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 골프 홍준표의 ‘과하지욕’
3김 시대엔 고사성어 정치가 빛을 발했다. 독재와 싸우던 YS는 대도무문(大道無門·민주화로 가는 큰길에는 문이 따로 없다)을, 2인자 정치에 능한 JP는 상선약수(上善若水·물처럼 순리대로 사는 게 최고다)를 남겼다. 사자성어의 압축적 힘이 일상의 언어에서 사라져 가면서 고사(故事) 정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활용하는 정치인 수도 줄었고, 가끔 등장하더라도 제맛을 못 내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그제 밤 SNS에 아무 설명 없이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고 썼다. 한고조 유방의 대장군 한신이 젊은 시절 저잣거리 불량배에게 요구받은 대로 사타구니(袴) 밑으로 지나는 굴욕을 견뎠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굴욕은 참겠지만, 훗날 초왕이 된 한신처럼 일어서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하지만 지금이 사자성어 정치를 할 때인지, 또 과하지욕 자체가 적절한 비유인지 의문이 생긴다.
▷그가 주장하는 억울함의 시작은 토요 골프였다. 홍 시장은 충청·경북에 폭우가 쏟아진 지난주 토요일 오전 골프장을 찾았다. 대구시에는 큰 물난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고 대구시민 1명의 실종은 보고받기 전이었다고 본인은 해명했다. 전국 사망자가 40명을 넘어서자 홍 시장은 뭐가 문제냐던 태도를 접고 결국 사과했다. 국민의힘에선 ‘재해 중 음주·골프 금지’ 조항 위반 등을 이유로 징계위 날짜까지 잡았다. 당 지도부를 향해 “어이없다”며 훈계조로 말하던 홍 시장이 굴욕으로 느끼는 건 그의 자유다.
▷홍 시장은 어제 아침 8시간 만에 그 8글자를 지웠다. 늑장대처와 책임회피로 충북지사와 청주시장이 뭇매를 맞자 그도 버틸 힘이 빠졌을 것이다. 홍 시장은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간신문 6개를 읽고 그날의 이슈와 방향을 잡고 아침을 맞는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해왔다. 정치세력은 없지만, 정치감각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는 말이지만 이제 스스로 점검해야 할 때다.
▷먼저 경북을 포함한 중부지방에 ‘극한 호우’가 온다는 재난문자를 기상청이 발송한 후에도 빗속 골프를 강행한 점이다. 골프는 1시간여 만에 중단됐다. 하지만 골프장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지 ‘이래선 안 되겠다’고 스스로 복귀했다는 설명은 없었다. 또 이튿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읽은 뒤 지울 정도였다면 전날 밤에도 절제했어야 했다. 특히 사과 회견을 마친 뒤 자신을 한신에 비유하며 ‘미래를 위해 참는다’는 식으로 글을 남긴 건 적절치 않다. 6년 전 대선에서 780만 표를 얻었던 홍준표 시장에게 진짜 굴욕이라면 어느 쪽일까. 국민에게 사과하고, 징계위에 불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민심에서 멀어져 가고, 실수를 잡아낸 뒤 제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던 무뎌진 정치감각일까.
김승련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