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뜻에 관한 부분만 가져올래다가.. 기사가 괜찮은 것 같아서 통째로 가져와 버렸습니다..
`저장된 페이지'..라는 것은.. 곧 없어질 페이지.. 또는 없어진 페이지라는 뜻이죠.. 아까바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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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영원한 보헤미안, 그리고챔피언, 퀸 _ 박민미
운동 경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ꡐ각본 없는 드라마ꡑ이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운동 경기는 분명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기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은 드라마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우리 귓가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ꡐ위 아 더 챔피언 마이 프레엔-드(We are the champion, my friend)…….ꡑ 이 장엄한 노래가 각본 없는 드라마에서 울려 퍼질 때, 진 쪽도 이긴 쪽도, 선수도 관람객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리 모두가 챔피언이라고 외치고 싶어집니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 있을 록 그룹, ꡐ퀸ꡑ과 그들의 노래에 대해 한번 느껴 보기로 합시다.
ꡐ퀸ꡑ의 탄생
비틀즈가 없는 자리, 1970년대 영국의 록 무대는 싸늘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비틀즈가 끊임없이 내놓은 새로움에 중독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다 할 새로운 것이 없는 록 음악들은 관심을 끌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신선한 충격을 간절히 원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롤링 스톤즈․더 후․엘튼 존 등의 스타들이 다가왔고, 이들의 무대에 사람들은 관심과 환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ꡐ퀸(Queen)ꡑ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퀸의 멤버는 노래를 부르는 프레디 머큐리, 기타를 치는 브라이언 메이, 베이스를 맡은 존 디콘, 그리고 드럼을 치는 로저 테일러, 이렇게 네 명입니다. 이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퀸을 지켰지요.
먼지 알갱이에 수증기가 붙어 비가 될 때, 다른 수증기를 모이게 만든 처음의 알갱이를 우리는 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퀸의 핵은 브라이언 메이였습니다. 브라이언 메이는 임페리얼 대학에 다닐 때 밴드를 만들기로 합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팀 스타펠과 함께, 드럼 치는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학교 게시판에 내지요. 이때 마침 로저 테일러가 나타나 함께 ꡐ스마일ꡑ이라는 그룹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들은 1969년에 정식으로 음반을 냅니다. 이 무렵 ꡐ레키지ꡑ라는 그룹의 일원이던 프레디 불사라라는 친구가 이들의 팬으로서 가끔 놀러와 함께 노래를 하기도 하면서 친분을 쌓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스마일이 해체되고, 노래하던 스타펠의 자리를 프레디 불사라가 대신하게 됩니다. 프레디 불사라는 자신의 이름을 ꡐ프레디 머큐리ꡑ라고 바꾸고, 그룹의 이름도 ꡐ퀸ꡑ이라고 하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에 마침내 베이스 주자 존 디콘이 합류함으로써, 1971년 2월 제대로 된 퀸이 출발합니다. 이들은 팀이 만들어지자마자 서둘러 음반을 내지 않고, 오랜 연습 기간을 거쳤지요. 1973년 5월에 드디어 그들의 첫 앨범 《퀸 I(Queen I)》이 세상의 빛을 봅니다. 1974년 3월의 《퀸 II(Queen II)》, 1974년 11월의 《쉬어 하트 어택(Sheer Heart Attack)》, 1975년 11월의 《어 나잇 앳 디 오페라(A Night At The Opera)》에서부터, 1995년 죽은 프레디 머큐리를 추모하여 발표한 앨범 《메이드 인 해븐(Made In Heaven)》까지. 이들이 함께한 20년의 세월 동안, 이들은 스무 장의 앨범을 우리에게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앨범 말고도 곡 하나를 만들어 따로 발표하는, 이른바 ꡐ싱글ꡑ도 상당수에 이르렀지요. 멤버 한 명 한 명이 따로 작업해 발표한, 솔로 작품들도 꽤 여럿입니다.
