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측의 진리변증-삼위일체와 페리코레시스
삼위일체론(Trinity, Triune God)은 셋의 방면과 하나의 방면이 있습니다(마28:19). 그런데 교회역사상 삼위의 셋의 방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삼신론’이 되거나, 하나의 방면을 너무 고집함으로 ‘양태론’으로 빗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세 위격의 구별을 분명히 하면서도 한분 하나님이심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로 요한복음 10:38, 14:9,11, 17:21 등의 말씀에 근거한 삼위의 ‘상호 내재’를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ϛ) 개념이 정통 신학자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이뤄 왔습니다.
아래 내용은 고신대학원 유해무 교수의 개혁교의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164-165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삼위일체론 신학에 공재(共在)( περιχώρησιϛ)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요한 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하여 이를 말한다. 물론 이 용어와는 관계없이 이 사상 자체는 이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 고대 교부들에게도 발견된다. 기독론에서 Maximus the Confessor(580-662)가 양성연합에서 오는 사역의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이 용어를 최초로 썼다. 신론에서는 Pseudo-Cyril이 최초로 썼고, 이를 다메섹 요한이 계승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침투를 표현한다. “삼위하나님은 상호 안에서 서로 뒤 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고 있다.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칼빈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요,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그 분을 삼위로 아는 것이다(I, xiii, 2). (중략) 이런 식으로 그는 각 위에서 전 신성을 이해한다. 요한복음 14:10을 인용하면서 그는(칼빈) 성부는 전적 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다메섹 요한 式의 공재를 말한다.”
이러한 삼위의 상호내재(περιχώρησιϛ)개념에 따르면, 세 위격이 구별됨을 유지 하되 각각의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합니다. 즉 성육신하신 분은 아들 하나님(갈4:4)이시나, 그 아들 하나님 안에 다른 두 위격인 성부와 성령께서도 공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신 분을 성령(또는 성자)이시지만, 그 위격만이 아니라 다른 두 위격도 그 안에 공재하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삼위의 상호내재 개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인한다면,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6)라는 성경본문을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성부만 참 하나님이다 라는 식으로 '잘못'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교계 내에는 정통 교부들이 가르쳤던 이러한 삼위의 상호내재 개념이 충분히 소개되지 못함으로, '아들(2격)만' 성육신하셨다거나 '성령(3격)만'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세 위격 모두가 우리 안에 계심을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요8:29, 14:11, 롬8:9-11, 고후13:5, 요일4:15)과 큰 차이가 있고 엄격하게 말한다면 삼신론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