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진리
요18:28-38
공부의 신 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폐교 위기에 처한 삼류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깡패 같은 학생들도 많아 주민들은 학교 이전을 요구하는 상태였고,
신입생도 줄어들어 학교재정이 악화되자 이사장은 학교를 재벌 기업에 팔아넘길 생각을 합니다.
이때 정의의 사도 같은 변호사가 나타나 실력이 형편없는 아이들 다섯 명을
일류 대학인 ‘천하대’에 보내겠으니 1년 동안만 학교를 팔지 말아달라고
이사장에게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냅니다.
이때부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혹독하게 공부를 시킵니다.
공부, 잘 하면 좋겠죠. 그런데 공부의 네 기둥을 아시는지요.
한자어로 ‘학문사변(學問思辨)’이 그것이라고 합니다.
‘학’은 ‘박학(博學)’
문’은 ‘심문(審問)’
사’는 ‘신사(慎思)’
변’은 ‘명변(明辯)’을 뜻합니다.
공부와 비슷한 말이지만 좀 더 전문적인 뉘앙스를 가진 ‘
학문’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왔다고 합니다.
학문이란 ‘
박학(博學)’과 ‘심문(審問)’의 합성어로서 ‘
박학’이란 ‘
넓을 박, 배울 학’ 자(字)를 써서 ‘널리 배운다’는 뜻이고, ‘
심문(審問)’이란, ‘
깊이 묻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널리 배운다는 것은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긁어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편견과 아집에 갇히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배움의 폭을 넓힌다는 뜻입니다.
박학하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위험이 크니까요.
‘박학’만큼 중요한 것이 ‘심문(審問)’ 즉 깊이 묻는 것입니다.
진정한 배움은 깊은 물음에서 생깁니다.
물음이 있어야 깨달음과 통찰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겼던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
왜 그럴까’ 물었기 때문에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하는
얘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철학이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을 찾는 것에서 사상의 싹이 트고,
생명력 넘치는 신앙생활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들이 제기하는 물음들을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물음에 다 대답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고,
함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거나 스스로 찾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윽박지르거나, 질문을 귀찮게 여기거나,
기존의 대답을 강요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은 교회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거나 사춘기에 접어들면 아이들은 고약한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세상을 6일 동안에 만드셨나요,
여자는 진짜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인가요,
남자와 여자의 갈비뼈 개수는 같은가요 다른가요?
이런 질문은 학생들이 배우는 과학적 세계관과
성서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생기는 물음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벌을 주시면서도
다른 사람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제대로 읽은 학생이라면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하게 마련입니다. ‘
그 당시 세상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 세 사람 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가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인가요?’
성경에는 오늘의 시각으로 볼 때 비윤리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딸이 아버지와 함께 동침하여 아들을 낳는다든지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낳는 것 같은
근친상간도 그렇거니와, 여호와의 사자가 나그네의 모습으로 롯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을 내놓으라고 하자
딸을 대신 주겠다고 하는 한심한(?) 아버지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성경의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질문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문제지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질문을 불신의 표지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질문 같은 거 하지 말고 무조건 믿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윽박지르면서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니, 이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적 살인입니다.
정말이지 큰일 날 일입니다.
신앙의 세계만큼 물음이 중요한 영역도 없습니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 발견한 주체적 진리만이
자신과 삶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고집불통이나 위선자나 편협한 근본주의자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데는 능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비정상적인 열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감동은 주지 못합니다.
공감할 수 있는 삶과 신앙의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