 항복시켰고 북이탈리아 최대의 거점인 만토바를 포위한다.
나폴레옹과의 카스틸리오네 전투, 알 코레 전투, 리보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는 모두 패배했고 결국 만토바는 함락,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는다. 이로서 제1차 대프랑스동맹은 붕괴되었고 오직 영국만이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했다.
나폴레옹은 고작 몇달 사이에 12차례의 승전보를 올렸는데 모두 뉴스속보로 유럽 전역에 알려졌다.
이때 속담으로 '뉴스 속보 같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이집트 원정과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나폴레옹의 흑역사중 하나. 이집트 원정갈때만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3주만에 이집트를 정복했으나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의 넬슨이(트라팔가 해전의 그 넬슨 맞다.) 프랑스 해군을 습격, 전멸시키므로서
나폴레옹은 퇴로가 끊겼고 보급이 되지 않아 곤경에 처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특단의 결정을 내리는데,
몇몇 장군들과 함께 배 한척에 나눠타서 다른 장군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프랑스로 도망쳤다...;;
프랑스군은 분전했으나 결국 오스만제국에 항복했으며 이 결정에 프랑스의 총재들은 분노했으나
여전히 프랑스의 국민들은 그를 지지했고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
응?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하지만 권력자가 제발로 물러날리가 없잖아
당시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오스만 제국이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고 있었기에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이러한 나폴레옹의 집권은 별다른 반대를 받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2번째로 이탈리아 원정을 시도했는데
알프스를 건너서 오스트리아의 배후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은 밀라노와 파비아를 장악했고
마렝고 전투에서 드제의 도움에 힘입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다.
오스트리아는 호엔린덴에서도 패배, 강화를 맺었으며 이번에도 영국만이 홀로 프랑스와 싸웠으나 결국
아미앵의 화약을 맺었다. 나라를 구한 나폴레옹은 전국민적인 지지에 힘입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전유럽이 경악했다.
기존의 나라들은 정통성이 깨지고 코르시카의 변방귀족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격렬하게 그를 비난했으며
프랑스내의 보수주의자들도 그에 반항했다. 유럽의 각국의 지식인들은 그를 유럽의 구원자라 칭송했었지만
이 결정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실망하여 등을 돌렸다.
"그래, 그도 결국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이제 그는 인류의 권리를 짓밟고 자기의 야망에 빠져들 것이다.
누구보다 뛰어난 자이니, 그는 전제군주가 되고 말 것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여담이지만 이때 프랑스의 식민지들도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독립한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3. 트라팔가 해전, 아우슈터리츠 전투
나폴레옹 최고의 리즈시절.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러시아, 나폴리는 동맹을 맺는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은 이에 영국을 공격해 굴복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군대를 집결시켰다.
영국 본토로 건너갈수만 있다면, 영국을 점령할수 있다고 자신했다.
"단 6시간만 도버해협을 장악한다면, 나는 세계를 손에 넣을수 있을 것이다."
(당시 대영제국은 전세계 국토의 거의 1/4를 장악한 자타공인 세계 최강국이었다.)
이 틈을 노려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은 뮌헨을 점령하고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600km를 고작 한달동안 주파하는 경악스러운 기동력을 보이며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올름전투에서 완패시키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함락시킨다.
이때쯤, 영국의 운명을 건 해전이펼쳐졌는데, 영국의 제독 넬슨은 여기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전멸시키고 자신도 전사한다. (트라팔가 해전) 이로서 넬슨은 불멸의 명성을 손에 넣었다.
어쨌든 나폴레옹은 계속 진군, 아우슈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조우한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2세,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직접 지휘했기에
삼제전투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중앙에 강공을 퍼부어 프라첸 고지를 차지하고 동맹군을 양분,
두명의 황제를 압도적으로 패배시켰다. (아우슈터리츠 전투) 영국의 수상이던 윌리엄 피트는 이 소식에 너무 놀라서 병세가 악화,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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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사실상 항복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립을 지키던 프로이센은
(도대체 뭔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프랑스에게 선전포고, 단독으로 프랑스와 대결했고
이러한 프로이센에 고무된 러시아는 조약을 철회하고 다시 싸움을 걸었다.
