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2요한 4-9 루카 17,26-37
어떤 사람에게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좋은 친구로 여겼고
늘 함께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게는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임금에게서 궁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혹시 무슨 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 그는
세 명의 친구에게 임금 앞에 함께 가 달라고 차례로 부탁하였습니다.
그가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긴 첫 번째 친구는 딱 잘라 거절하였습니다. 다음 두 번째 친구는
궁전 문 앞까지는 함께 가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였는데 그는 흔쾌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기꺼이 함께 가겠네. 자네는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두려워할 것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께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말씀드려 주지.”
임금의 부름은 죽은 뒤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을 뜻합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재산입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돈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모으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척들입니다.
그들은 무덤까지 따라와 주지만, 죽은 이가 무덤에 묻히고 나면 그를 혼자 남겨 두고 돌아갑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그의 선행은 그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그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세 친구 이야기로,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순간에도 집과 들에 남겨진 재산에
마음을 쓰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동행할 친구는
돈이나 재산이 아닌 오직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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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루카 17,26-37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는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대비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 때를 준비하여 깨어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않고 도외시하고,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 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 33)
이는 그저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짓고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면
생명이 버려지고 멸망하게 될 것이요, 반면에 자신을 내어놓으면,
곧 타인을 향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면 데려갈 것이요
구원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두 이야기를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고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 37)
오늘 우리의 눈이 죽은 시체를 향하여 달려들고 있는
독수리의 눈이 되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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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승 베드로 신부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루카 17,26-37
종말론적 삶
저와 함께 종신서원을 했던 수사님의 서원식 소감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수도생활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제 입에서 나오는 마지막 말이 예수
그리스도이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가 다 울컥했지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직 한참 멀었다고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상 우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잊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소중하게 살아간다면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사는 셈입니다.
세상과 개인의 종말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모여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라며 죽은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참된 생명을
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일상 속에서 인간의 욕심과 중상, 싸움만 있는 곳이 곧
멸망일 테고 하느님의 현존이 함께하시는 곳이 곧 구원일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심고, 팔고, 집 짓는 일상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이는 종말론적 삶의 자세를 갖고 사는 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 예수 그리스도 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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