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강. 귀신의 처소가 된 교회 (계 18:1-8)
계 18:1-8절.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요한계시록 17장은 타락한 교회인 음녀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18장은 음녀의 심판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17장과 18장은 하나 이야기인 겁니다.
음녀의 모습은 곧 이 세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교회 모습은 곧 그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음녀의 멸망 이야기는 곧 이 세상의 멸망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과 음녀의 운명은 같이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고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음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빼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 당할 당시에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의로운 롯을 빼내 주신 것과 같아요.
종말에도 하나님은 천사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보내서 타락한 교회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에요.
예수님의 재림으로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은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아요.
세상의 타락이 교회의 타락으로 나타나고,
교회의 타락이 세상의 타락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음녀는 영적으로는 타락한 교회를 말해주고 있지만,
광의적인 면으로는 타락된 온 세상의 모습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의인화하면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에요.
그럼 세상에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다는 말이 되겠자요.
천지를 장소적 의미로 보면 천국과 지옥이에요.
천국은 하늘나라이고 지옥은 이 땅이에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두 사람은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지옥 백성은 땅에 버려둠을 당하고,
천국 백성은 하늘로 데려감을 당할 것입니다.
이 일을 두 사람이 매를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였어요.
버려둠은 멸망이고 데려감은 구원이에요.
종말은 갈라져요.
이걸 마태복음 25장에서 종말의 심판 때 양과 염소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과 염소에게 각각 창세전에 이미 예비 된 나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러면 창세전에 양과 염소의 운명은 정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양과 염소처럼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이들이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영원히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갈라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심판성이 담겨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이에요.
자기 백성이라 함은 자기 백성 아닌 자도 있다는 뜻입니다.
맞아요.
세상에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가 있어요.
이걸 예수님은 너희와 저희로 표현하였어요.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이 되었다고 하고,
저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어요.
이 일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고,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양과 염소가 있어요.
그러므로 멸망당하는 음녀 속에 구원받는 백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내 백성아 그들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 계시록 7장에서 각 지파 속에서 인을 치는 것으로 보여 주었어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이를 교회 안에 셋팅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인류 역사가 시작이 되면서 아담의 집안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집안에 가인과 아벨이 있고,
노아의 집안에 함과 셈(야벳)이 있고,
아브라함 집안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고,
이삭의 집안에 에서와 야곱이 있고,
야곱의 집안에 라헬의 소생인 요셉과 레아의 소생인 다른 형제가 있고,
국가적으로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로 나타나고,
종말에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하늘에 거하는 자라고 하고,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땅에 거하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어린 양의 신부라고 하고,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17장 18장의 음녀는 적그리스도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여자의 후손이고,
적그리스도의 신부들은 뱀의 후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민족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를 종이라 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과 사라의 소생인 이삭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어요.
이는 아브라함의 집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집안 속에 유업을 이를 아들이 있고 종이 있는 겁니다.
유업을 이을 아들은 약속으로 낳아진 자이고,
집에서 쫓겨날 종은 육으로 낳아진 자입니다.
약속으로 난 이삭은 아들이고,
육으로 난 이스마엘은 종인 것입니다.
아들과 종은 어미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모계(母系)사회에요.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미가 이방인이면 자식은 이방인으로 취급을 해요.
반대로 아버지가 이방인이고 어미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을 해 주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두의 아버지에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에게 아버지에요.
이것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잘 나타나 있어요.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건 마치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아요.
하지만 부자는 지옥에 있고 나사로는 천국에 있어요.
지옥에 간 부자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천국에 간 나사로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일하게 일반은총으로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동일한 아들일지라도 어미에 따라서 달리 대우하세요.
이 모습을 아브라함이 사라의 소생과 하갈의 소생을 달리대하는 것으로 보여주었어요.
아브라함은 어미를 기준으로 적자와 서자로 구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분 법이에요.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신들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낳아진 자들만 천국 백성으로 인정을 해 주세요.
예수가 낳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예수님과 세상의 수많은 신들은 사라와 하갈처럼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야곱의 가정 속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야곱이 라헬에게서 난 요셉을 적자로 인정하고 레아와 몸종들에게 난 자들은 서자로 취급했어요.
그래서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등재해 놓은 것입니다.
즉 야곱의 호적에는 요셉만 올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구원 얻을 이름을 예수 이외 주시지 않았어요.
예수로 낳아진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고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집안으로 비유하면 예수님이 사라인 것입니다.
사라가 낳은 이삭은 우리들이구요.
그럼 사라가 낳은 아들과 하갈이 낳은 아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였어요.
그런데 세월이 가도 감감 무소식인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자기들 방법으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노하십니다.
왜 내 약속을 믿지 못하고 너희들 마음대로 아들을 낳았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브람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할례는 죽음을 상징해요.
그래서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을 하고 사래를 사라로 개명을 시킵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은 부모가 달려졌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은 육적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이에요.
이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할례 후에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하나님이 낳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라에게 이삭을 잉태케 하신 것입니다.
이러면 이삭은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사라를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어미라고 하였어요.
사라가 낳은 아들인 이삭을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하였어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이 사라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이 이삭처럼 유업을 이을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사라의 죽은 몸에서 태어났어요.