이때 참전한 국가가 프로이센, 러시아, 작센, 영국, 스웨덴.(제4차 대프랑스 동맹)
예나-아우어슈테트전투에서 프로이센의 15만 병력이 모조리 전멸,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동맹을 맺었으나 또다시 대패,
틸지트 강화를 맺는다. 이때가 나폴레옹의 최전성기로, 거의 전유럽을 석권했다.
한편 스페인에서의 반란으로 프랑스는 곤경에 처했고 이를 본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또다시 동맹을 맺는다.
(제5차 대프랑스 동맹.... 그만해 미친놈들아) 놀랍게도 오스트리아는 한차례 나폴레옹을 패배시킨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전투중 첫번째 패배였다. 물론 그다음부터는 계속 발린다...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는 대패했고 또다시 휴전조약을 맺는다.
4. 대륙봉쇄령과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 몰락의 시작. 나폴레옹은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대륙봉쇄령을 내리는데, 유럽의 나라들은
영국과 교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처음에 이를 참여했으나, 경제적인 타격이 너무 커서 철회했는데
이에 러시아를 침공했다.(러시아 원정) 이때 나폴레옹의 군대는 약 77만이었고, 러시아의 군대는 90만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러시아의 지휘관은 여러 사정이 있었으나, 결국 쿠트조프가 맡게 되었다. 당시 67세의 노장이던 그는 일찍이
아우슈터리츠 전투에서 절대로 나폴레옹과 싸우면 안된다고 강변해 패전 이후 황제의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그는 청야전투를 계획했고, 싸우지 않고 프랑스군을 계속 소모시켰다.
(싸울려고 할때마다 나폴레옹이 상식을 뛰어넘은 속도로 기동전을 펼쳐서 후퇴해야만 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보르디노 전투에서 쿠트조프는 13만 병력을 모아 12만의 나폴레옹과 회전을 벌였고, 패배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회군할수밖에 없었고 러시아군의 맹추격이 시작되어 회군할때 오직 5천명밖에 남지 않았다.
5. 나폴레옹의 몰락
러시아 원정의 가장 큰 의미는, 나폴레옹을 이길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수많은 나라들이 동맹을 파기하고 또다시 프랑스를 격퇴하기 위해서 뭉쳤다.
참전국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라인동맹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사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과 정략결혼을 맺고 있어서 고심하다가 나중에 참전한다.
스웨덴도 나폴레옹의 부하가 왕이 된지라, 고민하다가 나중에 결국 배신으로 참전한다.)
나폴레옹의 주력군은 스페인에 묶여있었고, 70만에 달하던 군대도 전멸, 다시 군대를 모집하긴 했는데
고작 20만 정도였다. 비록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쿠투조프가 병으로 빠지긴 했으나, 그들의 군대는 프랑스의 배를 넘었고
나폴레옹은 벼랑끝에 몰린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현실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이 나폴레옹에게 털리고 있었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뤼첸에서 러시아,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게 대패하여 자칫하면 전쟁의 승패가 결정날뻔 했으나,
러시아에서 기병대가 전멸했기에 추격할 기병대가 없어서 동맹군은 전멸을 면한다.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와 바우첸에서 싸웠는데, 정찰부대의 무능으로(물론, 베테랑은 모두 러시아에서 죽었고 다들 신병들)
상대의 병력을 배이상 많다고 잘못 판단, 조심스러운 정공법으로 격퇴하긴 했으나 많은 피해를 입는다.
거기다 도망치는 군대의 퇴로를 끊으라고 보낸 미셸 네 원수는 헛짓거리를 해서 또다시 동맹군은 전멸을 면한다;;
동맹군은 계속된 패전에 자신감을 상실, 한달간의 휴전을 요청했고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이 나폴레옹이 스스로 말했던 최악의 실수였다.
나폴레옹의 장인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2세는 동맹군이 털리고 있자, 참전할 생각을 접었으나 휴전이후
각국의 간절한 설득으로 동맹에 참여한다. 거기다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국왕으로 있는
스웨덴도 참전, 트라헨부르크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프랑스의 망명장군인 모로는 러시아 황제에게 이 작전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폴레옹 황제가 직접 공격에 나서면 그때마다 우리는 패하는겁니다. 가능할때마다 황제의 부하들을
공격해 싸우십시오. 일단 그들이 패하면 전병력을 몰아 나폴레옹을 치되, 결코 틈을 주시면 안됩니다."
