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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자치연대가 전략적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생활정치의 민주적인 구현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취약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없고, MB정부의 민간독재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이번 선거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진보개혁과 낡은 질서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보수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상철 - 김창호 처장께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계신 화두가 '하방론(下方論)'인데, 그것이 갖는 전략적 의미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결단이 더 중요해 보이는데요..
김창호 - 우리는 두 분 대통령을 잃고 이명박 정부에 의해 민주주의가 과거 독재시절로 초고속으로 역주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이죠. 민주주의가 이토록 빠르게 무너져 내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마당에 우리 민주․개혁․진보진영의 정치지도자와 민주정부 고위직들은 지역정치, 그 중에서도 기초에 출마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자치와 분권을 통한 민주주의 확대로 민주세력의 거점을 확보해 비민주적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자치정부 연대를 형성한 후 이명박 정권을 심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의 목줄을 죄어 오는 작금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특히 민주정부 10년간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은 두 분 대통령을 지켜드리지 못한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심각하게 해야 합니다.
신상철 - 네, 그렇군요. 시민주권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나요?
김창호 - 그렇습니다. 시민의 생활상의 권리와 요구를 진보정치와 결합하자는 것이고 그 공간이 바로 지역정치라는 겁니다.
김창호 - 노무현 대통령께선 ‘진보의 미래'에 쓰신 것처럼 진보를 '더불어 사는 사회, 혹은 그것을 지향하는 가치'로 요약했습니다. 대통령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화두를 던졌어요. 바로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그것입니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스스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지점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논의를 하려다가 그만...
노 대통령님과 하방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제 설명을 들으시고 '쉽지 않은 일이다, 잘 되면 나도 김해 시의원 나가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인데,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시고 계신만큼 많이 동참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상철 - 결국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 발목이 잡힌 셈인데요.(웃음) 성과가 있습니까?
김창호 -성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정작 주요 정치인들과 정치부 기자들은 별 호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희정 최고가 중앙정치에서의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충남 출마로 경로를 바꾸었고, 여러 장·차관급들이 기초 출마를 준비하는 것은 성과라고 볼 수 있겠죠.
신상철 - 경북 울진 태생이시죠?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그렇지만, 참여정부에 입지전적인 분들이 적지 않은데 김창호 처장께서도 그런 분 중 한 분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야간 고등학교를 나와서 서울대를 들어가신 걸로 들었거든요..
김창호 - 제 아버님이 교편을 잡고 계셨기 때문에 울진에서도 이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는데, 시골서 공부해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를 진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차 시험을 볼 수 있는 가정 형편이 못돼 3차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학교에서 공부 좀 하는 몇 명을 배려해 주간으로 옮겼고, 재수를 해서 서울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신상철 - 김 처장 께서는 80년대 이후 이론가로 꽤나 유명하셨다고 하는데요. 대학시절은 어떠셨는지요? 친형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고 하던데...
김창호 - 이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형님에 대해서는 경외심을 갖고 있습니다.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낮에 엿장사로 학비를 벌어 서울대 상대에 들어갔죠. 학창시절 형님 친구분들이 집에 와서 형님과 함께 토론하는 것을 저는 어깨 너머로 구경하곤 했는데요,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조성준 전 국회의원, 김문수 경기도지사, 김대환 전 노동부장관 등이 당시 멤버였습니다. 벌써 40여년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어린 저에게는 새로운 개념과 가치를 일깨워준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신상철 - 아.. 그렇군요. 김상곤 교육감이 형님과 친구셨군요. 조성준 의원, 김대환 장관 그분들도.. 그런데 김문수 씨에 대해서는 조금..(웃음) 일단 넘어가죠. 그럼 김창호 처장이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미 예견된 것이라 봐야겠군요.
김창호 - 대학에 입학한 후 반 대표를 선출하는데, 그것도 권력이라고..(웃음).. 출신학교끼리, 심지어 유명 입시학원 출신들끼리 야합(?)을 하더군요. 뒷자리에 있다가, '자식들.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마디 했더니.. 그랬더니 저더러 소개를 하라그래요. 그래서 '나는 3류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1류 나온 사람들에 대해 정말 실망했다'등등의 발언을 했죠. 그랬더니 지금은 교수인 친구가 저를 추천해 투표 결과 반 대표가 되었는데.. 그 후 학생운동은 자연스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상철 - 네, 그러다가 강제 징집을 받아 군대를 갔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요?
김창호 - 당시 강제 징집을 당한 게 저뿐만이 아니죠. 학생운동을 했던 많은 친구들이 구속과 강제징집을 놓고 선택을 강요받았고, 저는 그때 강제 징집을 선택한 거죠. 군대에 있을 때 전두환 신군부가 조작한 '무림사건'이라는 게 있어요. 후배들이 잡혀가면 대개 선배들을 거론하며 둘러대는 분위기있잖습니까.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몇 개월 동안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처음 죽음의 공포를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소름 끼치는 것은 고문 하던 수사관들이 고문하다가 쉬는 중에 부인과 자식들에게 매우 다정하게 전화를 거는 거예요. 김근태 의원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악마와 천사가 한 인격체 속에 공존한다고 할까... 그런 사실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무사히 부대로 복귀해 33개월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복학하고, 진보적 학술운동을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신상철 - 대학원 졸업 후 중앙일보에 ‘학술전문기자’로 입사하셨죠? 기자로서 꽤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으셨는데...