이삭은 경수가 끊어진 죽은 여자인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나는 것과 같아요.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경수가 있는 산 여자인 하갈의 몸에서 인간의 힘으로 태어났고,
이삭은 경수가 끊어진 죽은 여자인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어요.
이스마엘은 땅에서 난 인간의 아들이고,
이삭은 하늘에서 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삭은 성령으로 난 자라 하고,
이스마엘은 육으로 난 자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육으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을 하였어요.
종이 아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이 보았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괴롭히는 종을 집에서 쫓아내어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큰 근심에 쌓입니다.
이는 장차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이삭의 후손들을 괴롭힐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으로 난 이삭의 후손에게도 열두 방백을 주시고,
육으로 난 이스마엘의 후손에게도 열두 방백을 주십니다.
이는 이 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전쟁을 통해서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다툼이 민족으로 확대되어서 나타나게 됩니다.
종말에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과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 나타납니다.
세상에 수많은 민족이 있어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두 민족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구분이 되어요.
이 둘은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와 성도의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땅)에 속한 음녀가 영(하늘)에 속한 성도를 이기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영은 하늘에 속하였고 육은 이 세상에 속하였어요.
결국 영은 이 세상으로부터 축출당하고 육이 이 세상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뱀의 후손인 인간의 아들들로부터 축출을 당한 여자의 후손인 하나님의 아들들을 하늘나라로 옮겨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는 나라라고 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아들들이 사는 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 이야기에요.
천국 백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지옥 백성은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아가요.
하나님은 천국 백성에게 하늘을 유업으로 주셨고,
지옥 백성에게는 이 땅을 유업으로 주었어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은 가치관이 달라요.
존재 양식이 달라요.
자연히 살아가는 의미도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의 먹거리가 달라요.
하늘에 속한 자는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땅에 속한 자는 떡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말씀을 들으면 행복하고,
땅에 속한 자는 떡을 먹어야 행복합니다.
말씀이 좋은 사람은 말씀을 쫓아가고,
떡이 좋은 사람은 떡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각자의 속성이에요.
말씀이 양식인 사람에게 성경을 가지고 세상의 떡 이야기를 하면 싫어하고,
떡이 양식인 사람에게 성경을 가지고 하늘 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해요.
이건 서로 먹거리가 달라서 그래요.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각종 짐승들에게 각자의 먹거리를 주셨어요.
하나님은 소에게는 풀을 먹게 하셨고, 사자에게는 고기를 먹게 하셨어요.
소가 고기를 먹으면 미쳐버리고, 사자가 풀을 먹어도 미쳐버려요.
하나님이 각자 주신 양식을 먹어야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어요.
이와같이 말씀을 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해하고,
떡을 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의 떡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해해요.
하나님은 속성이 다른 두 사람은 온 세상에 두었어요.
온 세상을 구약에서는 한 집안에 축약을 시켜 놓았어요.
이를 야곱의 집안에서 에서와 야곱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에서는 땅에 속한 자를 예표하고,
야곱은 하늘에 속한 자를 예표합니다.
에서는 땅에 속하였으므로 장자권으로 떡을 샀고,
야곱은 하늘에 속하였으므로 떡으로 장자권을 샀습니다.
장자권은 구원과 같아요.
이러면 에서는 땅에 떡을 얻고자 하늘의 구원을 버렸고,
야곱은 하늘의 구원을 얻고자 땅에 떡을 버린 것입니다.
장자권으로 떡을 산 에서는 이 땅에서 붙박이로 살아가고,
반면에 떡으로 장자권을 산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조를 교회 안에 그대로 두셨어요.
교회 안에 말씀에 가치로 사는 자와 떡에 가치로 사는 자가 있어요.
두 사람이 서로의 가치관과 행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고 급기야 서로를 배척하고 밀어내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음녀 이야기는 세상 이야기이면서 교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에 주신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는 일차적으로는 교회 이야기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집안 이야기를 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러 저런 말을 하는 것과 같아요.
부모의 말 속에는 격려의 말도 있고 책망의 말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려 가는 것은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는 것과 같아요.
부모의 심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하나에요.
자식은 부모의 얼굴과 같아요.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음이 간섭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간섭은 사랑의 다른 면이에요.
간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간섭하면서 어그러진 길을 가면 책망을 하고 때론 채찍질도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다툼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은 툭 하면 이방신을 섬깁니다.
그럼 하나님은 징계합니다.
사사기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축복과 타락 그리고 징계와 회개,,
이러한 악순환을 대략 400여 년 동안 반복합니다.
이건 광야 40년을 확대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약 전체를 말해주기도 해요.
더 확대하면 이 세상 역사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교훈은 죄인들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을 주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담당케 하심으로 구원해 내는 것으로 구약을 마감하는 모습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약은 완성이 되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 모두 언약의 후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종말은 신약의 종말을 보여 주는 그림자와 같아요.
이스라엘은 태어나면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일컬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자체가 교회와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회당 안에는 귀신 들린 자들과 각색 병든 자들로 가득했어요.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셨어요.
