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사람은 "모두 없이있음 알믄 다여"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을 나름대로 알아채리고 느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21세기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시대"라는 것이고, 깨달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자유 평등 평화를 누리면서 '행동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게 마련임을 안다."는 것인데, 아직도 뭘 모르고 나쁜마음, 집단이기심, '나 뿐이 모르는 마음' 때문에 돈과 권력 그리고 탐욕과 허영심에 노예가 된 줄도 모르는 불쌍하고 가엽슨 이 나라 "지도층 쓰레기인간"과 아직도 철없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목쉰 소리로 부르짖고 다니는 번잡한 거리의 '미친 나그네'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전하고 싶구먼유ㅠㅠ..!
무슨 일이든지,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누구나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스스로 반응하고 행동하게 마련인데 그 사람 나름대로 사람다운 사람으로써 <하늘 땅 사람에게> 골고루 깃든 "진동하는 영혼"이 인간에게 옮겨 오면 곧 "행동하는 영혼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슬기와 지혜, 기쁨과 보람'을 스스로 느끼고 알아채리게 도우며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본 열두권 중 눈에 띄는 구절과 문맥을 솎아 모아, 제 입맛에 맞게 올려봅니다. 허허 허-
"한 나이 든 유대인 여자가 직장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침대 곁에 앉아 아내의 손을 잡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함께 울고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남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붕대를 갈아야 할 시간입니다. 잠시만 나가 주시겠어요? 몇 분이면 됩니다.' 남편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미소로 대답했다. '제가 실례를 하지요. 붕대를 가는 동안 저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아내의 엉덩이와 저는 오랫동안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온 사이입니다. 이제 와서 등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허허 허"
고통을 숨기지 않고 끌어안는 그러한 익살을 통해 우리는 다시 겸손과 공통의 인간다움이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우리의 불완전한 실재와 우리 모두는 기묘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본질상 한계가 있고 따라서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영성이라는 순례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실험적인 걸음을 떼어간다. 불완전함이라는 공통분모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함이야말로 다른 사람들 모두와 가장 닮아 있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옮길 때, 우리를 속이던 방패막은 사라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이라는 책에 '영적인 삶은 이론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부분은 다음에 기록된 어느 한 부분을 사람들은 '약속'이라고 부른다. <A.A의 영성>은 이 책의 주된 영감이었으니, 그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적인 삶의 방법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부분이니 말이다.
"우리가 자기 성장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반도 끝나기 전에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와 행복을 알 것이며,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과거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온함을 이해하고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타락이 아무리 심한 것이었다 해도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쓸모없다는 느낌이나 자기연민은 사라질 것이다. 이기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동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며, 자기중심주의는 사라질 것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와 관점이 바뀔 것이다. 사람들과 경제적인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떠날 것이다. 우리를 괴롭혔던 상태들을 즉각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알게 되고, 스스로를 위해 하지 못했던 것을 신이 해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갑짜기 깨달을 것이다."
이러한 '약속'에 더할 내용이 있다. 우리가 자신의 불완전함을 우리의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로 해학과 너그러움과 함께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겸손과 관용을 경험하고, 이미 우리의 삶이 용서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해하며, 인생이라는 신비한 선물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족쇄는 풀려나가고,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리라. 그것은 두려움과 '의존'을 벗어버리는 자유이기보다는, 사랑을 위한 자유, 삶 자체를 위한 자유가 될 것이다. 440 - 443쪽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라면, 집착하는 것은 삶을 사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 확실성과 의미를 찾으려는 불가능한 열망을 버리고, 우주에게 완벽한 행복과 영원한 삶을 요구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최선의 삶을 사는 방법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앨런 왓츠가 '불확실성의 지혜'라고 불렀던 것을 배우는 것 그리고 카뮈가 추구했던 '낯선 것 속에서의 편안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장자와 함께 '무한함' 속으로 뛰어들어 영원한 평온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성을 우리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신비에 대한 이상하고 경이로운 해석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바보처럼 보이는 이들과 우리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이들을 더욱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미친 지혜는 우리가 자신의 무지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전혀 다른 형태의 새로운 지력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행동과 존재 사이에서 더 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이미 밝혀졌다. 하지만 사는 방법은 아직 아니다." 우리 존재는 덧없고, 우리는 그 존재의 의미 뿐 아니라 그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우리 앞에 놓인 것들만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 속에 존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말이다. 많은 현자들은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 중 가장 간단한 것들을 소개해 본다.
"걱정 말고, 행복하라 !" - 메헤르 바바 -
"뭐? 내가 걱정을?" - 앨프리드 뉴먼 -
현실은 힘들고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장들은 너무 단순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성스러운 바보들은 생각과 삶의 단순성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결국 궁극적인 선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친 지혜의 스승들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실은 진보하는 것이고, 가맘히 앉아 있는 것이 실은 가장 유익한 활동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글을 명상해보라.
<침묵하기>
이제 열둘을 세겠다 그리고 나면 이 땅 위에서 처음으로 모두가 입을 다문다 어떤 언어도 말하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고 잠깐만 모두 멈춰보자.
매우 색다른 순간이 될 것이다 서두름도 없고 엔진 소리도 없다 우리는 이 갑작스러운 낯섦 속에서 모두 하나가 될 것이다.
차가운 바다로 나간 어부는 고래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소금을 거두는 남자는 자신의 상처난 손을 보지 않을 것이다.
창백한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 가스와 불을 무기 삼는 이들 생존자 없는 승리를 갈구하는 이들도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형제들과 걸어나와 그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완전한 무활동無活動과 혼동하지 말라 인생은 바로 이런 것.
우리 삶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에 매달리지도 않고 단 한 번만이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침묵이 우리의 슬픔을 설명해주리라 결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그 슬픔을..
지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자, 이제 열둘을 세겠다. 당신이 침묵하면 나는 떠날 것이다. 262 - 266쪽
*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백영미 옮김 /2008.12.5 황금가지
<자격 상실> : 회의론(160)과 냉소주의는 200 이하로 측정되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부정적 예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실한 탐구는 지적 허영이 결여된 열린 마음과 정직함을 요구한다. 행동운동역학의 부정적 연구들은 모두 연구자들 자신과 마찮가지로 200 이하로 측정된다.(대개 160) 유명한 교수들조차 200 이하로 측정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측정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놀랍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부정적 연구는 부정적 선입견의 귀결이다. 일례로 DNA의 이중나선구조 발견으로 이끈 '프랜시스 크릭'의 연구 설계는 440으로 측정되었다. 의식이 뉴런 활동의 산물일 뿐임을 증명하려는 그의 마지막 연구 설계는 불과 135로 측정되었다.
사람들 자신이나 혹은 그릇된 연구 설계에 의해 200 이하로 측정되는(모두가 대략 160으로 측정된다.) 연구자들의 실패는 그들이 반증하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방법론의 진실성을 확인해 준다. 그들은 '반드시' 부정적 결과를 얻어 내야만 하며, 또 부정적 결과를 얻어 내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온전성과 비온전성 간의 차이를 탐지하기 위한 실험(테스트)에 정확성을 증명해 준다. 모든 새로운 발견은 판 자체를 뒤엎을 수 있고, 그래서 현 상태의 지배적 신념체계에 위협으로 비칠 수 있다. 영적 실상reality을 확인하는 엄밀한 의식의 과학이 출현했다는 것은 물론 저항을 촉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본래부터 추정적이고 완고한 에고 자체의 자기애적 핵심지배권에 대한 정면 대결이기 때문이다.
200 이하의 의식 수준에서는 사실을 인지할 수는 있지만 '진실'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바를 아직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낮은 마음Lower Mind의 지배에 의해 이해가 제한되며, 진실에는 거짓과는 다른 생리적 효과가 동반된다. 게다가 목소리 분석, 신체 언어 연구, 뇌의 유두상 반응 뇌파 변화, 호흡과 혈압의 오르내림, 갈바니 피부 반응, 다우징, 심지어 신체에서 오라가 방사되는 거리를 측정하는 후나 기법의 이용이 증명하듯이 진실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어떤 사람들은 펜듈럼과 같은 정지된 물체를 이용하는(진실일 때는 앞으로 움직이고 거짓일 때는 뒤로 움직인다) 매우 단순한 기법을 사용한다.
보다 발전된 맥락화에서 지배적인 원리는, 빛이 어둠으로 반증될 수 없는 것처럼 진실Truth이 거짓으로 반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선형은 선형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진실은 논리와는 다른 패러다임이고 그래서 '증명 가능'하지 않은데, 증명 가능한 것은 오직 400대로 측정된다. 의식 연구 운동역학은 선형과 비선형적 차원들의 접점인 600 수준에서 작용한다.
<불일치> :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혹은 조사자들에 따라 다양한 이유로 다른 측정치가 나올 수 있다. 1.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에 상황, 사람들, 정치, 정책, 태도가 변한다. 2. 사람들은 뭔가를 마음속에 떠올릴 때 다른 감각 양식들, 즉 시각, 촉각, 청각, 감정 등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내 어머니'는 어머니의 모습, 느낌, 말 등에 대한 것일 수 있다. 또한 헨리 포드에 대해서는 아버지로서, 기업가로서, 미국에 미친 영향에 관해, 그의 반유대주의 등에 관해 측정될 수 있다.
사람은 맥락을 명시하고 우세한 양식을 고수할 수 있다. 동일한 기법을 이용하는 동일한 팀은 내적으로 일관된 결과를 얻을 것이다. 연습과 함께 전문성이 계발된다. 하지만 과학적이며 거리를 둔 태도를 갖지 못해 객관적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이들에게 운동역학적 방식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에 대한 봉헌과 의도가 개인적 견해와 그것이 '옳다'는 걸 입증하려는 시도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296 - 299쪽
* 기탄잘리의 전설 /란지스 랄 /재키 모리스 그림 /홍인기 옮김 /2007.11.12 도서출판 다림
<작품 해설> : 이 작품에서 아지이와 아지트 형제는 여러 차례 '짐 코벳'이라는 사냥꾼 이야기를 합니다. 본명은 에드워드 제임스 코벳Edward James Corbett 영국인으로 1875년 인도 북부 히말리야 산맥 끝자락에 자리 잡은 쿠마온 구릉지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코벳은 정글에 드나들며 매력을 느끼고 사냥 기술을 익히면서 정글과 야생 동물들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쌓습니다. 코벳은 젊은 시정 사냥으로 가족의 생계를 도왔지만 인간이 무참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야생동물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점차 자연보호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백두산호랑이가 민족의 기상과 기개를 상징하는 멋진 동물이지만, 벵골호랑이가 서식하는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의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특히 밀림 지대와 가까운 마을에서 이런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이름난 사냥꾼이었던 코벳에게 식인 호랑이를 잡아달라는 부탁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코벳은 현상금을 받고 사냥을 하던 다른 꾼들과 달리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식인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몇 주에 걸쳐 홀로 정글을 헤매다가 식인 호랑이를 발견하면 겨우 6-7미터 가까이까지 다가가 잡았다고 합니다.
