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필레몬서 7-20 루카 17,20-25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방식과 장소에 대하여 다룹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여기서 노아의 방주와 롯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어서 롯의 아내 이야기를 상기시키며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살리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생명을 주다’, ‘탄생시키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드물게 사용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자신의 현세적 생명을
희생한 이들이 새로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다음,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설명이 덧붙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며
그것이 평범한 일상 가운데 긴박하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끝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일이 어디에서 이루어질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며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는 듯해 보입니다. 전통적으로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구약의 심판 장면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 누구도 종말과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령 성월을 보내며 죽음과 종말,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오늘은 새로운 의미를 찾으며 희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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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필레몬서 7-20 루카 17,20-25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비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서울대교구는 명동 계성여고가 있던 자리에
‘명동밥집’을 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나누는 밥집입니다.
기업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온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봉사자들이 멀리서 기꺼이 오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며느리가 봉사하러 오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기도 합니다.
봉사하면서 가족들이 더욱 화목해졌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도 고시촌이 밀집해 있는 대학동에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넘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남이섬으로 가을 소풍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며 정을 나눈다고 합니다.
친구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가는 곳에는 놀라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단단한 바위 위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험을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길을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희생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와 사랑이 단단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겨자씨와 같던 하느님 나라는 갈릴래아를 넘어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1784년 한국의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뜨거운 신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의 성인이 시성되었고, 124위의 순교자가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모범이 되고, 본인의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기쁘게 본당 사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고, 함께 해 주신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충남 태안의 천수만에서 가족캠프를 하였고, 베론 성지로 기차 성지순례를 하였고,
절두산 성지까지 도보 순례를 하였고, 멀리 안동까지 연도를 하러 갔었습니다.
저보다 더 성당의 물품을 아끼고, 청소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매주 교우들을 위해서 점심을 준비해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폭우가 내리는 날 성당에 오셔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서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분,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시던 분, 본당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시던 분, 기도로서 제게 힘을 주시던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했어도 끝까지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믿음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 아닐까요?
겸손의 계란, 희생의 계란, 십자가의 계란, 나눔의 계란은 단단한 바위에 희망의 꽃, 믿음의 꽃,
사랑의 꽃이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바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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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필레몬서 7-20 루카 17,20-25
복음서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 역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비유는 대부분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둡니다.
사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리사이들은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질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라고
답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어느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양한 비유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빵 속의 누룩처럼,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크게 자라는
작은 겨자씨처럼 쉽게 우리 눈에 띄지 않지만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저기 또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지 묻기보다 오히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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