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아나스타시스
본문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본문 주제 관찰 ①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불행한 사람은 행복하다 ②애통 : 고통, 슬픔이란 펜도스에서 유래. 고통으로 몸부림 칠 정도로 철저하게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 ③하나님을 바라보고 참지 않으면 애통할 일도 없다 |
1. 애통하는 자(4). (적용 :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가 되라)
①그들의 결백함, 그들의 의, 그들의 자존심을 잃어버려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다 ②죄에 대한 각성과 애통은 사회를 변화 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③애통은 그러한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꼭 필요하다 (결)죄에 대하여 애통하라 예수님이 위로하시기에 복이 있다 |
2.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4). (적용 : 애통하는 자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다)
①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한 위로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찾으라 ②♬ 내 구주 예수님 ③예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해 주시는 분이 (결)죄로 인하여 애통하라 그리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라 |
3.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복(4). (적용 : 부활과 영생의 복)
①애통으로 인한 참다운 위로는 하늘에서 주신다 ②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으로 위로를 주신다 ③사도 바울은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하였다 (결)애통함으로 부활과 영생의 복을 누려라 |
오늘 말씀은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 이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무슨 이유로 애통하며, 애통하는 자는 어떤 자이기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으며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위로를 받게 되는지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애통하는 자(4). (적용 :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가 되라)
산상수훈의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한 것은 “불행한 사람은 행복하나니”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하여 불행해야 하겠지요? 불행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번역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행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근거를 존 스토트목사는 이 복이 가진 놀랄 만한 역설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함이라고 그의 산상수훈 설교에서 밝혔습니다. 그의 글을 계속해서 인용합니다. “대체 어떤 슬픔이기에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이 주는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단 말인가? 전후문맥을 보면 여기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받는 사람들은 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애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결백함, 그들의 의, 그들의 자존심을 잃어버려서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별의 슬픔이 아니라 회개의 슬픔이다.” 이 해석이 올바르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무엇보다 죄 때문에 슬퍼하는 도덕적 슬픔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면 실현 불가능한 역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팔복은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기 때문에 행운, 행복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온유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하며, 긍휼히 여겨야 하며, 마음이 청결해야 하며, 화평하게 해야 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 하는 복이라면 과연 우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들을 받아 누릴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의 심정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중에 받아 누릴 복이 없을 것 같습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로서는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이렇게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행해야 행복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리들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합니까?
애통은 고통, 슬픔이란 펜도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통으로 몸부림 칠 정도로 철저하게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이 애통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로 인한 고통, 슬픔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의 병마로 인한 고통이 아닌 내면의 고통인 것입니다. 고통으로 몸부림 칠 정도로 철저하게 이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은 젊은 예일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1740년 10월 18일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침 경건 시간에 내 영혼은 완전히 녹아 버렸으며, 나의 엄청난 죄성과 비열함으로 인해 통렬하게 애통했다.” 그의 이름은 18세기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였습니다. 사실 그는 21세에 개종을 하고 24세에 헌신을 해서, 29세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드너는 질그릇같이 육신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영혼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았습니다. 브레이드너의 생애는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심장에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존 웨슬리의 마음에 전환점을 가져왔으며 짐 엘리엇 선교사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젊은 대학생의 통렬한 애통은 그를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게 하였고 그의 생애는 또 다른 대각성을 일으키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한사람의 죄의 대한 애통은 가족에게 변화를 주는 줄 믿습니다.
나 한사람이 직장에서의 죄에 대한 애통은 직장 문화를 변하게 할 줄 믿습니다.
내가 죄에 대하여 통렬하게 애통할 때 교회가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나 한사람이 죄에 대하여 애통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각성을 주는 줄 믿습니다.
죄에 대한 각성과 애통은 사회를 변화 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죄와 더불어 사귐으로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 죄가 넘치는 되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지만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은혜의 자리에 은혜가 넘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비참함을 깨닫고 통렬하게 애통하지 않고는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돌아봅니다. 정치 지도자가 죄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지금 정치 사회가 얼마나 요동치고 있습니까? 과거의 관행으로 인하여 죄에 대하여 타협하고 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했기에 우리 정치 사회가 변하지 않고 저항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전투구의 정쟁의 정치판이지만 죄로부터 멀어지는 정치를 할 수 없단 말입니까? 기존의 정치권에 환멸을 느껴 새로운 정치를 간절히 바라는 현상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범죄 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해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좌파와 우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와 상관없는 정치인들이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정치판에서 과연 이런 죄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아니 바꿔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계를 봅니다. 경제를 이끈다는 재계의 수장들치고 그들이 범죄 하지 않는 경제인들이 어디 있습니까? 왜 대한민국의 재벌출신들은 다 감옥에 가야하며 이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정직하고 투명하게 경영하지 못하고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죄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왜 외국의 존경 받는 경제인들에 비하여 존경을 받지 못합니까?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속여야 되므로 죄와 짝을 해야 하는 이 비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물질만능의 맘모니즘이 얼마나 큰 죄악인 줄 깨닫지 못하는 한 투명한 경영은 힘듭니다. 기독교인 실업가가 정말 크게 되어 투명하게 정직하게 해도 잘 된 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할 뿐입니다.