1907년 참파와트 지역에서 무려 436명을 잡아먹은 암호랑이를 잡은 코벳은 명실상주 최고의 호랑이 사냥꾼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그후 약 30년 동안 코벳은 모두 열두 마리의 식인 호랑이들을 사냥했습니다. 그 호랑이들이 코벳의 손에 죽기 전에 빼앗은 사람 목숨만도 15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100념 전과 비교해서 지금은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호랑이 보호구역을 설정하여 사람과 호랑이가 불필요하게 마주치는 일을 막음으로써 호랑이가 야생 상태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일이 효과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아 가혹하게 통치하던 시절임에도 코벳은 히말라야 산자락의 가난한 인도 마을 여기저기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고 늘 가난한 주민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코벳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1947년 누이와 함께 아프리카의 케냐로 이주합니다. 그곳에서 코벳은 식인 호랑이를 사냥했던 경험담을 책으로 내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고, 그렇게 작가로도 유명해진 코벳은 1955년 케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벳이 인도에 살 때부터 보존을 주장했던 쿠마온 지역은 인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코벳이 죽고 나서 2년 뒤에 이 공원을 '코벳 국립공원'이라고 개명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작품 안에서 아자이와 아지트 형제가 전설적인 사냥꾼이자 인도인이 존경하는 인물인 '짐 코벳'을 흉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이 작품에서 눈에 뜨는 또 다른 소재는 코끼리입니다. 코끼리들은 굉장히 사회적인 동물이지요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아프면 모두가 차례로 다가와 위로합니다. "코끼리는 우울한 족속이다 왜냐하면 뭐든지 잊는 법이 없기 때문에.."라는 외국속담도 있듯이 코끼리는 기억력도 좋습니다. 어린 시절에 만난 동료 코끼리를 늙어서도 기억합니다.
인도에서는 전력 생산을 비롯한 여러 목적을 위해서 '람강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1961년부터 대규모 댐 공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8,149헥타르(약 2500만평)에 달하는 댐 아래쪽 땅이 영원히 물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야생동물들의 생태계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그 중 코끼리들이 새로운 이동 경로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고, 이것은 최근까지도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는 부처님이 등장하는 전설이 많죠 그 중에서도 전생에 코끼리로 태어난 부처님은 사막 한가운데 놓인 오아시스에서 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극악무도한 완을 피해 먼 나라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이 그 곳에 옵니다. 가혹한 정치를 못 이겨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사막을 건너다가 절반이 묵숨을 잃었고, 남은 사람들도 굶주림과 갈증에 곧 죽게 될 위험에 처합니다.
이들의 처지를 알게 된 부처님 코끼리는 너무 가슴이 아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합니다. 깊은 고민 끝에 코끼리는 오아시스로 도망쳐 온 사람들에게 "근처에 높은 산이 있으니 그리 가시오 거기에 도착하면 커다란 코끼리가 죽어 있을 것이니, 그 고기를 먹고 기운을 차리시오."그리고 부처님코끼리는 사람들 몰래 먼저 산으로 올라가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습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불쌍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신들을 걱정하여 그 코끼리가 보인 희생에 크게 감동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기탄잘리'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와 코끼리가 다른 이들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을 가진 인물로 나옵니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지요.
주인공 소녀의 이름인 '기탄잘리Gitanjali'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한 분도 있을 겁니다 '기탄잘리'는 벵골어로 노래를 뜻하는 '기타Gita'와 헌정獻呈을 뜻하는 '안잘리Anjali'가 합쳐진 단어로 붙여서 사용하면 헌시, 노래의봉헌, 신께 바치는 노래라는 뜻이 됩니다. 참 아름다운 이름이죠? 그런데 '기탄잘리'는 서양인이 아닌 작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대문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 - 1941'의 시집 제목이기도 합니다. 힌두와 무슬림과 영국이라는 서로 다른 세 문화의 정수를 한 몸에 녹여 낸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20세기 인도의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소녀 '기탄잘리'와 '코끼리 기탄잘리'를 서로 묶는 끈이 사람과 동물과 자연을 가리지 않는 사랑과 배려라는 뜻에서 다른 이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의 '기탄잘리'라는 이름은 참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166 - 175쪽
* 잡념이 보배다 /김성수 지음 /2006.6.20 펴낸곳 : 생각하는백성
<빈 마음의 소망은 우주가 듣는다>
원 세우기의효력은 대단히 강력하다. 특히 몸과 마음이 고요한 명상 속에서의 원 세우기는 오래 묶은 잠재의식의 땅을 파헤쳐서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대는 관찰하고, 자각하고, 인정하고, 비우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신이 지금 무엇을 비웠는지 훤히 알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소망을 갖는 것은 강력한 마음의 에너지를 준비한 것과도 같다.
명상으로 몸을 치료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질 수도 있다. 이 또한 '원 세우기'의 방법을 그대로 인용한다. 무엇보다도 그대가 정상적으로 치유되어 세상의 많은 환자들 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본성의 자리에서 보기에 마땅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자에서 사랑을 주는 자, 웃음을 받는 자에서 웃음을 주는 자, 치료를 받는 자에서 치료를 해주는 자, 밥을 받아먹는 자에서 밥을 떠먹여주는 자... 그대가 주도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는 그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과 신체 에너지는 상승 곡선을 긋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이제껏 공부해왔듯이 환부에 걸린 마음을 명상 속에서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관찰하는 동안 떠오른 생각이나 영상, 과거 기억들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그러한 환부를 갖고 있는 자신의 몸을 모두 소멸시키는 작업을 거듭 해보라. 소멸하는 것은 비우기이고, 자신의 몸을 소멸하므로써 몸뚱이에 붙은 집착을 덜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면서 그 환부에 치유의 빛을 강력하게 보내주기도 하고 그 환부가 깨끗하고 말끔히 나은 상태를 그려보기도 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원 세우기'는 관찰하기, 자각하기, 인정하기, 비우기에 이어서 할 수 있다. 그대가 만약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다. 명상 차원에서 그대는 곧바로 '원 세우기'를 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 지금 당면한 문제에서부터 인생 전반을 조망하는 것까지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으며 100일 동안이 공부 과제를 들고 서원을 세워 공부해 나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모든 방식이 그대 앞에 활짝 열려 있다. 278 - 280쪽
* 흰둥이들아, 들어봐라! /에리히 쇠르만 엮음 /윤구병 교열 /2005.4.11 장백
<마무리글 : '흰둥이'가 된 젊은 누렁이들에게>
어렸을 적에 읽었던 사하라 사막 이야기가 생각난다. 물이 없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몇 포기 나지 않은 풀잎에 맺힌 이슬을 조심조심 단지에 따 담아, 그것으로 목을 축여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하라 사막에 기관 고장으로 불시착한 비행사가 그 사막 젊은이 하나와 사귀어 이렇게 꼬드겼다던가, 물을 얼마든지 양것 마실 수 있을 뿐더러, 그 물에 몸을 풍덩 담글 수도 있고, 그 물에서 헤엄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곳에서는 그 물이 폭포수를 이루어 떨어지는 데, 그런 곳을 구경시켜주겠노라고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느냐고, '뻥까지 말라'고 아예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그 젊은이를 어찌어찌 꼬드겨서 문명 세계로 데리고 나와, 수돗물과 호수와 강과 폭포수를 구경시켜 주었다던가, 혹시 그 원주민 젊은이가 속했던 집단이 북아프리카 지역의 베르베르 족이었을지도 몰라.
어딜 가나 펑펑 쏟아지거나 솟구치는 그 물, 물, 물, 땅 위에 강을 이루어 흐를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그 흔하디 흔한 물을 보고 넋이 빠진 젊은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상태로 문명 세계에 흠뻑 젖어 지내던 그 젊은이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자, 그 자리에서 자기를 그 물 많은 멋진 세상으로 끌고 나왔던 비행사를 목졸라 죽이고 자기가 살던 그 척박한 땅으로 되돌아갔다던가.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그 원주민 젊은이가 왜 자기를 문명 세계로 이끈 그 비행사에게 '은혜를 원수오 갚는 짓'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에 내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았던 흑인들은 거개가 노예 상태에 있거나, 허그렛일을 허거나, 뒷골목에서 빈둥대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미개하고, 야만스럽고, 미련하고, 비위생적이고, 부도덕한 '깜둥이'들에 지나지 않았다.(아주 나중에야 나는 프란츠 파농이나 말콤 엑스나 넬슨 만델라 같은 그리고 땅콩박사 같은 멋 있고 본받을 만한 흑인들이 이 세상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깜둥이'를 '검은이'로 대접해주고, 아무데나 똥오줌을 싸 대는 야만인에게 수세식 변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평생에 한번도 목욕한 적이 없는 냄새나는 몸뚱이를 날마다 씻게 해주고, '얌' 한 뿌리를 캐려고 하루 종일 사막을 헤매면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던 처지에서 벗어나 레스토랑에 앉아 기름진 음식을 입맛껏, 양껏 골라먹게 해주었다는데, 무엇 때문에 그 고마운 백인에게 그렇게 모진 해꼬지를 한단 말인가.
어린 나는 다방에서 차를 나르는 여자를 '숙녀님'(레이디-레지)이라고 높여 부른다고 해서, 또 술집에서 손님 접대하는 여자를 옛날에 양반 중의 양반인 사대부 가문의 시집 안 간 여자 상전에게 붙이던 극존칭인 '아가씨'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이들의 신분이 높아지고 그만큼 사회에서 대접받는 처지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불러봤자 도리어 이름이 더렵혀지는 꼴이 되기 십상인데....