베데스다 못가에 보면 각색 병든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베데스다’ 라는 말은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을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집에 병든 자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구약 교회의 영적 모습을 베데스다 못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베데스다를 이 시대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그럼 교회에 각종 병든 자들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초대교회라고 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맨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인 종말의 교회상을 보여주고 있음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종말 교회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음녀가 손에 금 잔을 들고 사치하고 연락하면서 스스로를 여황이라고 하면서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엇으로 부자라고 하고 부요하다고 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까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까 여기가 천국이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먹고살 만하니까 아쉬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육적으로는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단은 냉엄합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영적 진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요한데 영적으로는 가난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어요.
그럼 교회의 부요는 당연히 하늘의 신령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늘의 것은 없고 땅의 것으로만 가득한 것입니다.
말씀은 없고 돈만 넘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이 시대 교회와 같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 것으로 치부하고 있어요.
교회라는 건물들은 화려한데 그 속은 무덤과 같은 겁니다.
마치 구약 교회와 같아요.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하던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끌어 부었습니다.
화 있을찐저 독사 새끼들아 지옥에 가라고 저주하였어요.
이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외식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봅시다.
마 23:1-6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저희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고 지키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입술로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곱 가지 외식신앙을 고발하십니다.
증요한 것은 이들이 참을 말하는 자들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이곳에 있다고 합니다.
이건 음녀가 예수 증인들과 성도들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 교회의 외식 신앙이 성도들을 죽이듯이,
신약 교회의 끝에도 음녀의 땅 신앙이 성도들의 하늘 신앙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들은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우습게 여겨요.
이들은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을 내면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매도하고 있어요.
마치 복음 알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여겨요.
열심과 충성을 율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호도하면서 바리새인들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야고보서는 이러한 자들을 귀신의 믿음을 가진 죽은 자들이라고 하였어요.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죽이고 있어요.
아주 무섭지요.
복음은 생명이에요.
생명은 움직임이에요.
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지 산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께로 난 참 믿음은 행함을 도출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고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어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산 자는 삶으로 생명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많이 맡긴 자에게 많이 찾으신다고 하였어요.
이는 부모가 많이 가르친 놈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아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모르는 자들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어른들이 어린아이들 앞에서 냉수도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 모르는 자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게을리하는 자들을 보고서 “복음 안다고 하는 인간들이 어째 그 모양이냐” 라고 하면 예수님이 욕 들어 먹어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자기 자유를 포기하는 것처럼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순교가 달리 순교가 아니에요.
내 맘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순교인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순교인 것입니다.
복음을 알면 인생이 하나 둘씩 차압당하게 되어 있어요.
성질머리도 차압당하고,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것도 차압당하고,
내 자유도 차압을 당해요.
그래서 고난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이게 없었어요.
음녀에게는 차압당함이 없었어요.
복음을 이용하여서 누릴 것 다 누렸어요.
신앙으로 자기 영광을 챙기고, 유익을 챙기고, 배를 채우는데 이용하였어요.
이건 땅에 속한 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종신토록 흙을 먹고 사는 저주 받은 뱀 새끼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일곱 가지 화(禍)를 살펴봅시다.
마 23:13-32절.“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모두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라고 하지요.
외식이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겉으로 있는 척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속입니까?
사람들 눈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데 사람을 의식하고 살고 있어요.
그러니 성경을 사람들 입맛에 맞도록 풀이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많이 따르거든요.
사람이 많이 따라야 돈이 되구요.
결국 이 놈들의 관심사는 돈이에요.
음녀처럼 세상 영광을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뱀들의 근거지인 지옥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셨어요.
아담이 살아가는 땅이 바로 이 세상이에요.
저주 받은 이 세상이 지옥인 것입니다.
마 23:33-39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잘 보면 위선과 외식으로 가득한 뱀 새끼들이 누구를 죽였다고 합니까?
의인들을 죽였다고 하지요.
이건 음녀와 같아요.
음녀도 누구를 죽였나요?
성도들을 죽였어요.
음녀가 사는 큰 성 바벨론에 성도들과 예수 증인들의 피가 가득하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나 예수님의 재림 때 신약 교회는 영적으로는 똑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도 믿음으로 산 자들이 핍박을 받았고,
신약에도 믿음으로 산 자들이 핍박을 받아요.
그러니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로부터 마지막 순교자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가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바라갸” 라는 말은 “주의 복”이라는 뜻이에요.
이는 “주께로 복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가랴”는 “주께서 기억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억하신 바 된 자들은 모두가 음녀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종말의 교회가 사단의 회가 되겠지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는 음녀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의인들의 무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죽임당한 자들을 데리러 오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약 교회에 보내서 죽임당하게 하셨어요.
종말에도 두 증인들을 신약 교회에 보내서 죽임당하게 하십니다.
의인들이 어디서 죽느냐?
교회에요.
예수님도 구약 교회에게 죽임당하셨어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의인들을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음녀들에게 이단 소리를 듣고 영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음녀에게서 빼내주세요.
예수님이 제림 하시면 음녀와 함께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요.
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늘로 빼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고모라를 멸망하기 전에 롯을 빼내듯이 말이에요.
