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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은사적인 경험과 영혼의 경험과의 차이점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것에 대하여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가지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려면 두 가지를 다 직접 경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이상하게 비슷한 질문들에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원 원장님이라든지.. 그렇게 은사적인 경험이 많은 분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자주 다루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약간 항의조로 왜 그것들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은사의 경험은 영계의 빛이 우리의 겉 사람, 바깥에 임하는 경험이며 영혼의 경험은 그 빛이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터치가 바깥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속의 중심에 머물러 있느냐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적인 경험자들은 어느 정도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내면적인 부분인 삶과 인격과 가치관과 중심의 의식은 그다지 변화되지 않습니다.
처음에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알지 못하던 세계를 경험하고 기적적인 능력이나 치유를 경험하면 그것은 아주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은사 체험자들을 대단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의 곁으로 가까이 가서 그들의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물어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성장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도 예전에 은사 사역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해주고 예언을 하고 할 때 도움과 충격을 받던 이들은 나를 예수님의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쯤으로 생각했다고 고백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뜨겁고 열정적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깊은 평화를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비슷한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권능을 경험하고 환상을 경험하며 성령의 권능으로 압도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녀는 강력하게 예언의 영이 터져 나왔을 때 그것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예언을 받은 이들은 울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아내는 그 예전의 경험과 지금의 상태를 결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혀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내도 은사적인 경험으로 가득하던 그 시절에는 깊은 내적 자유함을 경험하고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충분히 죄에서나 겉 사람의 기질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느 정도 영혼의 감각이 열리자 아내는 그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내적인 변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은사자들은 대체로 치유나 예언 사역에 있어서 능력과 표적을 보여줍니다. 나도 젊은 청년의 시절에 그들을 몹시 부러워하며 따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삶에 있어서 별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가치관이나 의식이 별로 깊지 않고 육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겉 사람, 육신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깊은 속성을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경험은 은사적인 경험과 다릅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기능이나 능력이 추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과 임재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터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경험하면 할수록 그 중심의 속성과 기질과 운명과 영원과 그 모든 것들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기적과 놀라운 역사는 은사적인 경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능력과 기적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능력으로 인하여 애굽을 벗어나게 되고 신이 나서 춤을 추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거의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은사 적인 경험이 가나안 적인 영혼의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죄에서, 어둠과의 전쟁에서 일시적인 승리밖에 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 반석의 생수, 중보를 통한 아말렉의 진멸.. 등 여러 많은 놀라운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나안의 경험이 아니며 영혼이 열리는 것과 분명히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외적인 승리이며 피상적인 승리의 경험입니다. 그것은 은사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이나 은사를 통해서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사를 통해서 환경의 문제가 해결되었더라도 사람의 중심에 있는 악과 고집과 육성과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승리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다른 문제와 부딪치게 됩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승리를 경험해도 그들의 중심은 바뀌지 않으며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며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그들의 속 사람, 영혼이 깨어나지 않는 한, 영혼이 깨어나는 가나안의 경험을 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영혼의 기능이 깨어나는 것과 은사적인 경험을 비교한다면 은사적인 것은 한 두 가지의 기능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의 경험은 사람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은사 경험이 피아노를 잘 치게 되었다든지 태권도를 잘 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한 두 가지의 기능이 추가된 것이라면, 영혼의 경험은 사람의 중심과 인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표면적이고 부분적인 것이며 영혼의 깨어남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은사적인 경험은 개미가 사람의 기능 몇 가지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적인 경험은 개미가 사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개미가 부분적으로 사람의 몇 가지의 지혜와 능력을 얻는 것이 은사라면 영혼의 경험은 개미를 사람으로 완전히 신분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시각, 사람의 마음, 사람의 모든 것을 점차 자기 것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부분적이고 시작이지만 영혼은 전체적이고 온전한 것입니다.
은사적인 경험은 아직 영이 깨어나지 않아서 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영광의 실재를 일부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깥 사람의 경험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경험입니다. 그것은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아니라 바깥에서 잠시 물세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더운 여름에 온 몸이 뜨겁고 끈적거릴 때에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한다면 그것은 아주 상쾌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몸은 다시 덥고 끈적거릴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은사적인 경험은 그리 오래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막에서 목이 몹시 마를 때 언제나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다면 그는 지속적으로 목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의 경험은 지속적이며 영속적인 것입니다.