그동안 '선진된 문명국'에서 하늘을 찢고 나타난 흰둥이들이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누렁이'와 '검둥이'들을 개화시키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을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산업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또 관광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미끼로 제 나라에 데리고 가서 얼치기 문명인으로 길들여 종놈으로 부리면서, 제 나라, 제 민족을 팔아먹는 년놈들로 바꾸어 놓았던가. 이 흰둥이들을 남태평양 사모아 섬의 원주민들은 '빠빠라기'라고 불렀다. '빠빠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 글은 바로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꼭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구술한 투이아비의 입맛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다 그동안 여러 출판사가 '빠빠라기'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 어느 출판사에서 펴낸 글을 보아도 투이아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려퍼지지 못했다.
원주민의 입맛을 되살려 우리 젊은이들 귀에 쏙 들어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 우리말 질서에 맞게 그리고 되도록이면 입말에 가깝게 옮기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 결과 교열본으로 선보이는 것이 도서출판 장백의 "흰둥이들아, 들어봐라"이다. 이 안에 담긴 내용에 무얼 덧붙이는 것은 뱀에게 다리를 달아주는 꼴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이미 또 하나의 '빠빠라기'로 탈바꿈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흰둥이들의 개노릇을 하는 사슬에 묶인 '누렁이'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해방된 대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기 바란다. 211 - 215쪽
2005년 1월 변산에서 윤구병
* 영원히 살아있는 세상 /우 명 지음 /2004.5.8 참출판사
<진리가 와도 인간은 모르고 진리인 자만이 안다>
인간은 자기의 죄업에 갇혀 있어 인간은 진리라는 것을 모른다 인간은 그 진리를 모르기에 진리인 구세주가 와도 모른다
성경에 말세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모른다고 하느님만 안다고 했다 또 구세주가 도둑과 같이 온다고 했고 또 깨어 있으라고 했다 또 인자가 온다고 했고 또 만인이 다 본다고 했다 이 말씀은 모두가 진리가 사람으로 왔을 때 그 진리가 사람이라 사람은 진리를 볼 수가 없고 자기의 관념의 환상적인 구세주를 기다리기에 그 환상에 맞지 않으면 아니라고 한다 구세주는 이렇게 하라고 해서 천극락 가는 것이 아닌 영원불변의 창조주 진리인
우주의 에너지와 빛으로 화하게 하여야 그 진리라야 살 수가 있는 것이라 사람은 진리 됨을 모르고 또 진리를 모르기에 망상의 존재를 기다리나 그것은 자기가 기다리는 존재는 영원히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진리로 오실 분은 산 자와 진리 된 자만 알 수가 있으며 진리된 자가 없기에 모른다 또 사람 중 진리가 있어도 만인이 모두 보고 있지만 알지 못하고 만인이 진리인 사람을 보고 있지만 사람이 모르기에 도둑과 같이 오고 아무도 모르고 진리만이 알고 사람을 진리 되게 하나 사람은 모른다
<구세주란 진리 되게 하는 자라>
사람들은 흔히들 세상에 구세주가 온다고 말하고 각 종교에서는 미륵이 온다고 하고 재림예수가 온다고도 하고 정도령이 온다고 하여 또 열석자로도 온다고도 하고 판 밖에서 온다고 하였다 이 모든 곳에서 기다리나 그 시때는 아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 진리 된 자가 와야 진리 된 자만이 알기에 그렇다 사람은 자기의 의식에 자기가 환상하는 그런 자는 와야 하는데 그런자는 세상에 없고 그런 자는 영원히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구세주가 와서 자기가 선택된 자인 줄 알고 천극락의 나라에 데리고 가는 줄 알고 있다 천극락은 죄가 하나도 없고 진리인 구세주가 된 자만 갈 수가 있는 것이라 사람들이 지혜가 없어 어느 것이 살고 죽는지 모른다 산 자만이 이 사실을 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진리인 만고불변의 창조주의 에너지와 빛 자체로 나지 않고는 살 자가 없다 진리가 되지 않고는 살 자가 없다 진리가 되지 않고는 영생 천극락에 살 수가 없다 구세주란 영원한 생명을 줄 수가 있어야 하기에 그 진리인 생명을 주어야 한다 진리 되게 하는 자가 구세주다 312 - 315쪽
* 코란 속에 담긴 무소유의 행복 /문미화 조선학 지음 /2002.3.20 느낌이있는 나무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 :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종교관이 다른 종교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태교는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고 모두가 인격 종교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 세 종교 모두 문명의 4대 발상지 중 하나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있는 중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출발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세 종교는 동일한 하느님(각기 여호와, 야훼, 알라 라고부름)을 섬기며 '구약'이라는 거의 동일한 경전을 사용하고 있다. 이스람교에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내리신 토라(구약성경)를 믿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슬람교와 기곡교의 가장 큰 차이점을 살펴보면 첫째, 예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 물론 '코란'에서도 여러 곳에 예수의 탄생과 서역 그리고 여러 은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지자로서 높게 평가할 뿐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유일하신 분으로 배우자가 없어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며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단지 선지자로 부를 뿐, 구원주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믿는다. 기록에 따르면 마호메트가 성겨을 읽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읽은 성경은 마호메트가 태어나기 수 백년 전부터 기록되었던 '성경의 사본'들(1948년 팔레시튼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로 오늘날 성경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코란'과 '성경'이 닮은 점이 많고, 또 비슷한 내용을 믿는다고 하여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같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종교가 같은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는데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달라 그들은 종교적인 내용으로 융합될 수는 없다.
둘째,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을 믿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이스람교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받았다고 믿고,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서로 같아야 하지만 '코란'과 '성경'은 근본적인 면에서 엄밀히 다르다. 넷째, 이스람교에서는 마호메트를 가장 높게 섬기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216 - 218쪽
* 자유인 이솝 /한스 요아힘 셰틀리히 소설 /박공우 그림 전재민 옮김 /2000.7.7 참솔
옮긴이의 글 - <언어와 지혜라는 무기로 세상에 도전한 이솝> : 이솝은 동물의 행동을 빌려 인간세계의 온갖 모습을 보여주는 '이솝 이야기'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 생종했던 사람으로 사모스인이라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프리기아인이라고도 한다. '이솝 이야기'는 원래 이솝의 전기에 실려 있었다가 나중에 별도의 책으로 분리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솝 이야기'를 쓴 사람이 실제로 이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시대에 여러 사람이 쓴 이야기를 모은 것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솝이란 인물조차 가공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스스로는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 주장이고, 소크라테스 주장인지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겄는가?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이솝이 남긴 우화와 이솝의 삶을 기록해 놓은 책들이 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가 언제 이 책을 썼는가라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뜻과 그것이 전달하려는 깊은 뜻(메시지)일 것이다. "자유인 이솝"은 독일의 유명작가 한스 요아힘 셰틀리히가 10세기경 익명의 그리스 작가가 썼다고 추정되는 문헌의 독일어 번역본(디트리히 출판사. 라이프치히. 1974)을 토대로 이솝의 삶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호메로스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등이 영웅과 귀족문학이라면, '이솝우화'는 천민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솝이 그리는 세계는 조화로운 이상세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눈물겨운 투쟁으리 역사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솝은 본디 노예신분이었다가 나중에 자유의몸이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솝이 허구의 인물인지 또는 실존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하더라도, 알려진 바대로라면 이솝은 생존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졌다. 그는 몹시 추한 외모에 말도 못하고 힘도 없는 아주 나약한 존재였고, 더군다나 노예 신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솝의 선행에 감동받은 여신女神이 이솝의 말문을 트이게 하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혜와 기지를 선사했다. 이솝의 삶에서 언어, 지혜,기지(얼 말 글)는 유일한 생존 도구이며, 투쟁도구가 된 세이다. 이솝은 언어, 지혜, 논리(말 얼 글)의 힘으로 자신의 주인이자 유명한 철학자인 크산토스를 한껏 조롱하고, 무능과 무지를 일깨워 준다 그리고 마침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부귀영화도 잠깐, 마지막에는 어처구니없게(아이로니컬하게)도 '말재간'으로 말미암아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솝에게 조롱당한 델포이인들이 격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이솝은 특유의 기지(위트)와 지혜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언어가 가져다 준 행운은 그 수명을 다한 것일까. 이솝은 델포이인들을 저주하며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는다. 결국 그의 '말재간'은 이솝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휘두른 칼날과 같았다.
작가 셰틀리히는 이야기에 몰입하는 대신, 건조하리만치 축약된 표현을 사용해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에피소드를 빠르게 전개시킨다. 그리하여 작가 대신 독자들이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게 하고 있다 또 그는 윤리적인 해석이나 문학적 가감없이 에피소드들을 따라감으로써,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바로 언어 '말재주'를 매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욕과 허무, 그리고 고뇌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말(언어)은 신의 선물인 동시에 때로 독약이 되기도 한다. 셰틀리히 자신이 구동독 체제에서 작가로서 흥망성쇠를 겪은 사람이므로, 그가 이솝의 삶을 작품 소재로 선택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솝의 삶은 그가 쓴 우화만큼이나 재미있다. 이솝의 언어와 지혜와 논리는 때로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때로는 엉뚱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을 한번 비틀어서 바라보는 도도한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솝이 처음부터 가졌던 것이 아니라, 온갖 콤플레스와 고난을 이겨 냄으로써 갖게 된 소중한 재산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가 직접 겪은 고통 속에서 얻을 수 있었던 찬란한 재능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솝의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과 악을 넘어서 위트와 지혜와 도전의식의 장이었다. 바로 우리의 자연이 그러하듯이....... 2000년 6월 전재민 154 - 157쪽
* 지식을 초월한 차원 /오쇼 라즈니쉬 /길연 옮김 /1993.5.27 관음출판사
< 9. 존재의 찬란함을 알 때 > : 1987년 4월 25일 동양의 신비가들은 의식세계의 진화가 7개의 차크라(센터中心) 안에서 분류되는 것으로 본다.... 옛말에 일곱 번째는 신을 아는 것, 여섯 번째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다섯 번재는 창조적이 되는 것, 그리고 네 번째는 '사랑이 충만헤게 되는 것, 다른 사람과 나누고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라 했다. 네 번째로써 그대 여로旅路는 확실해진다. 그대가 일곱 번째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보장될 수 있다. 네 번째 전에는 그대가 길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
첫번째 센터는 섹스 센터, 생식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삶이 지속된다. 바로 그 위의 것, 섹스 에너지는 위로 옮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굉장한 체험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그대 자신이 자급 자족할 수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섹스는 항상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센터는 만족하는 자급 자족의 센터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충족한다. 세 번째 센터에서는 내가 누구인가, 이 자급 자족하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찾기 시작한다. 이 센터들은 중요하다.