목회자의 비리와 부정이 얼마나 많은지요? 정말 부끄러울 뿐입니다. 큰교회의 목회자는 드러나 문제지만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은 드러나지 않는 죄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느끼는 목회자들이 범하는 죄는 ‘나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라는 의식일 것입니다. 목사들은 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늘 기도하고 예배를 인도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은 죄에 대하여 지나치게 관대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자들이 영적으로 타락하면 그 사회 교회는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의 직분을 받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죄에 대하여 철저한 애통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천국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팔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은 그러한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통렬한 애통은 천국시민으로서 통과의례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죄의 더러운 모습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을 가는데 있어 방해하는 죄에 대하여 통렬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양심에 화인 맞은 영혼은 죄에 대하여 무딥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이 이 때문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죄라는 놈은 꼬리를 잘라도 또 자라나고 잘라도 또 자라납니다.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놈이 죄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였다고 해서 죄에 대한 방어막이 구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탄이 공격하므로 죄에 대하여 더 노출 되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결코 나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에 대하여 반응하지 못하고 애통하지 못함으로 여전히 죄에 노출되어 있다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에는 눈물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애통해 하는 눈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메마르고 갈한 심령에 갈급한 죄에 대한 통렬한 애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죄의 불덩이를 지고 갈 때 그것을 끄기 위해서는 눈물을 지고 가야 한다고 영국의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왓슨은 말하였습니다. 울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욜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나의 약한 성품에 대하여 전에 그렇게도 깊이 혐오감이 가는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우리는 이 마음을 품고 이 나라에 대하여 애통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절망과 좌절로 청장년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분노와 갈등으로 청소년들이 위태롭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을 위하여 통렬한 애통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배가 폐하는 날이 옵니다. 성경이 없어지는 날이 옵니다. 찬양 소리가 그치는 날이 옵니다. 예루살렘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예배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원수들이 부르라고 조롱하기에 눈물지었습니다. 어찌 우리가 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 같지 않다고 보장하겠습니까?
죄에 포로가 되고 물질에 포로가 되고 명예와 자기 의로움에 포로가 된 나의 이 비참함을 향한 애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날이 이르기 전에 교회를 향한 애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황금 입 크리소스톰은 눈물은 죄를 씻어내는 스폰지라고 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내 죄를 위해 나의 교회를 위해 이 나라 내 조국을 위하여 애통하십시오. 그러면 내 가정이 살아 납니다. 이 나라, 이 민족, 내 교회가 살아날 줄 믿습니다.
죄에 대하여 애통할 때 복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2.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4). (적용 : 애통하는 자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다)
고달픈 현대인들은 무엇보다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위로를 받기 쉽지 않습니다. 대중 속에서는 오히려 고독만 있을 뿐입니다. 이 힘든 세상에서 누가 나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여러분입니다(?). 통속적인 대중가요에서도 “내가 만약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라고 묻고 ‘여러분’이다 하는 ‘여러분’이라는 가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작시자의 의도는 하나님이 위로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중가요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위로해 준다는 것을 여러분으로 돌려서 한 것입니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 여러분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되겠지요? 기도로 격려로 여러 가지로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외로울 때, 괴로울 때, 고통 중에 끊임없이 위로해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는데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란 무엇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1563년에 작성된 신앙고백서입니다. 웨스트민스터와 벨직 신앙고백서와 더불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귀중한 신앙의 교리를 제공합니다. 요리문답이란 우리가 믿는 도리를 129개의 문답을 정리한 것입니다.