즉, 나폴레옹이 직접 이끄는 군대와의 교전은 피하고 다른 프랑스의 장군들이 이끄는 군대하고만 싸우자는 작전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거 로마가 한니발과 싸울때 쓴 방법이다. 이래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털리지도 않았잖아;;)
나폴레옹은 계속 승리했으나 부하장군들의 패전으로 시시각각 군대의 규모가 줄었으나
나폴레옹은 드레스덴 전투에서 13만 5천의 프랑스군으로 21만 4천의 동맹군을 갈아엎으며 여전히 괴물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전세의 불리함은 어쩔수 없었고, 나폴레옹은 19만 병력을 결집시켰는데,
이를 36만의 동맹군이 포위, 결국 나폴레옹 생애 2번째 패배가 이루어진다. (라이프치히 전투)
나폴레옹은 새로 모집된 4만의 병력으로 블뤼허가 이끄는 10만을 격퇴하였다.
(6일전쟁. 여담이지만 6일전쟁은 나폴레옹 사상 최고의 작전이라고 불린다.)
이 6일전쟁에 슬슬 동맹군들은 나폴레옹이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프랑스 혁명 이전의 영토로 돌아간다면 전쟁을 멈추겠다는
관대한 제안을 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프랑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퇴위를 강요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퇴위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되게 된다.
6. 나폴레옹의 귀환
나폴레옹의 귀환과 백일천하. 나폴레옹이 유배된뒤 프랑스는 왕정이 복고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그리워했고, 프랑스병사들과 농민들은 나폴레옹의 귀환을 촉구하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엘바섬에서 탈출을 감행한다. 그의 휘하엔 오직 1천명이 있을뿐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들을 이끌고 파리를 향해 진군했는데, 그 와중에 제5보병연대가 있었으나 나폴레옹은
그들이 자신을 따를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연대장은 사병들에게 "나폴레옹의 병력은 1천에 불과하니 겁먹지 마라."라고 말했고 그러자 사병들은
"어째서 1천입니까? 우리도 함께 계산해야죠." 라고 대답했다.
나폴레옹의 군대와 그 연대가 대치하자, 나폴레옹은 혼자 앞으로 나아가면서 외쳤다.
"제 5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짐이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나폴레옹의 별명)이다.
원한다면 그대들의 황제를 죽여라!"
이때 지휘관은 발포명령을 내렸다. 수천의 병사중 단 한사람이라도 발포했다면 여기서 나폴레옹은 죽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쏘지 않았고 그들 모두 나폴레옹에게 합류했다.
프랑스는 다시 나폴레옹의 발밑에 넘어왔고, 나폴레옹은 다른국가들과 평화협상을 맺으려 노력했지만....
7. 워털루 전투
맺을리가 있나? 나폴레옹을 쓰러뜨릴려고 고생한게 얼만데.
그들은 전쟁뒷처리 문제로 싸우고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급하게 단결, 동맹군을 결성한다.
참전국은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포르투갈, 독일연방, 스페인, 스웨덴, 하노버, 샤르데냐, 네덜란드, 토스카나
(제7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은 이를 각개격파하기 위해서 병력을 이끌고 나아갔고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을 격퇴하고 워털루에서
영국 최고의 명장 웰링턴과 맞붙게 된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패배했다. 정말 간발의 차다.
나폴레옹답지 않게 그렇게 많은 삽질을 했는데... (여담이지만, 나폴레옹은 치질때문에 아편을 먹고 전쟁에 참여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번엔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 그곳에서 생을 끝마치게 된다.
9. 당대의 평가
헤겔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나라를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하자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절대정신이 간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인물이었네. 그는 항상 명석했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또한 어떤 일이 유리하거나 필연적이라고
인정되기만 하면 그것을 즉각 실천에 옮기는 선천적인 정력을 언제나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네.
그의 일생은 전투에서 전투로, 승리에서 승리로 이어지는 일생이었어. 그는 언제나 정신이 맑은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네. 때문에 그의 운명은 온 세계를 통하여 전무후무할 정도로 찬란한 것이었어.
그 사람은 정말 위대한 인물이었지. 우리들은 그의 흉내도 낼 수 없을꺼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나는 보나파르트의 찬양자는 아니나, 그의 탁월한 재능과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캐닝-
"그토록 용맹한 전사, 가장 심오하게 생각하는 사람, 역사상 가장 비상한 천재"
-스탈 부인-
"인간적인 위대함, 고요한 명석함, 천부적인 강인한 의지력, 바로 이런 요소들을 갖춘 그가
만일 인류의 윤리적 운명에 대해 조금이라도 분별심을 가지고 그의 이성을 비춰주었더라면
그는 인류의 은인이자 해방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요한 G. 피히테-
"군대가 나폴레옹과 함께 있으면, 그 정신적 효과는 4만의 병력과 맞먹는다."