여리고를 멸망하기 전에 두 정탐꾼을 보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줄을 주어서 라합을 빼내듯이 말이에요.
종말에도 타락한 교회 속에서 두 증인들을 보내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복음을 듣게 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빼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한마디로 정의하시기를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였어요.
외식으로 가득하다고 했어요.
교인 하나를 전도하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하였어요.
성전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면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저주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저주대로 AD 70년에 로마의 장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라는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짐승 같은 자를 보내서 성전을 불태우고 완전히 멸망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건 음녀의 멸망을 예표하고 있어요.
종말의 타락한 교회도 이렇게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성전의 지도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면서 호사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목사들이 돈에 환장을 하여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어요.
예수님이 초림 때 저주한 구약의 마지막 때인 예루살렘 성전이나,
예수님의 재림 때 신약의 마지막 때인 음녀가 되어 버린 타락한 교회나 동일합니다.
영적으로 마귀의 수중에 떨어져서 다 죽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하늘에 물을 먹이지 않고 땅에 물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게 하지 않고 멸망당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씀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요.
하지만 먹을 생수가 없어요.
교회마다 뱀의 말로 뒤덮여 있어요.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처럼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말씀에 기근을 당하여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성경의 증거는 종말은 항상 교회의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흑암이 깊을 때 이 세상에 오세요.
흑암 속에서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세요.
창세기 1장에서도 흑암의 깊음 중에서 빛을 불러내셨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창조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영적으로 동의어에요.
같은 의미에요.
예수님의 초림도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으로 오셨어요.
재림도 동일해요.
영적으로 흑암이 깊을 때 오십니다.
심판이 오기 전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종들을 보내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노아 시대 죄악이 관영 할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서 멸망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미리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초림 때도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종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증인들을 일으켜서 회개를 일으키고 타락한 교회로부터 나오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계 18:2-4절.“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음녀를 일컬어 각종 더러운 영으로 가득한 귀신의 처소라고 하지요.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는 것은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세상 가치관으로 가득차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세상 것에 취하여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상고들도 음녀가 주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어요.
그리하여 치부하여서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어요.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으면 그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할까요.
하나님이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내 백성아 거기에 있지 말고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이 죄에 참예치 말라”고 합니다.
교회가 귀신의 처소라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착잡합니다.
마음이 무겁고 아픕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교회가 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까요?
교회가 왜, 멸망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나요?
이 모두가 거짓 종들이 하늘에 말씀을 땅에 말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천국 복음을 세상 복음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돈에 가치로 복음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잘되는 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인 냥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거짓 종들이 세속적인 가치로 교회를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돈이 왕 노릇하게 만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직분이 돈으로 거래가 된 지가 오래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교회의 주인이 되고 말았어요.
교인들은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어요.
이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돈이 없으면 직분도 얻지 못합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어도 돈만 많으면 장로 권사가 될 수가 있어요.
땅의 임금들처럼 사치하는 목사들에게는 돈 많은 장로와 권사는 자기 금고와 같아요.
교회가 땅에 부요와 사치를 복이라고 가르치는데 어찌 가난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있겠어요.
없어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가난은 죄악이에요.
교회가 작으면 조롱거리에요.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모든 걸 세상 가치인 물량주의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나는 무얼 힘으로 삼고 있나요?
돈인가요?
믿음인가요?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를 자기 배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은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란 뜻입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항상 마귀는 인간에게 다가올 때는 육신의 것을 가지고 달콤하게 다가와요.
이 세상의 것들을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필요한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땅에 속한 자들은 환영을 합니다.
그래서 큰 음녀가 손에 금잔을 들고 사치와 연락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음녀들도 큰 음녀가 주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이 땅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회 밖은 미혹하지 않아요.
마귀의 미혹 대상은 교회 안에 있어요.
교회 밖은 마귀의 수중에 이미 떨어져 있어요.
마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교회 안에 땅에 속한 자들을 세상 것으로 추수를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이 세상 것이 없어요.
모두가 하늘의 것들로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천국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천국의 복음을 들으면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고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빈핍하더라도 하늘에 소망을 품고 살기 때문에 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하늘을 소망하고 몸뚱이는 땅을 지향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관념이에요.
참 신앙은 머리에도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몸도 하늘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늘을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몸은 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몸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므로 온전한 신앙은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서 주를 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창극을 보면 인간들의 위선을 고발해 주고 있어요.
심순애가 몸뚱이는 다이아몬드를 주는 김중배를 쫓아가면서 마음은 이수일을 사랑한다고 하지요?
이건 사기에요.
이런 사랑은 없어요.
몸이 가면 마음도 가고 마음이 가면 몸도 가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천국이 믿어지는 사람은 천국을 위하여 살아가고,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이 땅의 것을 움켜쥐고 살아요.
이들은 땅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은 정직해요.
몸은 그릇이에요.
그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그림이 달라져요.
그 속에 하늘의 것을 담고 있으면 하늘을 향하여 살아가고,
그 속에 땅의 것을 담고 있으면 땅을 향하게 되어 있어요.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졌는지 하나님의 형상이 그려져 있는지는 그의 몸뚱이가 무엇을 그려내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하늘로 지향하는 삶이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로 살지 않고 영적 가치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질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하늘의 영적 가치로 산다는 것은 고난일 수밖에 없어요.