김창호 - 박사학위를 받고도 먹고 살 방법이 없더군요. 요새도 강사들이 보따리 강사를 하잖아요? 아마 보따리 강사 원조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4~5개 대학의 시간강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어요. 결혼 후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무거웠죠. 우연히 선배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중앙일보가 섹션화하면서 전문기자를 채용한다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이력서 쓰고 시험을 봤는데 합격해서 11년간 학술전문기자를 했습니다.
언론사에서 통상 학술분야는 정치․사회 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했어요. 학술기자로서 기여가 있다면, 지식사회에서 생산한 컨텐츠를 신문의 중심으로 끌고 왔다는 점입니다. 중앙일보에서 지식과 현실정치가 어떻게 결합되고 보수의 논리가 무엇이고, 진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 현장에서 경험했던 것은 저에게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신상철 - 중앙일보 계시다가 명지대로부터 대학교수직 제안을 받고 명지대로 가셨는데.. 대학 근무 딱 3주만에 그러니까 결재서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국정홍보처장으로 발탁되셨거든요. 참여정부와는 어떤 인연이 계셨는지..
김창호 -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만, 그 전에 저는 대통령님과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대통령께서 저를 국정홍보처장에 낙점한 계기는 제가 ‘지식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메일링을 일주일에 한 편씩 천 여명의 지식인들에게 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하셨다고 후에 전해 들었습니다.
신상철 - 이메일링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데요?
김창호 - 당시 강정구 교수와 송두율 교수 등 진보적 교수에 대한 언론의 이념적 공격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제가 기명 칼럼을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외국의 저명 칼럼니스트들이 칼럼 후기나 지면에 싣지 못한 얘기를 소수의 독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전해주는 것을 흉내 낸 것이죠. 지식사회의 현황과 동향도 소개해주고,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의 의견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신상철 - 일종의 싱크탱크였겠습니다.
김창호 - 형식은 메일링이지만 일종의 네트워크였던 셈이죠. ‘어떤 의제를 취재하려고 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자료나 데이터 등을 보내주는 등 취재의 수단이자 동시에 제 글을 읽어주는 독자이기도 했습니다.
신상철 - 김창호 처장께서 제안을 받았던 시기가 참여정부로서는 매우 위기감이 팽배했을 때라 기억합니다. 그때가 2005년 3월이었죠? 당시 불편한 언론관계를 풀어가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노 대통령께서는 홍보 지휘관으로 생면부지의 김창호 처장을 선택하신 거거든요..
김창호 - 명지대에 학과장으로 부임한지 2주 만에 제안을 받고 그 담주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학교나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많이 망설였었죠. 하지만 제 생각과 상관없이 일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상황에 끌려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됐습니다. 말씀대로 당시 대통령께서 야심차게 추진했던 행정수도는 관습헌법 판결로 물 건너가고, 한겨울의 4대 개혁입법 무산 뉴스가 나오고.. 그러던 와중이었으니까요.
김창호 - 대통령께서 당혹해 하셨을지 모르겠는데, 저로서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제 주관적 각오를 말씀드렸던 셈이었습니다.
신상철 - 그러면, 어영부영하지 않겠다는 김 처장의 홍보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김창호 - MB정부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홍보는 '분칠(분식)'이나 '마사지'가 아닙니다. 홍보는 기본적으로 의제를 경쟁하는 것이고 정보를 투명하게 소통시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의제를 만들고 상대가 생산한 의제에 대해 대응하고... 이러는 과정에서 사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나아가 정보가 투명하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이 압도적 의제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정파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 왜곡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의제를 따르면 정부는 정당성의 위기를 겪게 되고, 대립하면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됩니다. 참여정부는 후자였던 셈이죠.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의 프레임을 극복하기 위해 의제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치열한 의제경쟁 속에서 상대적 역량의 한계와 열악한 언론환경 속에서 국정홍보를 해야했던 셈입니다. 보수언론에 종속된 정부가 아니라 당당히 경쟁하는 정부가 되기 위해 우리는 '건전한 긴장관계'로 가자고 했고, 이것은 비록 참여정부에 고통을 안겨줬지만 우리 사회에 엄청난 성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신상철 - '열악한 언론환경'은 알겠는데, '상대적 역량의 한계'는 글쎄요.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 그들도 언론탄압을 한다고 난리를 쳤거든요..
