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첫 공소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462
병인박해 이전의 형성된 성소의 못자리요 순교자의 탄생지 교우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는 해주 오씨(海州吳氏) 집성촌으로 입향조 오희문을 비롯하여 후손들의 산소가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오산이라 함은 오씨 문중의 산이라는 뜻으로 오산수·오산수골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해주 오씨의 본향으로 해주 오씨 묘역과 시조단이 있다. 천주교 공원묘원이 있으며,
사기막에는 천주교 공소와 교우촌이 있었는데 박해 시절에 형성된 곳이다.
오산소 공소의 행정 구역상 이름은 오산리 사기막(砂器幕)으로 이곳에는 윗사기막(윗골)•사기막•아래 사기막 등 세 마을이 있었다.
그중 공소의 중심지는 사기막이었는데, 가장 큰 마을인 아래 사기막은 법화산(385m)의 가파른 계곡을 뒤로 하고 있어
‘낭떠러지’라고도 불리었다.(Le Gac 신부 보고서, 1910년).
이 사기막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91년 무렵이었다.
1986년 이곳 공소가 폐지되기 전까지 제16대 공소 회장을 맡았던 유호종(劉浩鐘 알비노, 1937년생, 유재덕 회장의 차남,
현 신갈 거주, 2015년 9월 18일 홈지기와 면담)씨에 의하면, 이곳 교우촌을 처음에 이룩한 신자 집안은
유(劉)씨네(본관 강릉) • 유(柳)씨네(柳秀徹 신부 집안) • 曺씨네(본관 창령) 등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박해 말기 충청도 청양(靑陽)과 옥천(沃川) 고향을 떠나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갓등이[旺林]에서 일시 생활하다가
사기막에 정착한 것이었다.
그중 유(劉)씨네는 성인 유대철(베드로) 집안이었다고 하는데, 구전에 의한 것이어서 정확한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사기막 교우촌의 신자들은 이곳에 정착한 이후 화전 등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신앙생활만은 매우 열성적이었음이 기록에 엿보인다.
신자들의 정착 5년만인 1896년에 이미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姜道永,마르코)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된 것도
그러한 열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때의 정식 명칭이 바로 ‘오산소 공소’였다. 한편 이곳 신자들은 1910년 4월에 이르러 처음으로 공소 강당을
마련하게 되는데, 이때 이곳을 축성한 하우현 본당의 르각(Le Gac,郭元良) 신부는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뮈텔 주교에게 전하고 있다.
“마침내 저의 거처(하우현)에서 남으로 50리 되는 곳 오산소(용인)에서 강당 짓는 것을 마쳤습니다.
이 집은 신자 수에 알맞게 지어졌습니다.
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두세 마을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이 집에서 일련의 장기적 교육도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항상 같은 지역에 있게 될 것이고 여러 마을의 교우들도 이곳에 쉽게 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 강당에는 아주 보잘 것 없지만 신자들이 제게 마련해준 작은 방 하나가 있는 데,
이것은 앞으로 있을 정기적인 오산소 공소 방문시에 편리할 것입니다.”
유호종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공소(오산리 462번지)는 초가 공소였는데, 1920년의 대홍수로 유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그해 7월25일에는 사기막 429번지에 초가 10간의 공소 건물을 다시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 12월 30일에는 용인 본당의 김효신(金考信, 마티아) 신부와 오스트리아 후윈회의 지원에 힘입어
그 자리에 양옥 강당(32평)을 준공하고 다음 해 1월 7일 당시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주교를 맞이하여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오산소 공소가 이 일대 교우촌 신자들의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미 1898년경 부터였다.
〈교세 통계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자료를 볼 때도 이곳 신자수가 1896년에 20명, 1897년에 36명이었던 것이
1898년에는 갑자기 125명으로 증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빈양이 • 조당골 • 소리 등
이웃 교우촌 신자들이 이곳에서 공소를 치루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는 오산소와 사기막(아래 사기막)에서 두 번의 공소를 치루게 되었다.
이곳에 모이는 신자수가 많아진 반면에 이들을 수용할 강당이 아직 마련되어있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때(1900년, 1901년) 그는 이웃의 소리에서도 공소를 치룬 적이 있었는데 당시 신자 수는 28명이었다.
그후 1909년에 이르러 오산소 공소는 하우현 본당에 있던 르각 신부의 방문을 받게 되었으며,다음 해에 이르러는
첫 공소 강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강당이 마련됨으로써 오산소 공소는 크게 번창한 것으로 나타난다.
