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시(軟柿)
박용래
여름 한낮
비름 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시집 『강아지풀』, 1975)
[작품해설]
박용래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향토적 정서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는 아무리 작은 자연 현상조차도 예사로이 지나치지 않는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언어의 군더더기를 일체 생력한 간결한 함축미를 표현하는 그는 1970년대 가장 중요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이 시는 한여름의 땡볕에 붉어지고 가을 서리에 익어서 눈 오는 겨울 어느 날 밤 제상(祭床)에 오른 감[軟柿]을 노래하고 있다 단 2개의 문장을 14연으로 배열하여 전체적으로 언어의 절제와 표현의 간결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시각적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여 한 폭의 생동하는 소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구성은 상당히 치밀하고 적잖은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격을 보면 1~2음보로 한 연을 형성하고 있지만,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 11연의 경우 의미상 10연에 연속되는데 음절수가 10연에 비해 반으로 줄어 휴지(休止)가 길게 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의미 단락상 1⸱2⸱3/4⸱5⸱6// 7⸱8⸱9/10⸱11/12⸱13⸱14연으로 구분됨으로써 10연과 11연의 위치가 전체 시상 전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또한 감이 여름에 익고 가을에 서리를 맞고 있다가 겨울에 제사상에 오르는 시간적 추이 과정에 입각한 시상 전개에 맞춰 공간적 배경의 대조를 보여 준다. 즉 전반부에서는 ‘비름 잎에 꽂힌 땡볕이’ ‘돌담 위 연시’로 익었다고 하여 ‘꽂힌’의 하강과 ‘위’라는 상승의 대조를 드로내며, 후반부에서도 ‘깊은 잠’의 하강과 ‘깨어나’ ⸱ ‘빛나다’의 상승의 대조를 이룬다. 한편 전반부의 주어는 ‘땡볕’이고 후반부의 생략된 주어는 ‘감’, 서술어는 ‘빛나다’로 되어 있어 전반부와 주어인 ‘땡볕’에 연결됨으러써 내용이나 형식이 고도의 치밀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소개]
박용래(朴龍來)
1925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강경상업학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 「황토(黃土)길」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 수상
1969년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 수상
1980년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0년 사망
시집 :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궁』(1980), 『먼 바다』(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