물질은 땀 흘린 것과 비례하여서 주어져요.
물질을 얻으려면 물질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야 해요.
하늘에 속한 신앙은 물질을 얻고자 투자하는 것보다 말씀을 좇아가고자 하는 시간이 많아요.
그러므로 참 신앙은 반드시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늘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고난당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귀신의 믿음은 입술로는 천국을 말하지만 몸은 세상을 쫓아가요.
떡의 가치로 살아가요.
교회에 와서도 마음은 세상에 가 있어요.
말씀을 들어도 떡이 눈앞에 어른거려요.
이를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땅에 속하였어요.
땅 밖에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이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천국을 소망 삼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어요.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이 세상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육을 가지고 영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종들은 하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 세상 것을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구약의 육적인 복을 가지고 신약의 영적인 복을 설명하고 있는데,
땅에 속한 거짓 종들은 신약의 영적 복을 가지고 구약의 복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걸 문자적 설교라고 합니다.
구약은 자녀도 많고 가축도 많아야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육적인 복이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어요.
이게 산상보훈의 팔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팔복은 물질적인 것이 없어요.
모두가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산상보훈의 팔복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의 7복은 “행함”과 같아요.
이것은 팔복을 받은 자들은 7복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한번 비교하여 보세요.
산상수훈의 8가지 복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1)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를 받을 것임이요 (4)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6)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8)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0~12)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이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인하여 핍박 받고,
전부 마음에 관한 것이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오순절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천국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물질적인 복이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는 심령의 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가나안 땅이 신약에서는 심령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요.
실제 천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신앙이 실제적인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에 우리 몸으로 이루어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심령의 복이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7가지 복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3)
2).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 14:13)
3).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4).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 19:9)
5).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계 20:6)
6).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계 22:7)
7).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계 22;14)
요한계시록의 복은 모두가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처럼 목 베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을 두 증인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요한계시록 7복을 보세요.
모두가 실제로 우리가 행하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는 믿음으로 살면 실제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는 관념적 신앙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에요.
실상은 하늘나라에 있어요.
하나님은 애굽에 허상을 쫓아가는 자기 백성들을 모세를 보내서 출애굽을 시켜서 애굽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라인 실상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어요.
모세는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겼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옮겨 주세요.
하늘나라가 우리가 가야 하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레위인들처럼 이 땅의 것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고 하늘나라 기업인 천국복음을 주시고 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인가요?
우상과 싸우는 자들이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겁니다.
마귀는 이스라엘 속에 우상을 자꾸만 심어 놓는 일을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우상성이 자리 잡을 때입니다.
우상성은 이 땅의 것을 쫓아가게 해요.
그러므로 우리도 땅의 것을 쫓아가면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원수는 이 땅의 일을 생각하고 자기 배를 섬기는 자라고 한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적용하면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들이에요.
모두가 예수를 이용해서 이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잖아요.
교회와 교인들이 물질을 추구하는 땅에 가치관으로 엄몰 되었잖아요.
땅에 가치로 살면 음녀에요.
교회 안에 땅에 가치가 자리 잡을 때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왔느냐 안 왔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아요.
왜 교회에 왔느냐가 중요해요.
마귀는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하면서 땅의 것으로 미혹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땅의 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날마다 우리 안에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일을 하세요.
진리에 관해서는 교회 안에 뱀의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왜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까?
참 선지자의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 있고 거짓 선지자는 마귀 편에 서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빼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반대로 마귀는 이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그럼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참 선지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요?
이 땅에 복을 말할까요?
하늘에 복을 말할까요?
하늘에 복을 말하겠지요.
그럼 거짓 선지자는 무슨 일을 할까요?
땅에 복을 말하겠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을 땅에 붙잡아 두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땅에 서 올라온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근본이 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사명을 주었어요.
무슨 사명인가 하면 뱀의 후손들을 땅에 붙잡아 두라는 사명이에요.
반대로 하늘에 속한 자들은 땅에서 뽑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어디서 하는가 하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자들이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각종 더러운 영들을 보내서 귀신의 처소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귀신의 영에 사로잡혔다고 하니까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로 생각하지 마세요.
말도 점잖게 하고,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윤리 도덕적이고,
지극히 온화 하고 자상해요.
외모적으로 풍기는 아우라도 부처님처럼 자애로워요.
바울은 거짓 종들을 광명의 천사라고 했어요.
예수님과 대 제사장과 비교하면 누가 더 인간미가 넘칠 것 같으세요?
예수님일까요?
대 제사장일까요?
대 제사장이에요.
예수님은 싸움꾼처럼 비춰졌어요.
성전에 들어가서 누구도 하지 않는 일들을 했어요.
상을 뒤집어엎고 양을 쫓아내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어요.
마치 드라마에 자주 보는 장면처럼 조폭들이 식당에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예수님도 성전을 다 뒤집어엎어 놓았잖아요.
우리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자비롭고 온화하고 따뜻하다고 믿는 것이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은 몰상식한 불량배와 같았어요.