김창호 - (하하하...) MB정부가 하고 있는 것이 언론탄압입니다. 기자를 인사조치하고 해고하고 또 고발하고... 보수언론이 의제경쟁을 자신의 이익이 침해된다고 생각해 언론탄압이라 주장했지만, 언론과의 논쟁마저도 탄압이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특권입니다. 언론에 대한 비판마저도 금기시하는 특권을 누가 부여했단 말입니까?
신상철 - 네, 참여정부 시절의 언론과 홍보, 그 주제만으로 밤새 얘기해도 모자랄 텐데요, 자, 6.2 지방선거를 앞 둔 마당이니 주제를 다시 돌아가 보죠. 성남은 어떤 곳입니까?
김창호 -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면 성남은 한국판 계획도시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청계천 등지에서 살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만든 도시가 성남입니다. 그리고 90년대 초 서울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가 분당(성남시 분당구)입니다. 계획도시의 형성 목적에 따라 성격이 판이한 두 도시가 결합되어 있지만, 독자적 발전전략을 갖지 못하고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는 보완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년 동안 제가 살고 있는 곳이지요.
신상철 - 그럼 소프트웨어의 측면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김창호 - 70년대 당시 교통이 단절되고 일할 곳이 없는 성남은 '광주대단지사건'을 겪게 됩니다. 저의 형님이 만든 실태조사 보고서로 당시의 처참한 실상을 알게 되었는데요,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함께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등 뿌리 깊은 민주주의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아울러 분당은 타 지역에 비해 지식인들이 많고 학력이 높은 편입니다. 전문가그룹이 두텁죠. 즉 민주주의 전통과 풍부한 전문가그룹의 존재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김창호 - 광주대단지사건(클릭)은, 근래의 유사사례를 들자면 '용산참사'의 대규모 확대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계적 계획도시’니 ‘일자리 걱정 없는 신천지’니 하면서 아무런 예고 없이 청계천 등지의 판잣집을 대대적으로 철거하고, 주민들을 쓰레기차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죠. 성남은 서울로 가는 버스조차 없었고, 집이나 상하수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수년간 지속되고 불만이 누적되자 생존권투쟁으로 나타난 것이 광주대단지사건입니다.
신상철 - 네, 그렇군요. 그러면 서민층의 오랜 애환이 저변에 깔린 성남시 구도심지역과 신도시개발로 형성된 분당지역이 어우러진 도시가 성남인 셈인데, 그동안 인근 광주, 하남 등과의 통합이 추진되었잖습니까? 광주와 하남은 작년에 이미 시의회를 통과한 상황에서 최근 성남시의회에서는 날치기 통과돼 지금 국회에서 법안을 논의중인 것을 알고 있는데요..?
김창호 - 성남시의회에서 날치기 통과됐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가처분 소송이 진행되고 있어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회에서는 야당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구요.
신상철 - 이명박 정부가 왜 통합하려 하는 걸까요?
김창호 - MB정부는 도시 규모를 키워 뉴타운 식의 새로운 개발 수요를 창출하려는 것 같습니다. 뉴타운에 이어 4대강, 이어서 전국적으로 통합시 개발수요를 창출해 선거에서 이기려 하는 것이지요.
신상철 - 개발수요 창출.. 건설족다운 발상인데요, 한편으로 행정구역 개편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 아닙니까?
김창호 -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행정구역 개편 논의는 꾸준히 있어 왔고, 참여정부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시·도 폐지 및 광역시로의 개편에 합의를 봤습니다만, 그 때와는 다릅니다. 지난해 2월에 ‘한겨레21’에 행정구역개편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장기집권 시나리오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중앙권력을 장악했으니 지방정권을 장악해야 차기 정권도 의도대로 갈 수 있다는 시나리오인 거죠. 풀뿌리 민주주의의 장이어야 할 지방자치제를 장기집권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겁니다. MB정부는 오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을 공사판 철거하듯이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래의 취지와 거리가 먼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 그걸 우려하는 것이지요.
신상철 - 작년 하반기에 성남시 호화청사 논란이 있었죠. 3,222억원을 쏟아 부어 호화청사를 지어서 지역민 뿐 아니라 전국적인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 한나라당 이대엽 시장이죠? 이번 3선 도전 할까요?
신상철 - 끝으로 지역주민께 그리고 개혁 네티즌께 주시고 싶으신 말씀은?
김창호 -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지역의 민주적 자치세력의 연대를 통해 MB의 민간독재에 맞서야 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의 동력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 국회의원, 대통령 중심의 관점에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참여와 투표율이 높았을 때 민주개혁 세력이 승리한 반면 투표율이 낮을 때 패배했습니다. 故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하셨습니다. 투표하지 않는 양심은 수구보수의 편입니다.
김창호 전 처장은 그의 경력이 보여주듯 이론과 철학이 있는 사람이다. 참여정부 어느 분이 그를 두고 '컨텐츠를 제대로 가진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준 그와의 인터뷰는 참으포 유쾌했다.
이론가, 저널리스트, 행정가를 거친 그가 선출직 정치인에 나서려는 이유가 단순히 정치적 자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MB정부라는 민간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적 지역자치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는 그의 바램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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