"당시의 원정을 연구해보니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천재성에 새삼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조금만 더
그런 시스템을 지속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공격보다 방어에 주력했다면, 우린 파리에 들어갈수 없었을 것이다."
-아서 웰즐리-
"그의 생애는 최근 천년간 가장 비범한 것이다. 생애와 자질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분명히 위대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그를 가까이서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는 확실히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비범한 인간이었고,
우리 시대, 혹은 여러 시대를 둘러보아도 가장 비범한 인물이었다."
-탈레랑-
"이 비범한 인간을 판단하려면 우리는 그가 태어난 대극장으로 그를 따라 들어가야 한다.
운명의 여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나폴레옹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그는 성격적인 힘과 정신의 활동력과 명석함으로,
그리고 군사과학을 놀랍게 짜맞추는 천재성으로 운명의 여신이 그를 위해 예비해 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오로지 한가지 열정, 최종목표인 권력을 향하여 질주할뿐, 불필요한 대상에 시간이나 수단을 절대 낭비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배자인 그는 곧 역사적 사건들의 지배자가 되었다.
어느 시대에 태어났어도 그는 탁월한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메테르니히-
"진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혼을 불어넣은 가장 강력한 숨결,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샤토브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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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첫댓글 잘 봤습니다 :)
헌법틀도 다지지 않았던가요?
법전 정비라든가 로제타석 해석 같은 깨알 같은 업적들도 많죠...
나폴레옹 키가 167정도라는데 사실인가여?
장군치고는 작은키인데... 조조처럼 전력가이고 실제 전투는 참가안한 스타일이였나
160 초반일 겁니다.
167 정도인데 당대 프랑스 평균 따지면 작은 키가 아닙니다. 키가 작다는 오해가 생긴건 영국애들이 프랑스의 pied 단위를 자기네 feet 단위로 헷갈리는 바람에 작아진거죠.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는 이미 대포를 이용한 포격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무슨 페르시아 전쟁 시절도 아니고 사령관이 최전방에서 칼들고 돌격하던 시기가 아니죠.
러시아로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정말로 유럽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러시아 침공은 거대한 전략적 실수였죠. 대륙봉쇄령 또한 실패로 돌아간 전략이었구요. 나폴레옹은 전략에 있어선 전술만 못하다고 봅니다.
사실 러시아로 처들어가지 않았다면 영국이 경제적으로 먼저 망해서 나폴레옹의 생각대로 되었을겁니다. 당시 영국의 수많은 상가들이 봉쇄령때문에 파산하고 망했고 경제적으로도 위기가 찾아왔죠. 봉쇄한 프랑스와 그의 명령을 듣는 유럽국가들도 괴로웠지만 고립된 영국은 더욱 괴로운 상황이었습니다. 필요한 급한 물자같은건 해외식민지로 어느정도 때울수있지만 한계가 있었죠. 나폴레옹 최대의 실수는 결국 러시아 원정뿐 대륙봉쇄령 자체는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깎는데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대륙봉쇄령은 분명히 영국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유럽대륙에는 더욱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영국은 대륙에서 수입하던 식량이, 대륙은 영국을 통해 들여오던 원자재가 각각 부족해진 상황인데 영국은 식량을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걸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지만 바다를 내준 대륙은 그게 안됐죠. 결국 러시아를 필두로 여러 유럽국가들은 영국과 밀수를 했고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영국의 밀수품이 끊임없이 유통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러시아가 봉쇄령을 파기하고 영국과 무역을 공식적으로 재개했고 나폴레옹은 본보기를 위해 러시아 침공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그냥 놔두면 모든 나라들이 러시아를 따라할 것이 분명하니까요.
즉 대륙봉쇄령은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한 전략이며, 또한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영국과의 교역관계를 통한 국민경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프랑스 일국이 그 체제를 인위적으로 무너뜨릴 순 없는 거죠. 대륙봉쇄령이 성공하기 위해선 프랑스가 영국의 위치를 대신해야 했는데 당시 프랑스에게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나폴레옹이 그렇게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고 차근차근 대륙봉쇄령에 반하는 나라들을 장악해 갔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죠.