그대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순간 네 번째 센터가 열리고 그대는 그대가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네 번째 전에 여로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완성할 수 없게 될 가능성도 있다. 길을 잘못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대 자신이 자급 자족함을, 만족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대는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될 수도 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충족감이 너무 커서 모든 의문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때에 스승(마스터)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도중 어디엔가 주저 앉아 버리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데 머물러 앉아 버릴 만한 아름다운 지점들이 있다. 충만을 느끼는 감정, 계속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지만 스승은 계속해서 그대를 성가시게 해서 그대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대는 만족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니 적어도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라. 그대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에 새로운 문이 열린다. 왜냐하면 그대는 삶을, 사랑을, 즐거움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풍부해서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스승은 그대를 꾸짖으며 괴롭힌다 '네 번째로 움직여라, 가장 순수한 사랑의 에너지를 그대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존재의 찬란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네 번째 이후에 그대는 잘못해서 길을 잃을 수 없다. 일단 그대가 존재의 찬란함을 알고 나면 창조성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대는 아름다움을 알았다. 그대 역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싶어한다. 그대는 창조자가 되기를 원한다 창조 하고자 하는 굉장한 염원이 일어난다. 그대가 사랑을 느낄 때마다 창조성이 그림자처럼 사랑과 함께 오는 것을 항상 느끼게 된다. 창조성을 지닌 사람은 단순히 바깥만을 보고 있을 수 없다 밖에는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하늘이 밖에 있는 것처럼 그것에 균형을 맞추어 안에도 똑같은 무한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승이 있다면 좋은 일이다. 뛰어난 스승이 있다면 이런 체험들이 그대를 위로 이끌어갈 것이다. 일단 제3의 눈이 떠지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그대 의식세계의 광활한 공간 전체를 보게 된다. 그대는 신전神殿에 아주 가깝게 왔다 그대는 그 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우주의 의식세계를 볼 것이고, 그곳에서 그대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그곳에서 그대는 궁극의 자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그대의 영원성을 찾는다.
이것들이 7개의 센터들이다. 단지 임의로 만들어낸 구분들, 그렇게 해서 구도자들은 조직적인 방법으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 갈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 그대가 그대 스스로 추구해 간다면 뒤엉켜 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네 번째 센터 전에서는 위험이 많다 네 번째 센터 이후에서까지도.... 많은 시인들이 다섯 번째에 있는 창조성 센터에서 살았다 그리고 더 이상 거기에서 나아가질 못했다. 위대한 예술을 낳은 많은 화가들, 많은 무용가들, 많은 성악가들, 그렇지만 제3의 눈으로까지는 절대로 가 보지를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 아름다움을 아는 제3의 눈으로 남아있었던 많은 신비가들도 있었다. 이것은 아주 만족하고 충족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은 자신이 도달했다고 생각했었다. 좀더 앞에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고 그대에게 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그대 무지로부터 그대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거의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에 길을 알고 있으며 함정을 알고 있고, 주저 앉아 버릴 수도 있는 아름다운 지점들을 알고 있고 그리고 그대를 반대해서까지도 그대가 그대의 잠재성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그대를 계속해서 밀어 줄 만큼의 자비심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하다. 221 - 225쪽
* 루쉰의 삶과 사상 '루쉰전' /왕스징 지음 /신영복 유세종 옮김 /1992.10.5 다섯수레
루쉰의 죽음 : 1935년 말경 루쉰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많은 친구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모여서 상의한 후 루쉰을 소련에 보내어 치료받을 수 있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 휴양하면서 그가 '중국문학사'를 탈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러나 루쉰은 자신의 병세가 아직까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여겼고 또 당장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투쟁의 요구를 고려하여 조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병치료는 잠시 미루어두게 됐고, 일본에 가서 병을 치료하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루쉰은 응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반대파들은 루쉰이 곧 출국할 것이라는 소문을 사방에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루쉰은 다른 나라에 가서 병을 치료하려던 계획을 아예 단념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갈 것이라고 그들이 예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가지 않겠다. 그래서 그들을 좀 불편하게 만들어 보고 싶다." 동디들의 거듭되는 권고에 루쉰은 이듬해 여름이 지난 다음에나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출국하여 휴양한다고 하더라도 수중에 있는 일은 끝내야겠다고 하였다. 1936년 3월 그가 몸져 누울 줄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4월 초에 병세가 좀 호전되자 그는 또 일을 시작하였다. 5월 중순에 병이 다시 도졌으나 그는 여전히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후로 그의 병세는 나날이 심각해져 갔다. 5월 말부터 루쉰은 온종일 등나무 침대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있지 않을 수 없었으며 걷는 것조차 불편할 정도가 되었다. 그 후 말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몇몇 가까운 친구들은 스메들리에게 부탁해서 상해에 와있는 유명한 폐병 치료 전문가인 떵鄧 의사를 불러오자고 상의하였다.
떵 의사는 병이 매우 위급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루쉰이 만일 유럽사람이었다면 5년 전에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래서 벗글은 루쉰에게 우선 상해에서 삼개월 정도 치료한 다음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요양하라고 강력하게 권하였다. 그러나 루쉰은 여전히 자신의 전투초소를 떠나려 하지 안았으며,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해를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조국과 민중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6월에 그는 아주 몸져 눕게 되었다. 그 후로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일어나 앉는 것조차도 힘들게 되었다. 가을이 되자 병은 잠시 호전되었다 8월 초에 그는 또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이 더이상 지탱해나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으며 '죽음의 예감'같은 것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0월 초에 루쉰의 병은 갑자기 거의 나은 듯하였다. 체중도 조금 불었고 때로 밖에 나가 거닐 수도 있었으며 영화구경도 하고 친구들을 찾아가서 잠시 동안 앉아 있기도 하였다. 10월8일에는 팔선교에 있는 청년회관에 가서 제2차 전국목각전람회를 참관하고 그곳에서 청년 목각가들과 오랫동안 목각 창작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까지 했다. 16일에는 차오찡화曺晴華가 번역한 '소련작가 7인집'의 머리말을 썼고 17일에는 가족들과 이사하는 것에 대해서 상의까지 하였다. 이사문제 거론은 당시 루쉰이 거주하던 대륙 신촌 부근에 일본의 해군 사령부가 있었고 그래서 늘 전쟁 분위기가 매우 짙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7일 밤에 그는 다시 몸져누웠다. 18일에는 숨쉬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더니 19일 아침 5시25분, 전투의 열정으로 고동치던 그의 심장은 드디어 멈추고 말았다. 루쉰은 끝내 폐병으로 그가 사랑했던 조국과 민중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다하지 못한 사업을 두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288 - 290쪽
* 수피의 가르침 /이드레스 샤흐 /박상준 옮김 /1990.4.20 고려원
< 여관 > : 한 수피가 왕궁으로 들어가더니 곧장 왕좌를 향하여 걸어갔다. 너무나 기막힌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결국 왕이 나와서 수피에게 물었다. "수피는 뭘 원하시오?" 수피가 말했다 "폐하, 저는 다만 이 여관에서 잠잘 곳을 찾고 있답니다." 왕이 말했다 "여긴 여관이 아니오 내 왕궁이오." 수피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폐하 이전엔 누구의 것이었읍니까?" "내 아버지의 것이었지요." "또 그 전에는요?" "물론 내 할아버지의 것이었소." "보십시오. 사람들이 오고 가고, 또 머물다가 떠나곤 하는 이곳이 여관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 희망 > : 한 친구가 어느 날 꿈속에서 천사를 만났다. 천사는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그 친구가 천사에게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천사가 말했다 "이 책 속엔 신의 친구 이름이 전부 적혀 있지요." 그 친구가 물었다. "그럼 제 이름도 적혀 있나요?" 천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신의 친구가 아니요." 그 친구가 말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는 신의 친구의 친구예요." 순간, 천사는 말이 없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리스트 맨 윗머리에 그대의 이름을 적으라는 지시를 지금 받았어요.. 희망이란 정말 희망 없음에서 탄생하죠.."
<위가 뒤집혔소> : 두 사람이 수피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두통꺼리를 갖고 있었고, 다른 이는 흐릿한 느낌(비전秘傳)을 갖고 있었다. 수피가 말했다. "두 사람 다 나쁜 음식 탓이오."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수피가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위장이 뒤집혔소." 두 사람은 버럭 화를 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린 머리와 눈으로 추구하고 있소. 그렇게 어리석진 않소 쳇!" ㅋㅋㅋ ㅋ
<누구를 찾습니까> :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개똥이가 물었다. "누굴 찾소?" 방문자가 대답했다. :개똥이를 찾습니다." 개똥이가 다시 말했다. "나 역시 삼십년 동안 개똥이를 찾고 있었소. 그런데 아직도 그를 못 찾았소."
<문지기와 개> : 문지기가 개를 두들겨패고 있었다. 개가 매를 맞을 때마다 깨개겡 깨개겡 하고 짖었다. 누가 개에게 물었다. "오 멍멍아, 저 사람이 왜 널 때리는 거냐?" 개가 사람의 소리로 말을 했다. "저 사람은 내가 자기보다 능력 있는 걸 차마 눈뜨고는 못 보겠나 봐요.." 139 - 141쪽
꾸준히 읽어보신 분께 덕담 한 줄.. "그 성실함은 천만명 중 한 명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고오마워여 !
얼이 말이구 말이 글이 됐다네 그리하여 얼말글 속에 깨우침이 늘 살고 있다는 구먼, 그려 그렇군 그러네 허허 허- 오늘은 이만 !
