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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복음: 루카 2,22-35
자신이 원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내용의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에 의해 봉헌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예수님은 굳이 봉헌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어차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모 마리아에 의해 봉헌됩니다.
성모 마리아에 의해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메온의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이신데도 또 하느님께 봉헌되셔야 할까요? 그것도 인간의 손에 의해서.
하느님의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집은 뜻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냥 하면 되지 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혼자서 사랑할 능력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애덤 그랜트’는 자신의 책 『기브앤테이크』에서 내어줄 줄 아는 사람, 남의 행복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 이타적인 사람이 세상에서도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그는 ‘기버(Giver)’라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만 알고 남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테이커’(Taker)라고 하는데, 이들은 세상에서 대부분 힘든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중간에 있는 사람이 받는 만큼 주겠다는 사람인데 ‘매처(Macher)’입니다.
이들은 월급으로 받는 만큼 일해주기 때문에 중산층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가장 성공하는 사람도 기버이지만 가장 망하는 사람도 기버라는 것입니다.
기버는 마음이 착해서 남이 보증을 서달라면 이유 불만 않고 서주고, 남이 승진하도록 도와주며 그래서 남에게 이용당하고 돈도 못 법니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기버는 성공하고 어떤 기버는 실패하느냐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애덤 그랜트 자신이 대학 초년생 때 아르바이트를 한 일이 있습니다.
처음 맡았던 아르바이트는 ‘레츠고’라는 여행 책자를 만드는 회사에 광고 판촉이었습니다.
관리자는 근무 첫날 고객 명단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레츠고 관광 가이드 광고비로 작년에만 30만 달러를 낸 사람들이야.
전화를 걸어서 다시 광고를 싣도록 설득해봐.”
겨우 열여덟 먹은 대학생이 회사 중역들에게 내년에도 광고를 실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그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여행사 경영자 스티븐이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작년에 그 여행사 광고에 나갔던 여행사 주소와 이메일이 이미 쓰지 않는 오래되고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메일과 주소를 유지하기 위해 지급된 수백 달러를 빼주지 않으면 광고를 싣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광고는 그 위치와 크기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던 그랜트는 10% 광고비를 깎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화를 하다 보니 세 번 더 깎아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다시 광고를 싣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작년 재광고율은 95%였는데, 그랜트는 거의 회사에서 잘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광고부 부팀장을 만납니다.
그녀는 작년 그랜트의 자리에서 일하며 30만 달러라는 수익을 올린 사람 때문에 업무가 늘어나 새로 생긴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하며 학비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랜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역량에 따라 자리가 더 만들어지고 줄어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광고주들에게 밀리면 자신만 잘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입지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깎아달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을 이야기하고, 또 그 광고로 많은 학생이 등록금을 내게 된다는 사실 등을 이야기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4달 뒤, 그랜트는 6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23만 달러의 새로운 광고도 따냈습니다.
그 회사가 생긴 이래 최고의 실적입니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광고부서의 영업 총 책임자가 되었고 100만 달러 수익을 달성하게 됩니다.
처음 그랜트가 일이 안 될 때는 사실 상대의 이익을 생각해 줬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좋은 사람’이란 이미지를 상대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면서도 상대에게 잘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일자리가 생기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생각에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기도 합니다.
“나 너 많이 사랑해!”라는 말과,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거야!”라는 말과 어느 말이 듣기 좋습니까? 자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듣기 좋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라니까 억지로 사랑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뭔가 기분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고,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봉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랑을 파견받지 않고 자신 힘으로 하려고 하면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그랜트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를 채우려는 사람이 됩니다.
호구 기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파견되어야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아버지께 봉헌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힘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시키셔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뜻에 봉헌되어 사랑하셨다면 우리 또한 그래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봉헌되었을 때 참으로 이 세상에서도 성공한 기버, 사랑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복음: 루카 2,22-35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뵐수 있을까요?
의롭고 독실한 신앙인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던 노인 시메온 예언자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신 시메온에게 그가 죽기 전에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의 정결례를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시메온 예언자와 딱 마주치게 됩니다.
시메온은 직감적으로 그 아기가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황송스러운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 29-32)
우리도 성체를 배령할 때마다 우리 각자의 두 손바닥 위에 놓인 그분을 보며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너무나 은혜롭고 영광스럽게도 당신께서 오늘도 제 두 손 위에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군요.
이제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으니,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노인 신앙인들의 모델입니다.
수시로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노화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반드시 죽기 전에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설레는 가슴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그 비운 자리에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도록 개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로 받아 안는 과분한 축복을 만끽했습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의 얼굴을 뚜렷이 바라볼 수 있는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지복직관의 은총은 시메온 예언자에게만 주어진 선물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강론>(2023. 12. 29. 금)(루카 2,22-35)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마태오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와 루카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를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을 밖 어떤 외양간에서 태어나셨고, 태어나신 뒤에 어떤 집으로 옮겨 가셨는데(마태 2,11), 그 집에서 동방박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는 길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러서 예수님을 봉헌하는 예식과 성모님의 정결례를 거행했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지내시다가 헤로데가 죽은 뒤에 나자렛으로 가서 사셨습니다.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은 탈출기 13장에 있고, 산모의 정결례에 관한 율법은 레위기 12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니까 봉헌하지 않아도 되고, 또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니까 정결례를 거행하지 않아도 되는데, 두 가지를 다 거행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ㄴ-35).”
복음서 저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고,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고”,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라고 성령께서 알려 주셨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일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한 일이라고
기록했습니다(루카 2,25-27).
이 말들은 모두, 시메온은 특별히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예언자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증언하고 선포하기 위해서 선택된 예언자입니다.
루카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시메온의 예언’은
성전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 공적인 증언이고 선포입니다(루카 2,38).
<성가정이 헤로데를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면, 시메온의 예언과 축복은, 하느님께서 지켜 주고 계신다는 믿음과 함께, 성가정에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적인 증언이고 선포라고 해도, 그 증언과 선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즉 사람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시메온의 예언을 흘려들었거나 의례적인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안 믿고, 안 듣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라는 말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라는 말은, “저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즉 “저는 구세주를 만났습니다.” 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를 보다.’ 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다.’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는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인데(루카 2,27), 아마도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요한 1,33).”
시메온과 세례자 요한은 본인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믿는 것이 곧 보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라는 말은,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메시아는 그 뜻에 따라서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라는 말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시메온이 한 말 가운데에서 앞의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고, 뒤의 말은 예언인데, 이 예언을 예수님과 성모님이 겪게 될 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면 고난을 예언하는 말이고, 그 고난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예언이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라는 말은,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라는 말은,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는 뜻인데, 구원받을 이들과 받지 못할 자들이 가려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