대륙봉쇄령 당시에 나폴레옹에 반하던 국가들은 포르투갈, 스웨덴 정도였는데 원정 같은 무리한 행위 말고도 이 나라들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스웨덴은 부하였던 베르나도트(이놈은 사실 부하라기보다는 웬수지만)를 통해서 나폴레옹 진영이 된 셈이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도움으로 제압한 상태였죠.
영국에게 남은 건 러시아를 위시한 북해 무역 뿐이었는데 이조차 나폴레옹이 네덜란드를 합병하고 북해 연안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이 당대 최고의 해군력을 가졌지만 북해의 좁은 특성상 연안 국들을 죄다 장악해버리면 러시아든 영국이든 버틸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쓸데 없이 스페인에 욕심을 부려서 동맹국인 스페인을 자기 형에게 던져줬고 그 결과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엄청난 전력이 의미없이 스페인에 묶여 있어야 했으며 러시아를 고사시키기보다는 무리하게 한방에 밀어버리려는 러시아 원정의 무리수를 두어 버리죠.
대륙봉쇄령을 선포할 당시에는 나폴레옹에게 충분히 승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식민지 수준으로는 절대 영국은 유럽 본토와의 교역 없이 버틸 수 없었던 반면 유럽은 자기네끼리 무역이 가능했으니까요.
우선 대륙봉쇄령은 영국과 대륙국가들간의 교역을 봉쇄하지 못했습니다. 밀수는 프랑스에서조차 활발히 이루어졌죠. 두번째로 영국은 남아메리카와의 무역을 활발히 성사시켜가고 있었습니다. 분명 영국이 대륙봉쇄령으로 받은 타격은 엄청났지만 영국을 경제적으로 괴멸시키기 위해선 대륙 또한 괴멸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어요. 특히 유럽 각국이 나폴레옹의 강권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관세장벽은 유럽을 요새화한 경제진영으로 나누었고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미 시대의 경제 상황은 '유럽 바깥이 막혔으면 유럽 안에서 해결한다'가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또한 북해연안을 장악하려는 중에 러시아 황제의 매제가 다스리던 공국을 합병한 것이 러시아와의 충돌을 본격적으로 만들었단 점을 고려해보면 나폴레옹과 프랑스가 어떤 노력을 쏟아붓는다 해도 결국에는 유럽 전체를 봉쇄할 순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베토벤의 "영웅"이 원제가" 나폴레옹" 이였다고, 세계사 시간에 들은적이 있는데.. 자세한건 모르겠고,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는 곡인건 맞는것 같습니다.
헌정하려 했다가 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르자 실망하여 취소했습니다.
전략이라는 개념이 작전술의 하위단계로서의 전략을 의미한다면 모를까 작전술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뛰어난 인물은 아니죠.
커리어로 봐도 이집트 원정, 스페인 원정, 러시아 원정은 변명이 안되는 작전술의 삽질인데 차라리 나폴레옹보다는 프리드리히가 더 낫지 않나 싶네요.
그리고 유럽 역사상 최고의 전략의 대가라면 만슈타인이 아닐까요?
동감합니다
잘 읽고가요~~
nasica란 분이 다음 블로그에 나폴레옹의 역사를 정리해 올려주고 계시지요. 지금 아우스터리츠까지 하셨는데 필력이 장난아닙니다. 들러보시면 재밌을 거에요
전쟁을 잘하는 전략가가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까요?
이순신이야 다른 나라의 침략을 전략적으로 방어한 장군이지만
나폴레옹은 침략자 아닌가요.
위인전은위험한책입니다.저는 어릴때 나폴레옹 위인전 몇번이나보고 참멋진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햇는데 전쟁광에 수많은사람들이희생됏겟죠. 어릴때 저런사람들 위인전기는 안읽는게좋다고생각합니다
정말 재능 있었던 사람이였던것은 맞는것 같습니다. 라플라스제자였는데, 군입대 한다고 했을때 그렇게 안타까워 했다고 하죠
재능만은 인정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나폴레옹 법전도 대단한 업적이니까요.