자기 맘에 안 든다고 다른 사람들 제사 지내는 것을 다 뒤집어엎었어요.
이 모습을 어찌 선량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거기다가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완전히 또라이에요.
그 시대 신앙의 정서가 율법을 열심히 잘 지켜야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쳐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면으로 율법을 우롱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누가 정상으로 보겠어요.
오죽하면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미쳤다고 했겠어요.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는데 누가 좋아라 하겠어요.
바울도 예수님처럼 싸움꾼이에요.
얼마나 독선적인가 하면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상종할 가치를 못 느낄 정도로 자기 아집에 갇혀 있었어요.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는 그렇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제일 상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줄 아세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에요.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는 자에요.
세상은 융통성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우리는 서로 인정하고 받아 주는 사람을 대인배 라고 합니다.
성경을 닫으면 이러한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외고집인 분이 나옵니다.
이름하여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나 이외 신은 없다”고 합니다.
“나 이외 신은 다 가짜”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게 얼마나 받아들일 수 없는 독선적인 말인 줄 아세요.
애굽은 모든 신을 인정했어요.
애굽에는 하나님 말고 수많은 신들이 있었어요.
열 가지 재앙을 일컬어 애굽의 신들을 혼을 냈다고 하지요.
이건 애굽의 신은 열 개라는 뜻이 아니에요.
수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10이라는 말은 충만수에요.
애굽은 세상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어요.
이걸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우주 만물 모두가 신이에요.
그래서 십계명에도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땅 아래 것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은 하늘 위나 땅에나 땅 아래나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만 신이고 나머지는 다 가짜 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어찌 수용하겠습니까?
못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툭 하면 이방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 근성은 못 버려요.
안 버려져요.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시키고 난 후부터 광야 40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나 이외 신은 없으니 하나님만 섬겨라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 틈을 타고 거짓 선지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인간들 편에 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에는 하나님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도 그 신들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과 그의 사상을 동조하는 개신교 안에 자유주의 진보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이외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해요.
그러므로 타 종교도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요.
아니 우리가 인정해도 성경이 아니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예수 이외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성도라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 이외 다른 신도 구원이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겠어요.
못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수용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이 종교 통합을 외치고 있어요.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 통합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든 종교는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 같다고 하면서 종교간 교류를 하고 인류공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종국적으로는 모든 종교가 통합을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교회 안에 들어온 각종 더러운 영들이에요.
이들이 교회를 귀신의 처소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이들의 손 아귀에 장악을 당하였어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같다고 하면서 종교간 대화를 하고 통합을 이루는 운동을 하자고 하는 WCC를 모든 기독교 방송들이 찬성을 하고 있어요.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귀의 세력처럼 매도하고 있어요.
이 시대 기독교 방송들은 돈에 미쳐서 뱀의 말을 하고 있어요.
뱀의 말을 하는 자들의 설교들을 시간 시간마다 쏟아내고 있어요.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다고 하니까 사도 요한이 기이히 여기지요.
이게 지금은 기독교 방송이 마귀의 앞잡이 노릇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목사들이 뱀의 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교회가 어떻게 뱀을 말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고 있나요?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는 하고 있어요.
그래서 기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뭘 그리 기이히 여기느냐고 하지요.
종말이니까 그런 겁니다.
종말이란? 타락을 말해요.
하늘에 말고 땅에 말이 혼합이 되어서 홍수를 이루고 있는 때를 말해요.
홍수가 나면 모든 기식하는 것들이 숨을 못 쉬고 죽어요.
이 시대는 말씀의 홍수 시대에요.
이 모습은 사회현상론으로도 보여주고 있어요.
문화와 예술은 그 시대의 정신을 함유하고 있어요.
그래서 문화와 예술을 보면 그 시대의 영적 상태를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는 그 시대 정신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이 시대 문화를 한마디로 하면 음란 문화에요.
온 세계가 음란 문화로 뒤덮여 있어요.
과거에는 음지에서 행하여지던 성담론들이 이제는 양지로 나왔어요.
TV나 영화 모두가 음란과 폭력과 귀신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요.
이것은 인간들이 음란에 젖어 있고 폭력적이고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반증이에요.
이 시대 좀비들 영화가 난무하지요.
좀비가 뭔가요?
귀신이에요.
사단이 문화와 예술을 장악하여서 인간들로 하여금 귀신을 친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침투해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 안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상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어디가 교회이고 어디가 세상인지 사라졌어요.
목사들은 돈 맛을 알고 돈에 노예가 되었어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성경의 말씀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교회 안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고 말았어요.
이 시대 교회들은 꿩 잡는 게 매라고 돈 많고 교회가 크면 진리의 집단으로 인정을 받아요.
돈이 방송국도 장악하고 있어요.
기독교 방송국이 왜 뱀의 말을 하는 자들의 나팔수가 되었는가 하면 땅에 가치를 추구하는 대형교회들의 돈 줄에 목이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 복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내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종교 방송들을 보세요.
불교 방송이나 기독교 방송이나 카톨릭 방송이나 용어만 다르지 그 지향성은 다 같아요.
내용을 들어 보면 대동소이해요.