사람들이 퀸에게 처음부터 열광했던 것은 아닙니다. 퀸은 1974년에 영국과 미국으로 공연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관심을 끌다가, 마침내 3집 《쉬어 하트 어택》을 발표한 뒤 유럽과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퀸의 멤버들은 모두 곡을 만드는 능력이 있었고, 노래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맡은 프레디의 뒤에서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 주었지요. 프레디는 이런 팀의 특색을 충분히 활용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의 특징을 곡에 끌어들여,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라는 노래를 정성껏 만듭니다. 이 곡을 녹음하는 데만 3주일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합창하는 부분을 위해 목소리를 덧녹음하고 덧녹음하는 작업을 무려 180회나 하는 등 정성을 다한 이 곡은, 길이가 약 6분, 정확히 말해 5분 55초였습니다. 다음에 나올 4집 앨범에 이 곡을 넣으려고 하자, 음반 회사 사장은 프레디에게 곡을 좀 짧게 줄이라고 요청했습니다. 방송사에서 이렇게 긴 곡을 틀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프레디는 곡을 줄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송사의 DJ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선물이라면서 테입을 건넨 뒤 절대 방송에는 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 곡을 열심히 방송에 내보냈고, 곧 모든 방송사가 함께 이 곡을 틀었으며,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곤 1975년 11월 4집 앨범 《어 나잇 앳 디 오페라》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11번째 곡으로 담아 발표합니다. 드디어 그룹 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노래가 탄생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제 퀸의 시대가 열립니다.
퀸의 멤버들의 삶
퀸의 시대가 어떻게 펼쳐졌는가에 대해 더 말하기 전에, 먼저 퀸을 이루고 있는 멤버들의 삶을 간단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팀에 합류한 순서는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프레디 머큐리, 존 디콘의 순이지만, 가장 할 얘기를 많이 담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를 네 번째로 다루겠습니다.
기타를 맡은 브라이언 메이는 1947년 7월 19일 영국의 햄프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브라이언에게 피아노와, 자기가 즐겼던 우클렐레(기타의 높은 쪽 4줄만을 쓰는 작은 기타)라는 악기 연주법을 가르쳤습니다. 브라이언은 고등 학교 시절부터 밴드를 결성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도 브라이언의 음악 실력을 높이 샀고, 여러 가지로 지원했지요. 특히 브라이언이 연주하는 기타는 손수 만든 것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브라이언은 음악과 함께 천문학도 사랑해, 천문학을 공부하여 임페리얼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퀸 활동 초반에는 박사 학위 논문 준비를 함께 하다가, 곧 퀸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드럼의 로저 테일러는 1949년 7월 26일, 영국 노어폭의 킹스 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이 트루로로 이사하게 되어 여기서 고등 학교까지 마쳤지요. 그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기타를 배우기도 했으며, 혼자서 드럼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또한 치과 의사가 되기 위해 런던 의과 대학에 진학했지만, 중간에 마음을 바꿔 생물학 학위를 받았지요. 로저는 드럼에 가죽을 하나 덧대 연주하기 때문에, 다른 드럼 연주자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매력적인 드럼 소리를 냈습니다. 또 하나, 그는 아주 낮은 소리에서부터 찢어지는 고성(높은 소리)까지 내지를 수 있었기 때문에 퀸의 음악에 아주 큰 공헌을 했습니다.
베이스의 존 디콘은 1951년 8월 19일 라이세스터 오드바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 일곱 살 때부터 기타 연주를 배웠지요. 그는 고등 학교를 다니면서 특히 베이스 기타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존은 런던의 챌시 과학 기술 대학에서 전자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전자 공학 일급 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퀸 멤버들의 이력을 들으면 음악 활동과 학업을 함께 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어쨌든 존은 대학 2학년 때 퀸에 합류했던 것인데, 졸업 후에는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퀸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퀸이 2집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교사직을 계속했다고 하지요. 전자 공학을 전공한 디콘 덕분에, 퀸은 공연 도중 기자재가 고장이 나도 걱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금세 수리해 줬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의 본명은 프레디 불사라이며,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1946년 9월 5일에 태어났습니다. 영국 관리였던 아버지가 인도로 부임하게 되어, 프레디는 봄베이 기숙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학교 탁구 챔피언이었던 경력이 있을 정도로 스포츠를 좋아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 온 뒤 프레디는 디자인에 흥미를 느껴 1969년 일링 예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거기서 미술과 디자인 학위를 받았지요. 그는 퀸에 합류했을 때 자신의 이름을 ꡐ프레디 머큐리ꡑ로 고칩니다. ꡐ머큐리ꡑ란 ꡐ대장장이 신ꡑ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ꡐ신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신ꡑ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프레디가 자신의 이름에 어떤 뜻을 담았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프레디에게 번득이는 예지력(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뛰어난 지혜)이 있었던 것은 뒤에 이어지는 활동 가운데서 확인됩니다.