깨어있는 사람은 "모두 없이있음 알믄 다여"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을 나름대로 알아채리고 느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21세기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시대"라는 것이고, 깨달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자유 평등 평화를 누리면서 '행동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게 마련임을 안다."는 것인데, 아직도 뭘 모르고 나쁜마음, 집단이기심, '나 뿐이 모르는 마음' 때문에 돈과 권력 그리고 탐욕과 허영심에 노예가 된 줄도 모르는 불쌍하고 가엽슨 이 나라 "지도층 쓰레기인간"과 아직도 철없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목쉰 소리로 부르짖고 다니는 번잡한 거리의 '미친 나그네'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전하고 싶구먼유ㅠㅠ..!
무슨 일이든지,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누구나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스스로 반응하고 행동하게 마련인데 그 사람 나름대로 사람다운 사람으로써 <하늘 땅 사람에게> 골고루 깃든 "진동하는 영혼"이 인간에게 옮겨 오면 곧 "행동하는 영혼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슬기와 지혜, 기쁨과 보람'을 스스로 느끼고 알아채리게 도우며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본 열두권 중 눈에 띄는 구절과 문맥을 솎아 모아, 제 입맛에 맞게 올려봅니다. 허허 허-
"한 나이 든 유대인 여자가 직장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침대 곁에 앉아 아내의 손을 잡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함께 울고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남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붕대를 갈아야 할 시간입니다. 잠시만 나가 주시겠어요? 몇 분이면 됩니다.' 남편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미소로 대답했다. '제가 실례를 하지요. 붕대를 가는 동안 저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아내의 엉덩이와 저는 오랫동안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온 사이입니다. 이제 와서 등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허허 허"
고통을 숨기지 않고 끌어안는 그러한 익살을 통해 우리는 다시 겸손과 공통의 인간다움이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우리의 불완전한 실재와 우리 모두는 기묘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본질상 한계가 있고 따라서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영성이라는 순례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실험적인 걸음을 떼어간다. 불완전함이라는 공통분모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함이야말로 다른 사람들 모두와 가장 닮아 있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옮길 때, 우리를 속이던 방패막은 사라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이라는 책에 '영적인 삶은 이론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부분은 다음에 기록된 어느 한 부분을 사람들은 '약속'이라고 부른다. <A.A의 영성>은 이 책의 주된 영감이었으니, 그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적인 삶의 방법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부분이니 말이다.
"우리가 자기 성장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반도 끝나기 전에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와 행복을 알 것이며,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과거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온함을 이해하고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타락이 아무리 심한 것이었다 해도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쓸모없다는 느낌이나 자기연민은 사라질 것이다. 이기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동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며, 자기중심주의는 사라질 것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와 관점이 바뀔 것이다. 사람들과 경제적인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떠날 것이다. 우리를 괴롭혔던 상태들을 즉각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알게 되고, 스스로를 위해 하지 못했던 것을 신이 해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갑짜기 깨달을 것이다."
이러한 '약속'에 더할 내용이 있다. 우리가 자신의 불완전함을 우리의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로 해학과 너그러움과 함께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겸손과 관용을 경험하고, 이미 우리의 삶이 용서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해하며, 인생이라는 신비한 선물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족쇄는 풀려나가고,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리라. 그것은 두려움과 '의존'을 벗어버리는 자유이기보다는, 사랑을 위한 자유, 삶 자체를 위한 자유가 될 것이다. 440 - 443쪽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라면, 집착하는 것은 삶을 사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 확실성과 의미를 찾으려는 불가능한 열망을 버리고, 우주에게 완벽한 행복과 영원한 삶을 요구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최선의 삶을 사는 방법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앨런 왓츠가 '불확실성의 지혜'라고 불렀던 것을 배우는 것 그리고 카뮈가 추구했던 '낯선 것 속에서의 편안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장자와 함께 '무한함' 속으로 뛰어들어 영원한 평온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성을 우리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신비에 대한 이상하고 경이로운 해석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바보처럼 보이는 이들과 우리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이들을 더욱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미친 지혜는 우리가 자신의 무지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전혀 다른 형태의 새로운 지력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행동과 존재 사이에서 더 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이미 밝혀졌다. 하지만 사는 방법은 아직 아니다." 우리 존재는 덧없고, 우리는 그 존재의 의미 뿐 아니라 그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우리 앞에 놓인 것들만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 속에 존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말이다. 많은 현자들은 이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 중 가장 간단한 것들을 소개해 본다.
"걱정 말고, 행복하라 !" - 메헤르 바바 -
"뭐? 내가 걱정을?" - 앨프리드 뉴먼 -
현실은 힘들고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장들은 너무 단순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성스러운 바보들은 생각과 삶의 단순성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결국 궁극적인 선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친 지혜의 스승들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실은 진보하는 것이고, 가맘히 앉아 있는 것이 실은 가장 유익한 활동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글을 명상해보라.
<침묵하기>
이제 열둘을 세겠다 그리고 나면 이 땅 위에서 처음으로 모두가 입을 다문다 어떤 언어도 말하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고 잠깐만 모두 멈춰보자.
매우 색다른 순간이 될 것이다 서두름도 없고 엔진 소리도 없다 우리는 이 갑작스러운 낯섦 속에서 모두 하나가 될 것이다.
차가운 바다로 나간 어부는 고래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소금을 거두는 남자는 자신의 상처난 손을 보지 않을 것이다.
창백한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 가스와 불을 무기 삼는 이들 생존자 없는 승리를 갈구하는 이들도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형제들과 걸어나와 그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완전한 무활동無活動과 혼동하지 말라 인생은 바로 이런 것.
우리 삶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에 매달리지도 않고 단 한 번만이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침묵이 우리의 슬픔을 설명해주리라 결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그 슬픔을..
지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자, 이제 열둘을 세겠다. 당신이 침묵하면 나는 떠날 것이다. 262 - 266쪽
*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백영미 옮김 /2008.12.5 황금가지
<자격 상실> : 회의론(160)과 냉소주의는 200 이하로 측정되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부정적 예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실한 탐구는 지적 허영이 결여된 열린 마음과 정직함을 요구한다. 행동운동역학의 부정적 연구들은 모두 연구자들 자신과 마찮가지로 200 이하로 측정된다.(대개 160) 유명한 교수들조차 200 이하로 측정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측정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놀랍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부정적 연구는 부정적 선입견의 귀결이다. 일례로 DNA의 이중나선구조 발견으로 이끈 '프랜시스 크릭'의 연구 설계는 440으로 측정되었다. 의식이 뉴런 활동의 산물일 뿐임을 증명하려는 그의 마지막 연구 설계는 불과 135로 측정되었다.
사람들 자신이나 혹은 그릇된 연구 설계에 의해 200 이하로 측정되는(모두가 대략 160으로 측정된다.) 연구자들의 실패는 그들이 반증하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방법론의 진실성을 확인해 준다. 그들은 '반드시' 부정적 결과를 얻어 내야만 하며, 또 부정적 결과를 얻어 내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온전성과 비온전성 간의 차이를 탐지하기 위한 실험(테스트)에 정확성을 증명해 준다. 모든 새로운 발견은 판 자체를 뒤엎을 수 있고, 그래서 현 상태의 지배적 신념체계에 위협으로 비칠 수 있다. 영적 실상reality을 확인하는 엄밀한 의식의 과학이 출현했다는 것은 물론 저항을 촉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본래부터 추정적이고 완고한 에고 자체의 자기애적 핵심지배권에 대한 정면 대결이기 때문이다.
200 이하의 의식 수준에서는 사실을 인지할 수는 있지만 '진실'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바를 아직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낮은 마음Lower Mind의 지배에 의해 이해가 제한되며, 진실에는 거짓과는 다른 생리적 효과가 동반된다. 게다가 목소리 분석, 신체 언어 연구, 뇌의 유두상 반응 뇌파 변화, 호흡과 혈압의 오르내림, 갈바니 피부 반응, 다우징, 심지어 신체에서 오라가 방사되는 거리를 측정하는 후나 기법의 이용이 증명하듯이 진실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어떤 사람들은 펜듈럼과 같은 정지된 물체를 이용하는(진실일 때는 앞으로 움직이고 거짓일 때는 뒤로 움직인다) 매우 단순한 기법을 사용한다.
보다 발전된 맥락화에서 지배적인 원리는, 빛이 어둠으로 반증될 수 없는 것처럼 진실Truth이 거짓으로 반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선형은 선형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진실은 논리와는 다른 패러다임이고 그래서 '증명 가능'하지 않은데, 증명 가능한 것은 오직 400대로 측정된다. 의식 연구 운동역학은 선형과 비선형적 차원들의 접점인 600 수준에서 작용한다.
<불일치> :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혹은 조사자들에 따라 다양한 이유로 다른 측정치가 나올 수 있다. 1.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에 상황, 사람들, 정치, 정책, 태도가 변한다. 2. 사람들은 뭔가를 마음속에 떠올릴 때 다른 감각 양식들, 즉 시각, 촉각, 청각, 감정 등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내 어머니'는 어머니의 모습, 느낌, 말 등에 대한 것일 수 있다. 또한 헨리 포드에 대해서는 아버지로서, 기업가로서, 미국에 미친 영향에 관해, 그의 반유대주의 등에 관해 측정될 수 있다.
사람은 맥락을 명시하고 우세한 양식을 고수할 수 있다. 동일한 기법을 이용하는 동일한 팀은 내적으로 일관된 결과를 얻을 것이다. 연습과 함께 전문성이 계발된다. 하지만 과학적이며 거리를 둔 태도를 갖지 못해 객관적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이들에게 운동역학적 방식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에 대한 봉헌과 의도가 개인적 견해와 그것이 '옳다'는 걸 입증하려는 시도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296 - 299쪽
* 기탄잘리의 전설 /란지스 랄 /재키 모리스 그림 /홍인기 옮김 /2007.11.12 도서출판 다림
<작품 해설> : 이 작품에서 아지이와 아지트 형제는 여러 차례 '짐 코벳'이라는 사냥꾼 이야기를 합니다. 본명은 에드워드 제임스 코벳Edward James Corbett 영국인으로 1875년 인도 북부 히말리야 산맥 끝자락에 자리 잡은 쿠마온 구릉지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코벳은 정글에 드나들며 매력을 느끼고 사냥 기술을 익히면서 정글과 야생 동물들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쌓습니다. 코벳은 젊은 시정 사냥으로 가족의 생계를 도왔지만 인간이 무참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야생동물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점차 자연보호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백두산호랑이가 민족의 기상과 기개를 상징하는 멋진 동물이지만, 벵골호랑이가 서식하는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의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특히 밀림 지대와 가까운 마을에서 이런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이름난 사냥꾼이었던 코벳에게 식인 호랑이를 잡아달라는 부탁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코벳은 현상금을 받고 사냥을 하던 다른 꾼들과 달리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식인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몇 주에 걸쳐 홀로 정글을 헤매다가 식인 호랑이를 발견하면 겨우 6-7미터 가까이까지 다가가 잡았다고 합니다.