그리고 모두 다 ‘이 방송은 신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이 되오니 선교를 위해서 후원을 많이 해 주세요’ 라고 해요.
결국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돈인 겁니다.
후원하면 선교를 하는가요?
안 해요.
생색내기로 쥐꼬리만큼 하고 새로운 건물 사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선교 명목으로 돈 갈취하고서는 비젼센터다 수련원이다 교육관이다 학교다 병원이다 예식장이다 주차장이다 문화센터다 하면서 부동산 늘리는데 경쟁하고 있어요.
교회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주어지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사회사업 하는 것으로 변질이 되었어요.
교회의 모임이 동호회 모임이 되고,
교회가 이익의 수단을 위한 비즈니스 장소가 되었고,
결국 교회가 장사하는 시장 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구원이란?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랬어요.
갈대아 우르가 우상의 도시인 귀신의 처소였어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던 자에요.
아브람 역시 아버지를 따라 우상을 섬겼어요.
우상이란? 인간들이 배를 불려주는 신이에요.
떡을 주는 신이에요.
그래서 떡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이 친근해요.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의미를 말하는 겁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이 창세전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에요.
언약이 우리를 존재케 하였어요.
그런데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나서 언약을 모르고 살았어요.
자기 몸을 신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이게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 속에는 이중적인 것이 담겨 있어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살던 아브람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어요.
반면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가나안으로 빼내심을 입은 아브라함은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신을 섬기는 우상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가나안으로 빼내신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아브람이 살던 동네가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다른 말로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음녀가 사는 곳을 뭐라고 하는가요?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되면 갈대아 우르 라는 바벨론에서 빼내심을 입은 아브람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음녀로부터 빼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음녀가 누구라고 했나요?
타락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왜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나요?
이는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여야 하는데 이 세상 것으로 인간들의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이 땅에 기운으로 살아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어요.
그럼 하늘의 것을 주어야 합니다.
돈에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로 살도록 하여야 해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은 돈에 가치로 살게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세상 가치가 그대로 들어와서 세상의 지위가 그대로 통용이 되어서 세상의 재벌 회장님이 교회 안에서도 회장님으로 대우 받고 있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사(師)” 자가 들어가는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교수, 사장과 같은 사회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믿음과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 주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보면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합니다.
연예인에서부터 기업인과 정치인으로 두루 망라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 부분이 교회 직분자들이에요.
목사도 자살을 하고 있어요.
예전에 S 리스트 라는 것을 남겨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K 기업의 S 회장도 감리교회의 장로였어요.
엊그제 예전에 시장이 되어서 시(市)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던 분이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지고 난 후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신 분도 교회의 장로였어요.
며칠 전에 롯데 그룹의 2 인자라고 하는 이00 부회장도 교회의 장로에요.
신문 기사의 유서를 보면 영육 간에 피폐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교회의 장로님이 왜 영육 간에 피폐합니까?
이는 하나님 말씀의 가치로 살지 않고 떡의 가치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떡에 가치로 사니까 떡에 문제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위하여 죽지 않고 돈을 위하여 죽습니까?
무엇이 그리 지킬 것이 많아서 자살을 합니까?
결국 그 속에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최후의 자기방어 수단이에요.
자신이 중시여기던 가치가 무너지면 죽음으로서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의 가치로 살던 사람이 사업이 망하면 자살을 하고,
윤리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사람이 그 가치가 무너지면 견디지 못해요.
청렴결백을 자신의 명예라고 여기던 사람이 그 가치가 무너지면 목숨을 끊음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뭣이 그리 중 헌디!
뭣이 그리 중 허길래!
그 꼴랑 죄인의 명예와 자존심이 무엇이길래!
교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끊는단 말입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성도는 자살할 수가 없어요.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면 자살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맘대로 행사할 수가 없어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아요.
성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세요.
성도는 사는 것도 자기 뜻대로 안 되고 죽는 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어요.
성도는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명예에 손상이 가는 일을 당하여도 자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킬 명예도 지킬 자존심도 없어요.
지켜야 하는 것은 오직 복음이에요.
복음을 위하여 죽임을 당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어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예수 때문에 이 땅에서 죽임당한 자들이 천국에서 영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온산에 어린 양과 더불어 서 있는 144000명은 모두가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에요.
이는 짐승에게 경배치 않고 믿음에 정절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아니고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명예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자살 한 자들이 아니에요.
모두가 복음 때문에 타자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들이에요.
그래서 최초의 성도를 상징하는 아벨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성도를 상징하는 사가랴의 죽음을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처럼 땅의 짐승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은 갈 수가 없어요.
천국 자체가 지옥을 반대하고 있어요.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지옥으로 살던 성도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사망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천국은 이 땅에서 복음 때문에 아픔을 당하고 애통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6장을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우리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잖아요.
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합니까?
이는 그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살한 사람이 거기에 있다고 하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고자 자살한 사람은 원수가 없어요.
가룟 유다는 누가 죽이지 않았어요.
괜히 자기가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지킨다고 목매달아 죽은 겁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악인들이 행하는 자기 의 지키기인 것입니다.
이 시대 자살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도의 생명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을 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자살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하는 소리에요.