1909년에만 해도 오산소(사기막 58명)와 낭떠러지 공소(118명)를 합쳐 176명이었던 신자수가 1910년에는 348명으로 증가하였고,
새로 마련된 강당 한 곳에 이들을 모두 수용하게 된 것이다. 홋날의 증언에 따르면 ‘‘이웃 마을의 신자들이 모두 이곳에 와서
숙식을 하며 미사에 참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모이던 신자들은 1920년대 이후 점차 줄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웃 공소에서 강당을 마련하게 되었고,
일제 치하에서 생계 수단인 화전 • 담배 농사에 대한 여러 제약이 있게 됨에 따라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한 때문인 듯하다.
오산소 공소가 이렇게 그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과 함께 공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여러 회장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 집안에서 많은 성직자들이 배출되어,작은 교우촌으로 시작된 오산소 공소는 드물게 보이는 성소의 못자리가 될 수 있었다.
우선 이곳 출신 성직자들을 살펴보면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김경민(金景旻,루도비코) 신부,
유수철(柳秀徹 도미니코〉신부, 양병묵(楊炳默 루가) 신부 등 4명이 있는데,오산소 공소와 관련이 있는 신부들은
이밖에도 여러 명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생존해 있지 않다.
유수철 신부는 1977년에 지병으로 사망했고, 양병묵 신부(수원교구 부교구장)는 2014년 5월 20일 선종하고,
유재옥 신부와 김경민 신부는 6 25때 순교 하거나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오산소 공소는 1986년 골프장 88컨트리클럽 기공으로 매몰되고 신자들도 모두 그곳을 떠나 이제는 사기막과 아래사기막에는 전원주택들이 들어섰고,
윗사기막과 공소터는 88컨트리클럽내에 위치하여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순교자
◆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1898∼1950.10. 5) 신부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유재옥 신부는 오산소 공소 유호종 16대 회장의 백부로 1898년 1월 19일 수원 갓등이에서 유장열(劉章烈, 요한:제4대 공소 회장)과
柳 바울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용인의 오산소에서 보냈다.
남달리 신심이 깊었던 그의 부친 유 요한은 아들 4형제 중 한 명만이라도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는데,
그중에서 유 신부가 부친의 뜻을 받들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후 1925년 6월 6일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 유 신부는 개성 본당의 보좌신부, 양양 본당의 주임신부(1927년 6월)를 역임하고,
1939년 7월 20일에는 황해도 송림(松林)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곳에 부임한 이후 그는 성당 건축과 교세 확대에 힘쓰면서 성소 계발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황해도 천주교회사, pp539∼543).
그러나 이 본당이 그에게는 마지막 본당이 되고 말았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던 날, 유재옥 신부는 겸이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유는 평양교구의 메리놀 외방선교회 미국인 신부들과 연락해서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겸이포 제철소의 기밀을 탐지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유 신부는 이듬해 4월 18일 138일 만에 무죄 석방되었다. 8.15광복 후 북한 당국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더니,
1950년 6월 24일, 유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납치, 수감되었다가 1주일 후 해주(海州)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 해 10월 4일 유 신부는 수감자들과 함께 동해주 해변으로 끌려가 자신들이 생매장 당할 구덩이를 팠고,
이튿날 새벽에 그 구덩이에 생매장되어 순교하였다.
유재옥 신부가 신학생일 때 다니던 공소가 바로 1910년에 설립한 첫 공소 강당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부지를 구입하여
어떤 표지를 하는 것이 비록 이곳을 떠났지만 오산소 공소 교우들의 바램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산13-12에 있는 유씨 가족묘에는 유재옥 신부의 가묘가 설치하여 유 신부의 순교를 기억하고 있다.
◆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신부
유재옥 신부와 마찬가지로 김경민 신부도 6월 24일 공산당원에게 피랍되었다. 용문 성당 제6대 주임과 1943년
황해도 재령 본당 6대 주임을 역임한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신부는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황해도 안악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새벽에 김 신부는 안악 정치보위부에 의해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해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유엔군 북진으로 북괴당국이 후퇴할 때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오산소 공소는 한편으로 성소의 못자리요, 다른 한편으로는 순교자의 탄생지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오늘날에는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지만,이곳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 이곳은 영원한 복음의 남은 자리가 된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