1907년 참파와트 지역에서 무려 436명을 잡아먹은 암호랑이를 잡은 코벳은 명실상주 최고의 호랑이 사냥꾼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그후 약 30년 동안 코벳은 모두 열두 마리의 식인 호랑이들을 사냥했습니다. 그 호랑이들이 코벳의 손에 죽기 전에 빼앗은 사람 목숨만도 15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100념 전과 비교해서 지금은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호랑이 보호구역을 설정하여 사람과 호랑이가 불필요하게 마주치는 일을 막음으로써 호랑이가 야생 상태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일이 효과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아 가혹하게 통치하던 시절임에도 코벳은 히말라야 산자락의 가난한 인도 마을 여기저기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고 늘 가난한 주민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코벳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1947년 누이와 함께 아프리카의 케냐로 이주합니다. 그곳에서 코벳은 식인 호랑이를 사냥했던 경험담을 책으로 내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고, 그렇게 작가로도 유명해진 코벳은 1955년 케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벳이 인도에 살 때부터 보존을 주장했던 쿠마온 지역은 인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코벳이 죽고 나서 2년 뒤에 이 공원을 '코벳 국립공원'이라고 개명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작품 안에서 아자이와 아지트 형제가 전설적인 사냥꾼이자 인도인이 존경하는 인물인 '짐 코벳'을 흉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이 작품에서 눈에 뜨는 또 다른 소재는 코끼리입니다. 코끼리들은 굉장히 사회적인 동물이지요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아프면 모두가 차례로 다가와 위로합니다. "코끼리는 우울한 족속이다 왜냐하면 뭐든지 잊는 법이 없기 때문에.."라는 외국속담도 있듯이 코끼리는 기억력도 좋습니다. 어린 시절에 만난 동료 코끼리를 늙어서도 기억합니다.
인도에서는 전력 생산을 비롯한 여러 목적을 위해서 '람강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1961년부터 대규모 댐 공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8,149헥타르(약 2500만평)에 달하는 댐 아래쪽 땅이 영원히 물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야생동물들의 생태계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그 중 코끼리들이 새로운 이동 경로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고, 이것은 최근까지도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는 부처님이 등장하는 전설이 많죠 그 중에서도 전생에 코끼리로 태어난 부처님은 사막 한가운데 놓인 오아시스에서 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극악무도한 완을 피해 먼 나라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이 그 곳에 옵니다. 가혹한 정치를 못 이겨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사막을 건너다가 절반이 묵숨을 잃었고, 남은 사람들도 굶주림과 갈증에 곧 죽게 될 위험에 처합니다.
이들의 처지를 알게 된 부처님 코끼리는 너무 가슴이 아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합니다. 깊은 고민 끝에 코끼리는 오아시스로 도망쳐 온 사람들에게 "근처에 높은 산이 있으니 그리 가시오 거기에 도착하면 커다란 코끼리가 죽어 있을 것이니, 그 고기를 먹고 기운을 차리시오."그리고 부처님코끼리는 사람들 몰래 먼저 산으로 올라가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습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불쌍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신들을 걱정하여 그 코끼리가 보인 희생에 크게 감동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기탄잘리'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와 코끼리가 다른 이들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을 가진 인물로 나옵니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지요.
주인공 소녀의 이름인 '기탄잘리Gitanjali'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한 분도 있을 겁니다 '기탄잘리'는 벵골어로 노래를 뜻하는 '기타Gita'와 헌정獻呈을 뜻하는 '안잘리Anjali'가 합쳐진 단어로 붙여서 사용하면 헌시, 노래의봉헌, 신께 바치는 노래라는 뜻이 됩니다. 참 아름다운 이름이죠? 그런데 '기탄잘리'는 서양인이 아닌 작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대문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 - 1941'의 시집 제목이기도 합니다. 힌두와 무슬림과 영국이라는 서로 다른 세 문화의 정수를 한 몸에 녹여 낸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20세기 인도의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소녀 '기탄잘리'와 '코끼리 기탄잘리'를 서로 묶는 끈이 사람과 동물과 자연을 가리지 않는 사랑과 배려라는 뜻에서 다른 이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의 '기탄잘리'라는 이름은 참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166 - 175쪽
* 잡념이 보배다 /김성수 지음 /2006.6.20 펴낸곳 : 생각하는백성
<빈 마음의 소망은 우주가 듣는다>
원 세우기의효력은 대단히 강력하다. 특히 몸과 마음이 고요한 명상 속에서의 원 세우기는 오래 묶은 잠재의식의 땅을 파헤쳐서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대는 관찰하고, 자각하고, 인정하고, 비우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신이 지금 무엇을 비웠는지 훤히 알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소망을 갖는 것은 강력한 마음의 에너지를 준비한 것과도 같다.
명상으로 몸을 치료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질 수도 있다. 이 또한 '원 세우기'의 방법을 그대로 인용한다. 무엇보다도 그대가 정상적으로 치유되어 세상의 많은 환자들 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본성의 자리에서 보기에 마땅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자에서 사랑을 주는 자, 웃음을 받는 자에서 웃음을 주는 자, 치료를 받는 자에서 치료를 해주는 자, 밥을 받아먹는 자에서 밥을 떠먹여주는 자... 그대가 주도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는 그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과 신체 에너지는 상승 곡선을 긋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이제껏 공부해왔듯이 환부에 걸린 마음을 명상 속에서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관찰하는 동안 떠오른 생각이나 영상, 과거 기억들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그러한 환부를 갖고 있는 자신의 몸을 모두 소멸시키는 작업을 거듭 해보라. 소멸하는 것은 비우기이고, 자신의 몸을 소멸하므로써 몸뚱이에 붙은 집착을 덜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면서 그 환부에 치유의 빛을 강력하게 보내주기도 하고 그 환부가 깨끗하고 말끔히 나은 상태를 그려보기도 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원 세우기'는 관찰하기, 자각하기, 인정하기, 비우기에 이어서 할 수 있다. 그대가 만약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다. 명상 차원에서 그대는 곧바로 '원 세우기'를 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 지금 당면한 문제에서부터 인생 전반을 조망하는 것까지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으며 100일 동안이 공부 과제를 들고 서원을 세워 공부해 나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모든 방식이 그대 앞에 활짝 열려 있다. 278 - 280쪽
* 흰둥이들아, 들어봐라! /에리히 쇠르만 엮음 /윤구병 교열 /2005.4.11 장백
<마무리글 : '흰둥이'가 된 젊은 누렁이들에게>
어렸을 적에 읽었던 사하라 사막 이야기가 생각난다. 물이 없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몇 포기 나지 않은 풀잎에 맺힌 이슬을 조심조심 단지에 따 담아, 그것으로 목을 축여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하라 사막에 기관 고장으로 불시착한 비행사가 그 사막 젊은이 하나와 사귀어 이렇게 꼬드겼다던가, 물을 얼마든지 양것 마실 수 있을 뿐더러, 그 물에 몸을 풍덩 담글 수도 있고, 그 물에서 헤엄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곳에서는 그 물이 폭포수를 이루어 떨어지는 데, 그런 곳을 구경시켜주겠노라고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느냐고, '뻥까지 말라'고 아예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그 젊은이를 어찌어찌 꼬드겨서 문명 세계로 데리고 나와, 수돗물과 호수와 강과 폭포수를 구경시켜 주었다던가, 혹시 그 원주민 젊은이가 속했던 집단이 북아프리카 지역의 베르베르 족이었을지도 몰라.
어딜 가나 펑펑 쏟아지거나 솟구치는 그 물, 물, 물, 땅 위에 강을 이루어 흐를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그 흔하디 흔한 물을 보고 넋이 빠진 젊은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상태로 문명 세계에 흠뻑 젖어 지내던 그 젊은이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자, 그 자리에서 자기를 그 물 많은 멋진 세상으로 끌고 나왔던 비행사를 목졸라 죽이고 자기가 살던 그 척박한 땅으로 되돌아갔다던가.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그 원주민 젊은이가 왜 자기를 문명 세계로 이끈 그 비행사에게 '은혜를 원수오 갚는 짓'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에 내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았던 흑인들은 거개가 노예 상태에 있거나, 허그렛일을 허거나, 뒷골목에서 빈둥대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미개하고, 야만스럽고, 미련하고, 비위생적이고, 부도덕한 '깜둥이'들에 지나지 않았다.(아주 나중에야 나는 프란츠 파농이나 말콤 엑스나 넬슨 만델라 같은 그리고 땅콩박사 같은 멋 있고 본받을 만한 흑인들이 이 세상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깜둥이'를 '검은이'로 대접해주고, 아무데나 똥오줌을 싸 대는 야만인에게 수세식 변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평생에 한번도 목욕한 적이 없는 냄새나는 몸뚱이를 날마다 씻게 해주고, '얌' 한 뿌리를 캐려고 하루 종일 사막을 헤매면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던 처지에서 벗어나 레스토랑에 앉아 기름진 음식을 입맛껏, 양껏 골라먹게 해주었다는데, 무엇 때문에 그 고마운 백인에게 그렇게 모진 해꼬지를 한단 말인가.
어린 나는 다방에서 차를 나르는 여자를 '숙녀님'(레이디-레지)이라고 높여 부른다고 해서, 또 술집에서 손님 접대하는 여자를 옛날에 양반 중의 양반인 사대부 가문의 시집 안 간 여자 상전에게 붙이던 극존칭인 '아가씨'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이들의 신분이 높아지고 그만큼 사회에서 대접받는 처지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불러봤자 도리어 이름이 더렵혀지는 꼴이 되기 십상인데....
