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규모를 결정한 것
로마 시대의 전쟁을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 한다면 중세 유럽의 전쟁은 무협영화(武俠映畫)에 가깝습니다.
이토록 차이가 나는 이유는 봉건제도(封建制度) 때문입니다.
실제로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영주(領主)는 왕(王)에게 충성(忠誠)을 맹세(盟誓)했지만 자신의 영역(領域)을 간섭(干涉) 없이 다스릴 권리(權理)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이 영주를 참전(參戰)시키려면 충분한 명분(命分)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무력 동원(武力動員)이 쉽지 않아 전쟁의 규모(規模)가 고대(古代)에 비해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주가 영주의 무력을 전쟁에 동원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영주(領主)의 실질적(實質的)인 권력 기반(勸力基盤)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이 가능한 경제(經濟) 단위인 장원(莊園)과 이에 속한 노동력(勞動力)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이득(利得)을 취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지키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어서 영주는 장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성(城)을 쌓았습니다.
처음에는 거처(居處) 주변에 목책(木柵)을 설치(設置)한 수준(水尊)이었으나 점차 돌(石)을 사용하면서 육중(六中)한 성(城)으로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비슷한 것 같아도 서양(西洋)과 동양(東洋)의 성은 차이(差異)가 많습니다.
↑13세기 프랑스 프로방스(Provence) 지역 영주인 레이몽 베랑제(Raimond-Bérenger) 5세는 천생 ‘귀족(貴族)’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육체적 노동(肉體的勞動)을 할 필요(必要)가 없었다. 한마디로 일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레이몽은 이 같은 관습법(慣習法)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경멸(輕蔑)해 마지않던 천한 농민(農民)과 건달(乾達)들을 귀족과 구분(區分)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制度的裝置)를 구축(構築)해 나갔다.
자신의 영지(領地)에 사는 일반인(一般人)과 고귀(高貴)한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시시콜콜 구분하는 각종 법(法)을 만든 것이다.
↑장원은 중세 경제의 기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은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처럼 마을 전체를 감싼 방벽(防壁, Wall)의 개념(槪念)이지만 중세(中世) 유럽의 성(城)은 영주(領主)의 거처(居處, Castle)만을 의미(意味)합니다.
경우에 따라 장원 외곽(莊園外廓)에 성벽(城壁)을 쌓기는 했어도 디즈니랜드의 상징물(象徵物)이 된 노이슈반슈타인성(Schloss Neuschwanstein↓)처럼 요새(要塞) 같은 독립 간축물(獨立建築物)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은 유사시(有事時) 성안에 있는 이의 안위(安位)를 지키기 위한 용도(用道)이므로 순전히 군사적(軍事的) 건축물입니다.
↑유럽의 성은 군사적 목적에 충실합니다
중세에는 대규모 병력의 동원이 힘들었으므로 성의 크기는 소수(小數)의 병력(兵力)으로도 적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적이 달라붙어도 일거(一去)에 싸움이 벌어지기 힘들 만큼 좁고 높았습니다.
전투에 사용되는 무기도 이에 적합(適合)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진화(進化)라고 볼 수도 있있을지 모르나 기본적(基本的)으로 전쟁의 스케일이 작아지다 보니 고대(古代)에 비해 전쟁의 기술(技術)이 발전(發展)하지는 못했습니다.
↑망루와 해자가 갖춰진 전형적인 중세의 성
중세 후기(後期)로 갈수록 전쟁의 규모가 점차 확대(廓大)되었지만 대체로 기사(騎士, Knight), 용병(用兵)처럼 교전(交戰)을 벌이는 주체(主體)는 극히 제한적(制限的)이었습니다.
프랑크(Frank)의 칼 대제(Carolus Magnus) · 샤를마뉴(Charlemagne) ·742년 04월 02일~814년 01월 28일)처럼 중장기병(重障騎兵)을 운용(運用)한 예외적 사례(例外的事例)마저도 동시대 비잔틴(Byzantium) 제국의 중장기병 부대인 카타프락토스(Cataphract)에 비교(比較)하면 민망(憫惘)한 규모(規模)였습니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화약(火藥)의 등장(登場) 전에 사용한 무기는 이전(以前)과 크게 차이(差異)가 없었습니다.
↑카타프락토스(κατάφρακτος, 단수형) 또는 카타프락토이(κατάφρακτοι)란 중갑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말에게도 마갑을 입힌 병종이다.
카타프락토이는 고대 그리스어로 '완전히'란 뜻의 접두사 카타-(κατα-)와 '방어하다'라는 뜻의 프라소(φράσσω)가 합쳐진 단어로, 완벽하게 무장한 자(들)를 뜻한다. 이 외에도 '중장기병', '중갑기병', '철기군(鐵騎軍)', '개마무사'(鎧馬武士) 등 한자어로 비슷한 뜻을 지닌 어휘들이 존재한다.'개마무사'의 경우에는 주로 한반도, 특히 고구려의 마갑을 착용한 기병을 가리키는 어휘로 사용하며, 반대로 '카타프락토이'는 서양권의 것만을 가리킬 때 쓰기도 한다. 물론 본래의 뜻은 같으므로 모두 묶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용어 '중기병'의 경우, 경기병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중세 유럽의 기사나 근세의 퀴레시어 등 카타프락토이로 불리지는 않는 많은 병종까지 총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프랑크군을 이끌고 투르-프와티에(Tours / Poitiers) 중에서 이슬람의 북상(北上)을 저지(沮止)한 칼 마르텔(Charles Martel)
즉, 고대(古代)부터 사용되어 온 칼이나 활 같은 무기가 적합한 형태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먼저 로마 시대에 사용된 글라디우스(Gladius)처럼 숏소드(Short Sword)가 대표적인 중세 보병용 무기(中世步兵用武器)였습니다.
작아서 휴대(携帶)가 편리(便利)하지만 갑(鉀)옷도 뚫을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워 주로 근접전(近接戰)에서 위력(威力)을 발휘(發揮)했습니다.
반면 롱소드(Long Sword)는 체격(體格)이 좋아야 다룰 수 있어 전투용(戰鬪用)으로 그다지 효율적(效率的)이지 않았지만 위력이 커서 기사(騎士)의 상징(象徵)으로 여겨졌습니다.
↑숏소드, 즉 단검은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보병용 무기입니다
롱소드 중에서도 날이 넓은 검(劍)을 브로드소드(Broad Sword)라고 통칭(統稱)하며 이보다 더 발전(發展)한 것이 베기는 물론 찌르기도 가능한 바스타드소드(Bastard Sword)입니다.
대형화(大型化)에 정점(頂点)을 찍은 것이 말 그대로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크고 무거운 투핸디드소드(Twohanded Sword)입니다.
이처럼 검이 대형화된 이유는 제련 기술(製鍊技術)의 발달(發達)에 힘입어 갑옷의 방어력(防禦力)도 함께 커졌기 때문입니다.
더욱 강력(强力)한 공격력(攻擊力)이 필요(必要)해진 것이었습니다.
↑다루기 어려워 롱소드는 기사들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중세 유럽이 아무리 암흑기(暗黑期)여도 주변(周邊)과 담을 쌓고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날이 반달처럼 휘어 베는데 뛰어난 시미터(Scimitar)는 페르시아(Prsia)에서 유래(流來)되어 사라센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기병(騎兵)이 사용했던 사브르(Sabre)도 이와 유사(有事)한 형태(形態)입니다.
시미터와 사브르 같은 곡도(曲刀)는 아니지만 스코틀랜드(Scottland)의 하이랜더(Highlander)들이 사용한 클레이모어(Claymore)도 베기용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검입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