나폴레옹 잘 봤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략보다 전술의 대가가 맞을듯.클라우제비츠의 말대로 전쟁의 신이죠.아서 웰즐리의 말 또한 나폴레옹의 위력을 나타내주고요. "보니 한 사람이 3만의 병력에 필적한다." 그리고 스키피오 광빠인 리델 하트조차 나폴레옹만큼은 스키피오와의 비교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였죠.한니발.알렉산더 대왕조차 스키피오 발끝에도 못미친다고 했던 사람이....
헐;;;;; 나중에 나폴레옹 쓰려고 했는데 ㅜㅜ 그리고 '유럽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 라는 제목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고대까지 다 포함시킬 경우 무적의 불패신화 알렉산드로스가 떡하니 있죠.
전 알렉산드로스도 카이사르에게 전략이란 측면에선 밀린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행을 보면 과연 알렉산드로스에게 최종적인 전략 구상이란게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어요. 병사들이 파업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인도까지 쳐들어가려 했는데 인도의 넓이와 기후등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알렉산드로스라 해도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의문이죠. 그에 반해 카이사르는 명확한 목표와 그를 이루기 위한 전략이 있었고 그를 완벽하게 수행해내죠.
동의가 안됩니다. 카이사르는 오히려 전략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던 장군이죠. 괜히 전쟁의 역사에서 몽고메리가 카이사르를 가루가 되도록 까는게 아니에요. 알렉산더의 경우 수백년 뒤에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을때 알렉산더의 진행로를 그대로 따랐을 만큼 이론의 여지 없는 완벽한 진군로를 보였습니다.
아무리 당시 페르시아가 정치적인 위기였다고 할지라도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는데 걸린 시간과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는데 걸린 시간이 비슷할 지경입니다. 페르시아는 당시 세계 최강 문명이고 갈리아에는 나라라는 개념조차 없는 부족민들이 산개된 수준이었는데 말이죠.
갈리아 원정 당시 무의미한 호기심으로 브리튼 섬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갈리아의 부족들이 재결집하여 반격당하는등 오히려 카이사르는 전략적인 면에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죠.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를 유명하게 한 알레시아 공방전조차 포위 자체는 카이사르의 의도였지만 이후 역포위 당하면서 앞뒤로 포위당한 위기상황이었습니다. 로마군의 전투력과 카이사르의 임기응변이 결국 승리를 이끌었지만 이건 전술적 승리지 전략적인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죠.
카이사르는 전략적으로 뛰어나다기보다는 특유의 친화력과 천재적인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났던 장군이라고 봅니다.
전쟁의 역사는 저도 읽어봤지만 몽고메리의 카이사르에 대한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책 자체가 자신이 이긴 롬멜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의 승리는 길게 서술하면서(2차대전 전체가 30여 페이지 분량인데 몽고메리 최대의 전공이지만 2차대전 젅체로 봐선 외곽부의 싸움이었던 알라메인 전투를 세 페이지 이상에 걸쳐 자세히 쓴건 참... ) 마켓가든 작전 같은 중대한 실패는 언급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등 그닥 신뢰가 가지 않는 책이죠.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속주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를 완벽히 실행해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세계를 정복하려 했던거 같은데, 그건 언젠가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목표가 아닐까요.
포루스왕을 격파하고 인도를 정복하려 했지만 인도가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고 있었죠. 당시 인도엔 포루스왕이 다스리던 파우라바보다 훨씬 넒은 땅과 훨씬 많은 병사를 가진 왕국들이 여럿 있었고 지중해지역, 그리고 페르시아 지역과도 전혀 다른 기후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나도 어려운 원정이 될 것이 분명했죠. 개인적으로는 병사들이 그 때 파업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에서 결국엔 패배를 맛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갈리아 정복과 페르시아 정복의 난이도를 비교하는 것도 달리 생각해보면, 분명 페르시아가 훨씬 더 문화적으로 발달한 선진문명이지만 어차피 병사들의 육탄전으로 전투가 결정되는 그 시대에 야만적인 갈리아인들이 전투에서도 더 쉬운 상대라고는 할 수 없죠. 왕을 없애고 귀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면서 중앙집권화된 왕국을 차지하는 것과, 작게는 수천 크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수십여개의 야만스런 부족들이 어떤 중앙정치적인 기구도 없이 난립한 상태의 지역을 완벽하게 평정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지도 생각해봐야 할 일이구요. 그리고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앞뒤로 포위된건 카이사르의 의도였죠.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로마군 진영의 앞뒤로 방어진지를 구축해놓고 알레시아를 구원하러 올 갈리아군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완벽한 전략의 승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