제1문에 보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라고 묻고 답하기를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신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한 위로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찾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위로자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복음의 산상수훈에서는 예수님은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위하여 애통하며 울 때 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울기 때문에 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로 인하여 애통할 때 위로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평안하고 인사를 나누고 아무런 일이 없는 것 같이 보여도 헤어져 돌아서면 사람들에게 내 놓지 못하는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차마 사람들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애통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돌아서 눈물지으며 홀로 가슴 아프고 애통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슴앓이 하는 그런 것들 때문에 울며 슬퍼하십니까? 우리 예수님께 고백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내 구주 예수님 같은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위로자 되시며 피난처 되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 내 구주 예수님
내 구주 예수님 주 같은 분 없네
내 평생에 찬양하리 놀라운 주의 사랑을
위로자 되시며 피난처 되신 주님
나의 영혼 온 맘 다해 주를 경배합니다
온 땅이여 주님께 외쳐라 능력과 위엄의 왕 되신 주
산과 바다 소리쳐 주의 위엄을 높이리
주 행한 일 기뻐 노래하며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리라
신실하신 주의 약속 나 받았네
우리 주 예수님은 모든 슬픈 자를 위로 하십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의 눈물을 그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로 평강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 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처럼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슬퍼하는 자,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위로자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사 66:13). 위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요. 예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죄에 대한 비참함을 깨닫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받는 위로는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현재는 완성된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죄와 모든 고통과 죽음을 제거하시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사모하는 천국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완전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의 보좌에 앉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줄 믿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처럼 간절히 우리의 위로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애통하는 자가 받은 복(4). (적용 : 부활과 영생의 복)
죄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결백함, 의로움, 불의한 고난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는데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애통하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따라 간 제자들의 삶은 예수님 때문에 불의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나라의 위로가 그들을 위로하기에 순교의 삶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는 세상이 주는 만족과 안락, 위로보다 하늘의 것을 사모합니다. 참다운 위로가 하늘에서 주신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는 현실도피와 염세주의자의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만과 불평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를 거절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위로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위로보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우리는 더 사모합니다. 하늘에서 주시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위로는 세상이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으로 위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중 57문과 58문의 문답을 보겠습니다.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라며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러한 위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위로는 부활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이 되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완전한 복락을 얻는 위로입니다. 이 땅에서 애통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있습니다. 내 육신이 다시 사는 부활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은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생하기에 큰 위로가 있습니다. 건강이고, 돈이고, 명예고 쾌락이고, 사랑이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부활과 영생보다 더 큰 위로가 없는 줄 믿습니다. 육신을 만족시키는 이 땅에서 주는 것들은 잠시잠간입니다. 물론 그것들로 인하여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안위를 받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위로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장막이 지는 날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의 위로로 인하여 소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위로가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부활과 영생이 있음에 큰 위로가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과 영생을 붙든 심령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하심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과 영생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도 성경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겪는 수많은 환난과 핍박을 겪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영생을 믿고 예수님의 도를 전파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꺼이 애통하며 그 길을 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고후 7: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이 기쁨은 마치 잔에 포도주를 넘칠 때까지 채워 붓듯이 내게 기쁨이 넘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처지를 보았을 때 도저히 기쁨이 넘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기쁨은 커녕 수많은 고통과 애통이 그를 지배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기뻐하고 감사하고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기쁨과 감사로 넘칠 따름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며 심지어 가족 중에 죽은 자가 있어도 일주일 동안 조문조차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위로다운 위로조차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위로는 차라리 사치에 불과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하여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하루 양식을 위하여 일하고 돌아와서 저녁에 눈물 짓고 다시 아침에 일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안식일을 맞아 겨우 회당에 가서야 사정을 들은 회당장이 하나님의 위로가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애통해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당신을 위로하기를” 초대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가난과 고통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서의 위로보다 하늘에서의 위로를 더 소망했습니다.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신앙을 붙잡고 애통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의 삶이 이 땅에서 아주 끝나는 삶이 아니라 이 후에 더 좋은 세상이 있음을 알고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고 기꺼이 고통 가운데서도 위로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여 잔이 넘치는 기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렌스키(Lenski)는 “모든 위로 가운데 가장 큰 위로는 죄를 뉘우치며 애통하는 모든 죄인에게 선포되는 죄의 사면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 문제와 싸우면서 치열한 영적 전투에 임할 때 성령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를 보내 주십니다. ‘위로함’이라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헬라어 단어가 보혜사를 뜻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늘 잊지 않기 위하여 곁에서 변호하시고 위로하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귀중한 예물을 드리고 시간을 내 헌신하는 것도 내세에 있을 부활과 영생을 믿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통 가운데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것도 장차 받을 예수님으로부터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 7: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삼위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의 위로는 최종단계에서 완성되기에 끝까지 신앙의 경주를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되는 날까지 부활과 영생의 복락이 있음을 믿고 끝까지 분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