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 주전자
옥형길
‘70년대 중반에 우리는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의 확대재배로 쌀 사천만석의 생산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식량의 자급자족自給自足을 이루는 녹색혁명을 완수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정부에서는 잠시나마 쌀 막걸리를 마실 수 있도록 허용했다. 밀 막걸리에 젖어 있던 주당들은 쌀 막걸리의 그 부드러운 맛에 취해 저녁마다 양은 주전자를 기우렸다. 수많은 서민들의 입술이 스쳐간 그 찌그러진 양은 양재기를 들어서 부딪치고 마시기를 거듭하며 밤이 으쓱하도록 시론時論에 열을 올렸다. 그 시절 골목길 주점의 낭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다시 쌀 막걸리의 생산은 중지되었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서야 쌀 막걸리의 생산이 본격화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막걸리가 암癌을 예방할 뿐 아니라 건강에 좋다는 몇 차례 TV 보도가 있자 시내의 골목길 곳곳에 막걸리 집이 호프집에 버금가게 생겨났다.
호프라면 500cc유리잔이 떠오르듯 막걸리라면 누런 양은 주전자와 양은 양재기 술잔이 떠오르게 된다. 별로 반듯하지도 않은 찌그러지고 삐딱하게 기우러지기까지 한 그 양은 주전자와 양재기 술잔이 막걸리의 상징이었다.
막걸리 주점의 안주로는 김치와 몇 가지 전煎을 내 놓는 소박한 술상이었다. 그것이 낯익은 한국인 본래의 막걸리 술상이 아니던가.
주점안의 나무로 만든 줄탁자 와 목판때기 장의자長椅子 또한 목로주점을 연상케 하였다. 벽면에 그려진 농촌마을의 초가草家와 돌담길 풍경 또한 막걸리 주점의 낭만을 더해 준다.
막걸리 주막의 상징으로 문전門前에 줄지어 매달아 놓은 노란 양은 주전자는 한 줄기 꽃대에서 길게 피어난 금낭화를 연상케 하였다.
양은 주전자는 모두 나무망치로 몇 대씩 얻어맞아 생으로 생채기를 낸 것들이다. 억지로 세월을 되돌려 놓으려는 수작이었지만 결코 거슬리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허름한 나무 탁자에 앉으면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아주 수더분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찌그러진 양은주전자를 텅~ 소리가 나게 앞에 놓는다. 그 속에 담긴 허연 액체, 그것이 쌀로 빚은 막걸리였다.
찌그러진 주전자의 행색으로 보아 어디에 빵꾸라도 나지 않았나 싶어 허공에 쳐들고 올려다본다. 그래도 반질하게 닦은 몸통에 잔 주름진 내 얼굴이 흐리게나마 비쳐 보인다.
모두가 고물이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와 양은양재기 술잔은 일부러 찌그러뜨린 억지고물이고 내 얼굴은 자연산 고물이다. 칠십의 세월이 술잔에 묻어난다.
막걸리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며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바라본다. 저 만큼 멀리 양은 주전자와 함께한 지난 세월이 떠오른다.
한국전쟁이 끝난 우리 사회는 피폐한 땅이었다. 먹을 것이 모자라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는 뒤뜰에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강냉이와 우유죽을 끓였다. 모두 국제 구호기구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등굣길에는 언제나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고 갔다가 하굣길에는 강냉이 죽이나 우유죽을 받아서 들고 왔다.
먹을 것을 들고 오면서 배고픔을 참는다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러나 먹어서는 안 된다. 집에는 여러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귀갓길은 논두렁 밭두렁으로 이어지는 길이 어린 발걸음으로 멀고 먼 오리길이 넘었다. 견디다 못해 한 모금 마셔본다. 달짝지근한 그 맛이 혀끝을 감돌아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니 그 유혹에 한 모금으로는 끝낼 수가 없었다. 집에 왔을 때는 빈 주전자 였다. 나누어 먹어야 할 동생들의 눈길을 피해 소를 끌고 들판으로 나가버렸다.
또 아버지가 들일을 할 때면 찌그러진 그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들고 논두렁 밭두렁을 찾아 갔다. 아버지는 새참으로 막걸리 두어 잔을 드셨다. 들고 가는 도중에 배고파서 한 모금씩 빨아 마시다가 술이 늘었다. 지금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실력은 그렇게 어려서부터 꾸준히 쌓아온 것이다. 너무 많이 마셨나 싶으면 개울물을 한 주먹 퍼 넣었다. 아버지가 논두렁에 앉아 술을 드실 때 나는 먼 산만 쳐다보았다.
“술이 너무 싱겁구나.”아버지는 더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보물 주전자가 생겼다. 형태도 다르고 용량도 5리터 정도의 큰 것이었다. 양은 주전자가 누런색이라면 그것은 황금색이었다. 같은 누런색 계통이라도 차원이 다르고 품격이 달랐다. 우리 동네는 물론이고 아마 우리 면내面內에서도 유일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양은주전자가 프라이드 급이라면 새 주전자는 에쿠스 급이었다. 디자인도 특수하여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품 있는 물건이었다.
나는 그 주전자에 술을 담아 들고 아버지가 일하시는 논밭으로 심부름 가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마을 안길을 한 바퀴 돌아서 가곤하였다. 동네사람들도 비싼 물건이라며 부러워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들녘의 넓은 서마지기 논의 논갈이와 써레질을 해 주고 이 주전자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도시에 사는 부재지주의 농사일을 해 주고 품삯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 주전자는 내가 사는 섬에서는 물 건너 온 물건이었다.
어머니도 지금까지의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는 아무렇게나 내 동댕이치듯 다루었지만 이 보물 주전자만은 하루에 몇 번이라도 쓰고 나면 꼼꼼히 씻고 닦아서 높은 선반위에 올려놓으셨다.
몇 해 전 고향집에 갔을 때 그 주전자는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농자재 農資材창고 속에 쳐 박혀 있었다. 옛 생각에 쳐들어 보니 지난날의 그 아름답고 우아하고 웅장하던 귀한 모습은 어디가고 참 형편없이 투박하고 멋없는 물건이었다. 섬세하고 날렵한 부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냥 단순한 형태로 실하게만 생겼다. 요즘 스텐 주전자의 외형이나 기능적 구조에 비하면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그 누런 금빛 색채만은 아직 죽지 않았다.
명품도 세월 따라 퇴물이 되니 쓸모도 없고 보아주는 사람도 없다. 오직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함께하였던 나 뿐이다.
그 옛날 양은 주전자 들고 밭갈이 하던 아버지를 찾아 노방초路傍草 늘어지고 야생화野生花 향기로운 들길을 따라 작은 발걸음 옮겨가던 유년의 순수 낭만에 젖어 깊은 추억에 빠져 든다.
세월 따라 뒷전으로 밀려나고 찾아 주는 이 없는 것이 어디 양은주전자 뿐이던가. 양은주전자 그 찌그러진 형상위에 세월에 밀리고 밀려 속절없이 백수가 되어 추억에 젖어 사는 내 모습이 겹쳐진다.
그때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
첫댓글 70년대의 신촌역앞 니나노집도 사라지고, 최후의 보루였던 종로의 마차골목도 몇년 전 사라지고, 막걸리 담은 양은 주전자 보기가 힘듭니다. 양은 종재기로 아쉬움을 달랩니다.
막걸리는 양은 종재기에 묵어야 제맛이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