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필리피 3,3-8ㄱ 루카 15,1-10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과 은전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며
투덜거리는 상황입니다.
첫째 비유에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다닙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비효율적이고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길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는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며 이웃들이 자신의 기쁨에 함께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어서 은전 열 닢 가운데 한 닢을 되찾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은전 열 닢을 가졌던 부인은
잃어버린 한 닢을 찾으려고 집 안을 샅샅이 뒤집니다. ‘은전 열 닢’은 ‘열 드라크마’인데,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 은전 한 닢은 로마의 한 데나리온, 곧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과 비슷한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를 전 재산으로 가지고 있던 두 번째 비유 속 부인에게
한 드라크마는 재산의 십 분의 일, 곧 적지 않은 손실을 뜻합니다.
은전 한 닢을 되찾은 부인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며 이웃들을 초대합니다.
이처럼 잃었던 양과 은전을 되찾은 비유에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초대가 반복됩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이 초대는 죄인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 답변을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질문합니다.
나는 죄인의 회개와 이웃의 기쁨에 공감하는가? 내 기준에 사로잡혀 함께 기뻐하지도,
함께 슬퍼하지도 못한 채 ‘나만의 섬’에서 쓸쓸히 지내지는 않는가?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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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필리피 3,3-8ㄱ 루카 15,1-10
강론을 하고, 강의를 하는 편이지만 때로 강론을 듣고, 강의를 듣는 것은 제게도 큰 기쁨입니다.
말씀을 통한 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계속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강론하신
신부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공감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팔을 들고 기도하면 아말렉 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팔을 내리면 아말렉 군사와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후르는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모세는 계속 팔을 들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었고, 결국 여호수아는 아말렉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부탁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불의한 재판관은 가난한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계속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어 주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군대에서 가장 엄하게 책임을 묻는 것은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부대와 군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초소에는 경비하는 군인들이 시간을 정해서 지키게 됩니다. 만일 경계를 소홀히 해서
적이 들어오면 부대가 위험해 지기 때문입니다.
지휘관들은 야간에 순찰을 돌면서 초소경비를 잘하는지 감독합니다. 만일 이 때
지휘관의 순찰을 알아채지 못하면 경계를 소홀히 한 책임으로 엄중한 문책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소 경비는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저도 군에 있을 때 6초소의 경계 근무를 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적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지만 순찰하는 지휘관에게 경계근무를 잘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커다란 댐도 작은 틈새로 물이 새면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직책과 직분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과 재능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직책과 직분 그리고 능력과 재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깨어있는 처녀들이 신랑을 맞으러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계속의 영성’은 깨어 있는 영성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세상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깨어 있음’의 또 다른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했던 바오로 사도에게 세상의 직책과 직분은 이제 헛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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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필리피 3,3-8ㄱ 루카 15,1-10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 6. 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드락메를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 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 2)
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 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 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명심하고, 그분처럼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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