은사적인 경험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그 불과 능력은 그의 겉 사람에게만 역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중심에는 여전히 자아적인 가치관과 의식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죄에 대한 해방도 그리 많지 않으며 비교의식, 열등감, 시기, 질투, 헛된 욕망 등이 그리 많이 처리되지 않습니다.
영혼이 열릴수록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내면으로 전 인격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의 영혼이 조금씩 깨어나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실제적으로 알아가게 되며 그 거룩함과 영광의 세계 속에 거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는 의식의 영광스러운 변화가 동반됩니다.
그것을 우주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주님과 우리가 하나이며 온 세계가 하나임을 알게 되는 영광스러운 영혼의 의식과 감각이 비로소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온 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경배자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통찰력에서 얻어지는 압도적인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물결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대하여 신비주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인식은 어떤 초월적인 상태에서 희열에 빠지고 초월경에 잠기는 단순히 그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뉴에이지의 속임이나 환상과도 다릅니다.
우리의 영혼은 타락한 후에 육체에 묶여있어서 육 중심의 가치관과 삶으로 인하여 탄식하고 고통을 받으며 묶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한을 받고 있는 영혼이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점차로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면서 우리는 영혼의 자유로운 인식과 기쁨과 평화를 자연스럽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의 기쁨은 물질적이나 환경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순교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초월적인 기쁨으로 가득하여 웃다가 죽었다는 인도의 칼 다싱,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얼굴이 천사와 같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던 스데반.. 그들은 육신의 감각으로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깨어날 때 그들은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는 근원적인 기쁨과 만족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기쁨이며 곧 천국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모르는 이들은 세상적인 기쁨과 소유와 물질을 구하지만 이 기쁨을 아는 이들은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나 이 영광의 기쁨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신성의 불꽃을 내면에 간직한 채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로 만들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와 타락을 통하여 사람은 육체와 겉 사람이 주인이 되었고 영혼은 겉 사람의 노예가 되어 무기력하게 갇혀있게 되었습니다.
이 영혼의 주님의 영광스러운 빛과 계시를 통하여 원래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게 될 때 그것이 곧 영혼의 경험이며 그것은 말로 측량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인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리는 이와 같이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고 영적인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찬란한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깨어나 주님을 개념이 아닌 빛으로 실제로 누리고 맛보고 경험하게 될 때 그것은 몇 가지의 기능과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뉴에이지에서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미혹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모르는 이들은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심령의 경험이 아닌 뇌를 혼미케 하는 것을 통해서 비슷한 경험을 흉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심령에 예수의 영과 은총이 임하는 것 외에는 영혼을 깨울 수 있는 아무런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의 성육신과 예수의 이름은 영혼을 깨우는 유일의 길이며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이 땅에서의 경험과만 사역에 대하여만 관련이 있지만 영혼의 열린 상태는 영계에서 영원히 그의 미래와 관련을 가지게 됩니다. 은사는 하나의 기능이며 선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깨어남은 잠시의 상태가 아니라 영원한 자신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선물이며 영혼의 깨어남은 열매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부족하다고 해서 심판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깨어남과 발전이 부족하여 사랑과 헌신과 온갖 아름다움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발전과 깨어남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영혼의 깨어남과 발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깨어나고 성장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은사와 영혼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이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주의할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 사람들은 처음으로 어떤 영적 경험을 했을 때 그것이 은사적인 경험인지 영적인 경험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너무 좋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체험보다, 하나의 권능이나 기능보다 그 선물과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더 사랑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와 기능에 사로잡혀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하거나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긴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영적 여정에서 오래 가지 않아 실족하고 마귀의 시험에 빠져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겸손함과 사모함으로 주님 앞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2. 어떤 이들은 은사자들이며 어떤 이들은 영혼의 경험자라고 한 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퍼센트의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직 영혼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 경험과 은총이 육체에 머무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물을 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때 물을 그 사람의 몸에 확 뿌려 버립니다. 그것이 은사입니다. 그 물을 받을 그릇이 없으므로 몸으로 받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물이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적인 사람들은 영적 충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물이 마르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와 같이 영적 경험이 외부적이고 은사적이지만 이 사람의 중심이 주님께 순복되고 경험이 반복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영혼적인 경험이 조금씩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점차 은사를 사용하는 것보다 영혼의 기능에 따라서 움직이게 됩니다. 영혼의 용량이 증가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것이 바깥의 경험인지 어떤 것이 내면의 경험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반복되고 점점 감각이 발달하면서 그것들을 분리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은사적인 경험이 많은 이들은 사람의 영혼을 잘 느끼지 못하며 겉 사람의 모습만을 주로 인식합니다.