그동안 '선진된 문명국'에서 하늘을 찢고 나타난 흰둥이들이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누렁이'와 '검둥이'들을 개화시키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을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산업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또 관광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미끼로 제 나라에 데리고 가서 얼치기 문명인으로 길들여 종놈으로 부리면서, 제 나라, 제 민족을 팔아먹는 년놈들로 바꾸어 놓았던가. 이 흰둥이들을 남태평양 사모아 섬의 원주민들은 '빠빠라기'라고 불렀다. '빠빠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 글은 바로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꼭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구술한 투이아비의 입맛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다 그동안 여러 출판사가 '빠빠라기'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 어느 출판사에서 펴낸 글을 보아도 투이아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려퍼지지 못했다.
원주민의 입맛을 되살려 우리 젊은이들 귀에 쏙 들어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 우리말 질서에 맞게 그리고 되도록이면 입말에 가깝게 옮기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 결과 교열본으로 선보이는 것이 도서출판 장백의 "흰둥이들아, 들어봐라"이다. 이 안에 담긴 내용에 무얼 덧붙이는 것은 뱀에게 다리를 달아주는 꼴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이미 또 하나의 '빠빠라기'로 탈바꿈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흰둥이들의 개노릇을 하는 사슬에 묶인 '누렁이'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해방된 대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기 바란다. 211 - 215쪽
2005년 1월 변산에서 윤구병
* 영원히 살아있는 세상 /우 명 지음 /2004.5.8 참출판사
<진리가 와도 인간은 모르고 진리인 자만이 안다>
인간은 자기의 죄업에 갇혀 있어 인간은 진리라는 것을 모른다 인간은 그 진리를 모르기에 진리인 구세주가 와도 모른다
성경에 말세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모른다고 하느님만 안다고 했다 또 구세주가 도둑과 같이 온다고 했고 또 깨어 있으라고 했다 또 인자가 온다고 했고 또 만인이 다 본다고 했다 이 말씀은 모두가 진리가 사람으로 왔을 때 그 진리가 사람이라 사람은 진리를 볼 수가 없고 자기의 관념의 환상적인 구세주를 기다리기에 그 환상에 맞지 않으면 아니라고 한다 구세주는 이렇게 하라고 해서 천극락 가는 것이 아닌 영원불변의 창조주 진리인
우주의 에너지와 빛으로 화하게 하여야 그 진리라야 살 수가 있는 것이라 사람은 진리 됨을 모르고 또 진리를 모르기에 망상의 존재를 기다리나 그것은 자기가 기다리는 존재는 영원히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진리로 오실 분은 산 자와 진리 된 자만 알 수가 있으며 진리된 자가 없기에 모른다 또 사람 중 진리가 있어도 만인이 모두 보고 있지만 알지 못하고 만인이 진리인 사람을 보고 있지만 사람이 모르기에 도둑과 같이 오고 아무도 모르고 진리만이 알고 사람을 진리 되게 하나 사람은 모른다
<구세주란 진리 되게 하는 자라>
사람들은 흔히들 세상에 구세주가 온다고 말하고 각 종교에서는 미륵이 온다고 하고 재림예수가 온다고도 하고 정도령이 온다고 하여 또 열석자로도 온다고도 하고 판 밖에서 온다고 하였다 이 모든 곳에서 기다리나 그 시때는 아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 진리 된 자가 와야 진리 된 자만이 알기에 그렇다 사람은 자기의 의식에 자기가 환상하는 그런 자는 와야 하는데 그런자는 세상에 없고 그런 자는 영원히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구세주가 와서 자기가 선택된 자인 줄 알고 천극락의 나라에 데리고 가는 줄 알고 있다 천극락은 죄가 하나도 없고 진리인 구세주가 된 자만 갈 수가 있는 것이라 사람들이 지혜가 없어 어느 것이 살고 죽는지 모른다 산 자만이 이 사실을 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진리인 만고불변의 창조주의 에너지와 빛 자체로 나지 않고는 살 자가 없다 진리가 되지 않고는 살 자가 없다 진리가 되지 않고는 영생 천극락에 살 수가 없다 구세주란 영원한 생명을 줄 수가 있어야 하기에 그 진리인 생명을 주어야 한다 진리 되게 하는 자가 구세주다 312 - 315쪽
* 코란 속에 담긴 무소유의 행복 /문미화 조선학 지음 /2002.3.20 느낌이있는 나무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 :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종교관이 다른 종교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태교는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고 모두가 인격 종교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 세 종교 모두 문명의 4대 발상지 중 하나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있는 중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출발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세 종교는 동일한 하느님(각기 여호와, 야훼, 알라 라고부름)을 섬기며 '구약'이라는 거의 동일한 경전을 사용하고 있다. 이스람교에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내리신 토라(구약성경)를 믿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슬람교와 기곡교의 가장 큰 차이점을 살펴보면 첫째, 예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 물론 '코란'에서도 여러 곳에 예수의 탄생과 서역 그리고 여러 은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지자로서 높게 평가할 뿐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유일하신 분으로 배우자가 없어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며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단지 선지자로 부를 뿐, 구원주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믿는다. 기록에 따르면 마호메트가 성겨을 읽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읽은 성경은 마호메트가 태어나기 수 백년 전부터 기록되었던 '성경의 사본'들(1948년 팔레시튼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로 오늘날 성경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코란'과 '성경'이 닮은 점이 많고, 또 비슷한 내용을 믿는다고 하여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같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종교가 같은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는데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달라 그들은 종교적인 내용으로 융합될 수는 없다.
둘째,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을 믿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이스람교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받았다고 믿고,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서로 같아야 하지만 '코란'과 '성경'은 근본적인 면에서 엄밀히 다르다. 넷째, 이스람교에서는 마호메트를 가장 높게 섬기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216 - 218쪽
* 자유인 이솝 /한스 요아힘 셰틀리히 소설 /박공우 그림 전재민 옮김 /2000.7.7 참솔
옮긴이의 글 - <언어와 지혜라는 무기로 세상에 도전한 이솝> : 이솝은 동물의 행동을 빌려 인간세계의 온갖 모습을 보여주는 '이솝 이야기'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 생종했던 사람으로 사모스인이라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프리기아인이라고도 한다. '이솝 이야기'는 원래 이솝의 전기에 실려 있었다가 나중에 별도의 책으로 분리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솝 이야기'를 쓴 사람이 실제로 이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시대에 여러 사람이 쓴 이야기를 모은 것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솝이란 인물조차 가공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스스로는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 주장이고, 소크라테스 주장인지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겄는가?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이솝이 남긴 우화와 이솝의 삶을 기록해 놓은 책들이 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가 언제 이 책을 썼는가라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뜻과 그것이 전달하려는 깊은 뜻(메시지)일 것이다. "자유인 이솝"은 독일의 유명작가 한스 요아힘 셰틀리히가 10세기경 익명의 그리스 작가가 썼다고 추정되는 문헌의 독일어 번역본(디트리히 출판사. 라이프치히. 1974)을 토대로 이솝의 삶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호메로스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등이 영웅과 귀족문학이라면, '이솝우화'는 천민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솝이 그리는 세계는 조화로운 이상세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눈물겨운 투쟁으리 역사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솝은 본디 노예신분이었다가 나중에 자유의몸이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솝이 허구의 인물인지 또는 실존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하더라도, 알려진 바대로라면 이솝은 생존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졌다. 그는 몹시 추한 외모에 말도 못하고 힘도 없는 아주 나약한 존재였고, 더군다나 노예 신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솝의 선행에 감동받은 여신女神이 이솝의 말문을 트이게 하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혜와 기지를 선사했다. 이솝의 삶에서 언어, 지혜,기지(얼 말 글)는 유일한 생존 도구이며, 투쟁도구가 된 세이다. 이솝은 언어, 지혜, 논리(말 얼 글)의 힘으로 자신의 주인이자 유명한 철학자인 크산토스를 한껏 조롱하고, 무능과 무지를 일깨워 준다 그리고 마침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부귀영화도 잠깐, 마지막에는 어처구니없게(아이로니컬하게)도 '말재간'으로 말미암아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솝에게 조롱당한 델포이인들이 격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이솝은 특유의 기지(위트)와 지혜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언어가 가져다 준 행운은 그 수명을 다한 것일까. 이솝은 델포이인들을 저주하며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는다. 결국 그의 '말재간'은 이솝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휘두른 칼날과 같았다.
작가 셰틀리히는 이야기에 몰입하는 대신, 건조하리만치 축약된 표현을 사용해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에피소드를 빠르게 전개시킨다. 그리하여 작가 대신 독자들이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게 하고 있다 또 그는 윤리적인 해석이나 문학적 가감없이 에피소드들을 따라감으로써,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바로 언어 '말재주'를 매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욕과 허무, 그리고 고뇌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말(언어)은 신의 선물인 동시에 때로 독약이 되기도 한다. 셰틀리히 자신이 구동독 체제에서 작가로서 흥망성쇠를 겪은 사람이므로, 그가 이솝의 삶을 작품 소재로 선택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솝의 삶은 그가 쓴 우화만큼이나 재미있다. 이솝의 언어와 지혜와 논리는 때로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때로는 엉뚱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을 한번 비틀어서 바라보는 도도한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솝이 처음부터 가졌던 것이 아니라, 온갖 콤플레스와 고난을 이겨 냄으로써 갖게 된 소중한 재산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가 직접 겪은 고통 속에서 얻을 수 있었던 찬란한 재능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솝의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과 악을 넘어서 위트와 지혜와 도전의식의 장이었다. 바로 우리의 자연이 그러하듯이....... 2000년 6월 전재민 154 - 157쪽
* 지식을 초월한 차원 /오쇼 라즈니쉬 /길연 옮김 /1993.5.27 관음출판사
< 9. 존재의 찬란함을 알 때 > : 1987년 4월 25일 동양의 신비가들은 의식세계의 진화가 7개의 차크라(센터中心) 안에서 분류되는 것으로 본다.... 옛말에 일곱 번째는 신을 아는 것, 여섯 번째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다섯 번재는 창조적이 되는 것, 그리고 네 번째는 '사랑이 충만헤게 되는 것, 다른 사람과 나누고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라 했다. 네 번째로써 그대 여로旅路는 확실해진다. 그대가 일곱 번째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보장될 수 있다. 네 번째 전에는 그대가 길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
첫번째 센터는 섹스 센터, 생식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삶이 지속된다. 바로 그 위의 것, 섹스 에너지는 위로 옮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굉장한 체험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그대 자신이 자급 자족할 수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섹스는 항상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센터는 만족하는 자급 자족의 센터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충족한다. 세 번째 센터에서는 내가 누구인가, 이 자급 자족하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찾기 시작한다. 이 센터들은 중요하다.