성도는 언약으로 낳아지고,
언약을 위하여 살다가,
언약 때문에 죽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세요.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용치 못하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 때문에 순교는 할 수가 있어도 떡을 위하여 자살할 수는 없어요.
자기 명예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끊지를 못해요.
성도는 죄를 지어도 베드로처럼 수욕을 감당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가룟 유다처럼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요.
자살이란? 자기 의(義) 챙기기에요.
세상적인 의로 살았기 때문에 세상적 의가 붕괴가 되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 의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의가 없으니까 죽음으로 자기 의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살로서 난 잘못이 없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수모를 당해도 사는 것입니다.
죽을 만큼 어려워도 사는 것이에요.
욕을 먹고, 음해를 당하고, 조롱과 모욕을 당해도, 모든 판단은 주께 맡기고, 주께서 다 아시겠지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수욕을 당하면서 사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어려워요.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의 사도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욕인줄 아세요.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겠어요.
그러나 그 수군거림을 이기고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바울도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에요.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에요.
그런 그가 예수를 전하는 사도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것입니까?
죽고 싶을 거예요.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았어요.
왜냐하면 그 속에 예수님이 수욕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다윗 왕도 보세요.
충신의 아내를 빼앗고 급기야 충신을 전쟁터에 보내서 죽게 하였어요.
완전 범죄를 획책하다가 온 나라에 들통이 났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왕의 직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요.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았어요.
신하들이 뭐라고 수군거렸겠어요.
얼마나 조롱하고 비웃었겠어요.
만고에 충신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은 악한 왕이라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았겠어요.
그럼에도 자살하지 않았어요.
평생 죄인의 멍에를 지고 살았어요.
살면서,,
맞습니다.
난 살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뻔뻔히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심 때문입니다.
이런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입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살았어요.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의 후궁들을 백주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겁간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살았어요.
오빠가 여동생을 강간하고,
형제들끼리 싸우고,
도무지 왕의 가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음에도 살았어요.
거지가 돌을 던지면서 “당신이 왕이냐” 라고 조롱하였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믿고 수욕을 감내하면서 살았어요.
이게 신앙이에요.
쪽 팔려도 수욕을 무릅쓰고 사는 게 신앙이에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삐까번쩍하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금수저 물고 사는 게 아니에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용서하심이 너무도 커서 내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내 자존심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러니 그 어떤 경우에도 자살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끝까지 사세요.
자살은 악이에요.
그건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에요.
수치스럽더라도 살고,
아프더라도 살고,
사업이 망해도 살고,
힘들더라도 사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고 사세요.
신앙으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하지 마세요.
신앙은 말 할 수 없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음을 증거하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윤리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거지발싸개 같이 냄새나는 인간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받았음에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싸움이에요.
우리 안에 세상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피흘리기까지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지 못하게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잣대로 살게 하여야 합니다.
돈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이 땅에 소망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 삼고 살게 하여야 해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는 세속적 가치로 엄몰 되었어요.
목사들이 하늘의 것을 주지 않고 땅의 것을 주고 있어요.
교인들로 하여금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기복주의 신비주의 신앙으로 세속화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예수가 없고 귀신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니 땅의 가치에 흠이 나면 목사가 자살을 하고, 장로가 자살을 하고, 집사가 자살을 하고, 신자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자는 떡에 사라지면 자살을 해요.
세상의 가치로 사는 자는 세상 가치가 상실이 되면 자살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지가의 언약의 가치로 사는 성도는 떡이 사라져도 세상의 명예와 힘이 사라져도 자살하지 않아요.
성도가 죽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지키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일컬어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빼내심을 입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종말에는 타락한 교회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녀로부터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고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의 죄가 뭔가요?
사치하고 연락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왕 노릇하였다고 합니다.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합니다.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은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고 합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면 뭣합니까?
그 속에 믿음이 없는데,,,
음녀처럼 세상 가치로 사는 사람 속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고 말씀도 없고 예수도 없어요.
무늬만 성도에요.
겉은 번드르르 하지만 속은 세상의 배설물로 가득해 악취를 풍기는데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탐욕으로 인한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교회 건물은 수천억을 들여서 예루살렘 성전처럼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지만 그 속에는 돈에 미친 강도들이 우굴거리고 죽은 송장들만 가득한 겁니다.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에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 구약 교회가 온갖 강도들이 우굴거리는 귀신의 처소였어요.
제사장들이 성전을 장터로 만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이 시대 교회 역시 구약 교회와 똑같아요.
교회가 비리의 온상이 되고 말았어요.
부패의 집단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기 전에 내 백성들아 거기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외침으로 말씀을 갈음합시다.
벧전 4:7절.“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부디 이 말씀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대를 보는 눈을 열어 주시고, 만물이 소리치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믿어지도록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농담으로 듣지 말게 하시고 깨어서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옵소서. 복음이 지식으로 남게 하지 마시고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지 말고 실제화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속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 설렘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삶이 잔잔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쉽게 성내지 않고 쉽게 흥분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고요했으면 좋겠고,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표 내지 않고 혼자 간직하다 이내 평온해지는
그러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 많은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