은사적인 경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삼손은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초월적인 힘과 능력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시적인 충만 상태가 끝나면 여전히 육신적인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영혼은 그다지 발달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눈으로 볼 때 들릴라는 아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열린 상태라면 그는 상대의 중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녀의 외모와는 전혀 다른 내면의 끔찍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이성의 겉 사람의 매력에 많이 빠지는 것은 아직 그들의 나이가 영혼이 열릴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정이 있어도 대체로 은사적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뜨거우면서도 아직 육신적인 시각과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적인 경험에서 영혼적인 경험으로 나아가도록 계속 발전과 성장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주님을 알아가고 우리의 영혼이 발전해 가는 데 있어서 그 시작은 은사적인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은사들이 깊은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영혼의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부작용도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주 위험합니다.
어떤 이들은 은사를 아주 낮은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방언이나 예언을 멸시하며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거의 발성기도의 훈련이 없으며 영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묵상기도에만 몰두합니다.
그러한 이들의 영혼은 깨어나기 어려우며 오히려 영이 약해져서 어두움의 영들에게 눌리고 고통을 당하기 쉽습니다.
은사의 세계가 깊은 것은 아닐 지라도 반드시 그러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영적 발전을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가 낮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학교부터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은사는 육신에 속한 것이며 낮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세계는 항상 몸, 육신에서 시작하여 영혼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만날 때 먼저 영혼이 만나지는 않습니다. 먼저 사람의 몸이 만나고 대화를 하고 이를 통하여 마음과 영을 나누게 됩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것을 좋아한다고 육체의 세계를 무시하고 소리내어 기도하지도 않고 몸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도 모르고 깊은 묵상으로만 들어가면 영혼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눌리고 속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순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은사적, 권능적인 경험이 없이 영적 전쟁을 이론과 논리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육체의 영성이 은사인데 처음부터 육체의 영성을 경험하지 않고 영혼의 영성만을 경험하려고 하면 영이 많이 약해지게 되며 효과적인 사역자로서 쓰여질 수 없습니다.
영성에 대한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경험의 문제이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 영혼의 느낌이나 기능이나 감각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영혼이 열려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흡수하며 기뻐합니다. 무엇을 말할 때 그 에너지를 느끼고 흡수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뇌를 사용하여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해를 하고 정리를 한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이 영혼의 움직임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영혼이 열려갈수록 사람들은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영적 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예민해집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느끼고 예민해집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해집니다. 그는 함부로 성질을 내어서는 그 임재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영혼이 열릴수록 새로운 내적 지각이 열립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이 얼마큼 열려 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외적인 지위와 나이와 신앙 경력과 상관없이 그의 안에서 영이 어느 정도 움직이는지 알게 됩니다.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 영혼이 듣는지 아니면 그의 뇌가 분주하게 움직이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영이 어느 정도 감각이 있는지 그가 기도할 때 찬양할 때 어느 정도 영이 흐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보면 심령에 기쁨이 생기며 어떤 이들을 보면 속에서 답답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영혼의 움직임을 알고 잇는 이들은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며 그저 돕기 원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 그러한 영적 상태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 알게 되며 상대방을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축복하게 됩니다. 어린 영혼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고 압제하지 않으며 주님이 그를 보시는 시각으로 보게 되어 사랑하고 축복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해방되고 발전하는 것.. 그것은 진정 천국의 삶입니다. 우리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혜와 깨달음과 사랑의 불꽃과 평화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경험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이든지 영혼의 깨어남과 발전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 됩니다.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체면을 위하여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하게 됩니다.
별로 많이 애쓰지 않고도
그는 단지 사람들의 옆에 가만히 있음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영감과 영혼의 발전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흐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영혼의 깨어남을 위하여
기도하며 간절히 사모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더 조금씩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 속에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빛이 되고
영광의 물결을 확산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영광의 물결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그 천국의 확산을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더 간절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