그대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순간 네 번째 센터가 열리고 그대는 그대가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네 번째 전에 여로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완성할 수 없게 될 가능성도 있다. 길을 잘못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대 자신이 자급 자족함을, 만족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대는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될 수도 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충족감이 너무 커서 모든 의문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때에 스승(마스터)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도중 어디엔가 주저 앉아 버리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데 머물러 앉아 버릴 만한 아름다운 지점들이 있다. 충만을 느끼는 감정, 계속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지만 스승은 계속해서 그대를 성가시게 해서 그대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대는 만족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니 적어도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라. 그대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에 새로운 문이 열린다. 왜냐하면 그대는 삶을, 사랑을, 즐거움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풍부해서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스승은 그대를 꾸짖으며 괴롭힌다 '네 번째로 움직여라, 가장 순수한 사랑의 에너지를 그대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존재의 찬란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네 번째 이후에 그대는 잘못해서 길을 잃을 수 없다. 일단 그대가 존재의 찬란함을 알고 나면 창조성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대는 아름다움을 알았다. 그대 역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싶어한다. 그대는 창조자가 되기를 원한다 창조 하고자 하는 굉장한 염원이 일어난다. 그대가 사랑을 느낄 때마다 창조성이 그림자처럼 사랑과 함께 오는 것을 항상 느끼게 된다. 창조성을 지닌 사람은 단순히 바깥만을 보고 있을 수 없다 밖에는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하늘이 밖에 있는 것처럼 그것에 균형을 맞추어 안에도 똑같은 무한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승이 있다면 좋은 일이다. 뛰어난 스승이 있다면 이런 체험들이 그대를 위로 이끌어갈 것이다. 일단 제3의 눈이 떠지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그대 의식세계의 광활한 공간 전체를 보게 된다. 그대는 신전神殿에 아주 가깝게 왔다 그대는 그 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우주의 의식세계를 볼 것이고, 그곳에서 그대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그곳에서 그대는 궁극의 자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그대의 영원성을 찾는다.
이것들이 7개의 센터들이다. 단지 임의로 만들어낸 구분들, 그렇게 해서 구도자들은 조직적인 방법으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 갈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 그대가 그대 스스로 추구해 간다면 뒤엉켜 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특히 네 번째 센터 전에서는 위험이 많다 네 번째 센터 이후에서까지도.... 많은 시인들이 다섯 번째에 있는 창조성 센터에서 살았다 그리고 더 이상 거기에서 나아가질 못했다. 위대한 예술을 낳은 많은 화가들, 많은 무용가들, 많은 성악가들, 그렇지만 제3의 눈으로까지는 절대로 가 보지를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 아름다움을 아는 제3의 눈으로 남아있었던 많은 신비가들도 있었다. 이것은 아주 만족하고 충족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은 자신이 도달했다고 생각했었다. 좀더 앞에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고 그대에게 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그대 무지로부터 그대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거의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에 길을 알고 있으며 함정을 알고 있고, 주저 앉아 버릴 수도 있는 아름다운 지점들을 알고 있고 그리고 그대를 반대해서까지도 그대가 그대의 잠재성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그대를 계속해서 밀어 줄 만큼의 자비심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하다. 221 - 225쪽
* 루쉰의 삶과 사상 '루쉰전' /왕스징 지음 /신영복 유세종 옮김 /1992.10.5 다섯수레
루쉰의 죽음 : 1935년 말경 루쉰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많은 친구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모여서 상의한 후 루쉰을 소련에 보내어 치료받을 수 있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 휴양하면서 그가 '중국문학사'를 탈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러나 루쉰은 자신의 병세가 아직까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여겼고 또 당장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투쟁의 요구를 고려하여 조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병치료는 잠시 미루어두게 됐고, 일본에 가서 병을 치료하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루쉰은 응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반대파들은 루쉰이 곧 출국할 것이라는 소문을 사방에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루쉰은 다른 나라에 가서 병을 치료하려던 계획을 아예 단념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갈 것이라고 그들이 예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가지 않겠다. 그래서 그들을 좀 불편하게 만들어 보고 싶다." 동디들의 거듭되는 권고에 루쉰은 이듬해 여름이 지난 다음에나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출국하여 휴양한다고 하더라도 수중에 있는 일은 끝내야겠다고 하였다. 1936년 3월 그가 몸져 누울 줄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4월 초에 병세가 좀 호전되자 그는 또 일을 시작하였다. 5월 중순에 병이 다시 도졌으나 그는 여전히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후로 그의 병세는 나날이 심각해져 갔다. 5월 말부터 루쉰은 온종일 등나무 침대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있지 않을 수 없었으며 걷는 것조차 불편할 정도가 되었다. 그 후 말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몇몇 가까운 친구들은 스메들리에게 부탁해서 상해에 와있는 유명한 폐병 치료 전문가인 떵鄧 의사를 불러오자고 상의하였다.
떵 의사는 병이 매우 위급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루쉰이 만일 유럽사람이었다면 5년 전에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래서 벗글은 루쉰에게 우선 상해에서 삼개월 정도 치료한 다음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요양하라고 강력하게 권하였다. 그러나 루쉰은 여전히 자신의 전투초소를 떠나려 하지 안았으며,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해를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조국과 민중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6월에 그는 아주 몸져 눕게 되었다. 그 후로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일어나 앉는 것조차도 힘들게 되었다. 가을이 되자 병은 잠시 호전되었다 8월 초에 그는 또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이 더이상 지탱해나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으며 '죽음의 예감'같은 것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0월 초에 루쉰의 병은 갑자기 거의 나은 듯하였다. 체중도 조금 불었고 때로 밖에 나가 거닐 수도 있었으며 영화구경도 하고 친구들을 찾아가서 잠시 동안 앉아 있기도 하였다. 10월8일에는 팔선교에 있는 청년회관에 가서 제2차 전국목각전람회를 참관하고 그곳에서 청년 목각가들과 오랫동안 목각 창작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까지 했다. 16일에는 차오찡화曺晴華가 번역한 '소련작가 7인집'의 머리말을 썼고 17일에는 가족들과 이사하는 것에 대해서 상의까지 하였다. 이사문제 거론은 당시 루쉰이 거주하던 대륙 신촌 부근에 일본의 해군 사령부가 있었고 그래서 늘 전쟁 분위기가 매우 짙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7일 밤에 그는 다시 몸져누웠다. 18일에는 숨쉬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더니 19일 아침 5시25분, 전투의 열정으로 고동치던 그의 심장은 드디어 멈추고 말았다. 루쉰은 끝내 폐병으로 그가 사랑했던 조국과 민중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다하지 못한 사업을 두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288 - 290쪽
* 수피의 가르침 /이드레스 샤흐 /박상준 옮김 /1990.4.20 고려원
< 여관 > : 한 수피가 왕궁으로 들어가더니 곧장 왕좌를 향하여 걸어갔다. 너무나 기막힌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결국 왕이 나와서 수피에게 물었다. "수피는 뭘 원하시오?" 수피가 말했다 "폐하, 저는 다만 이 여관에서 잠잘 곳을 찾고 있답니다." 왕이 말했다 "여긴 여관이 아니오 내 왕궁이오." 수피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폐하 이전엔 누구의 것이었읍니까?" "내 아버지의 것이었지요." "또 그 전에는요?" "물론 내 할아버지의 것이었소." "보십시오. 사람들이 오고 가고, 또 머물다가 떠나곤 하는 이곳이 여관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 희망 > : 한 친구가 어느 날 꿈속에서 천사를 만났다. 천사는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그 친구가 천사에게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천사가 말했다 "이 책 속엔 신의 친구 이름이 전부 적혀 있지요." 그 친구가 물었다. "그럼 제 이름도 적혀 있나요?" 천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신의 친구가 아니요." 그 친구가 말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는 신의 친구의 친구예요." 순간, 천사는 말이 없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리스트 맨 윗머리에 그대의 이름을 적으라는 지시를 지금 받았어요.. 희망이란 정말 희망 없음에서 탄생하죠.."
<위가 뒤집혔소> : 두 사람이 수피를 찾아왔다. 한 사람은 두통꺼리를 갖고 있었고, 다른 이는 흐릿한 느낌(비전秘傳)을 갖고 있었다. 수피가 말했다. "두 사람 다 나쁜 음식 탓이오."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수피가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위장이 뒤집혔소." 두 사람은 버럭 화를 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린 머리와 눈으로 추구하고 있소. 그렇게 어리석진 않소 쳇!" ㅋㅋㅋ ㅋ
<누구를 찾습니까> :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개똥이가 물었다. "누굴 찾소?" 방문자가 대답했다. :개똥이를 찾습니다." 개똥이가 다시 말했다. "나 역시 삼십년 동안 개똥이를 찾고 있었소. 그런데 아직도 그를 못 찾았소."
<문지기와 개> : 문지기가 개를 두들겨패고 있었다. 개가 매를 맞을 때마다 깨개겡 깨개겡 하고 짖었다. 누가 개에게 물었다. "오 멍멍아, 저 사람이 왜 널 때리는 거냐?" 개가 사람의 소리로 말을 했다. "저 사람은 내가 자기보다 능력 있는 걸 차마 눈뜨고는 못 보겠나 봐요.." 139 - 141쪽
꾸준히 읽어보신 분께 덕담 한 줄.. "그 성실함은 천만명 중 한 명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고오마워여 !
얼이 말이구 말이 글이 됐다네 그리하여 얼말글 속에 깨우침이 늘 살고 있다는 구먼, 그려 그렇군 그러네 허허 허- 오늘은 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