프레디는 그룹의 이름을 ꡐ퀸ꡑ이라고 지은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퀸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4집 《어 나잇 앳 디 오페라》 앨범 재킷에 새겨지기 시작한 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직접 만든 것이었습니다. 또한 최초로 ꡐ뮤직 비디오ꡑ라는 영역을 연 〈보헤미안 랩소디〉의 뮤직 비디오를 찍을 때에도 프레디의 미술적인 감각이 많이 발휘되었다고 합니다. 4옥타브(음계에서 어떤 음에서 위나 아래로 완전 8도의 간격을 가진 음, 혹은 그 간격)를 넘나드는 음역(음의 높낮이의 범위)의 목소리, 화려한 무대 매너, 그리고 탁월한 작곡 능력 등은, 그를 퀸의 대표적인 인물로 느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프레디는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동료들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 이틀 전인 1991년 11월 22일에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발표합니다. 그리고 폐렴 등의 합병증이 겹쳐 같은 달 24일, 45세의 나이로 눈을 감습니다.
퀸의 시대
퀸의 시대를 연 4집 앨범부터, 그들은 전성기를 누립니다. 4집 《어 나잇 앳 디 오페라》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명곡 단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실험 정신이 담긴 곡들이 앨범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앨범에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유아 마이 베스트 프랜드(You′re My Best Friend)〉,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 등의 흥겹고 고운 노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프로펫츠 송(The Prophet′s Song)〉이라는 노래가 들어 있었는데, 이 노래에 빠져들었다면 퀸의 마니아라 할 만하다고들 하지요.
어렵게 작곡되고 어렵게 제작되었지만, 그만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보헤미안 랩소디〉. 스무 개나 되는 퀸의 앨범에 실려 있는 수많은 곡들 가운데서, 이 노래가 그들의 대표곡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국인이 뽑은 최고의 팝송 10곡 가운데서도 비틀즈의 노래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런 사실에 기대지 않더라도, 이 곡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ꡐ랩소디ꡑ라는 말은 ꡐ광시곡ꡑ으로 번역되곤 합니다. 영웅의 이야기가 담긴 서사시적 성격을 담은 곡들을 보통 랩소디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집시, 즉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춤과 노래를 부르며 자유 분방한 삶을 산 사람들을 ꡐ보헤미안ꡑ이라고 합니다. 결국 ꡐ보헤미안 랩소디ꡑ란 ꡐ이미 만들어져 있는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아무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를 추구하며 산 사람에 관한 서사곡ꡑ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는 막 권총으로 한 남자를 죽인 사람이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이제 떠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 신 앞에서 이 사람을 놓아주느냐 마느냐 하는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사람에 대해서라도 과연 누군가에게 돌을 던질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인지, 과연 진실이라는 게 있는지를 묻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권위 있는 해설자는, 권총으로 어떤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존재로서 살아온 사람이 자기 자신을 권총으로 쏜 것이라고 풀이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살인이었는지 자살이었는지는, 이 음악을 듣는 사람들 각자의 해석에 맡겨질 문제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삶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ꡐ도덕ꡑ이라는 이름으로 던지는 비난과 질책에 과연 기준이 있는 것인지, 심지어 진실이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인지를, 이렇게 아름다운 곡 속에 담아서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퀸은 1980년대 내내 음반 판매량 최고 기록을 넘어서곤 했습니다. 또한 세계 어디로 공연 여행을 떠나든, 발붙일 틈이 없는 공연장과 최고의 교통 체증을 낳으며 다녔지요. 그들은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그룹으로 기록되어 기네스 북에 올랐고, 음반이 발매되기도 전에 가장 많은 예약이 접수되어 있는 그룹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퀸이 1991년의 프레디의 죽음으로 인해 돌연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프레디가 에이즈로 죽었기 때문에, 남은 멤버들은 프레디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렸지요. ꡐ여왕ꡑ이라는 그들의 그룹 이름이 말해 주지 않느냐면서, 그들이 모두 동성애자였다는 등의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경기장마다 그들의 노래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와 〈위 아 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인들은 그들이 〈라디오 가가(Radio Ga Ga)〉를 부를 때, 수많은 관중이 손을 위로 높이 뻗어 리듬에 맞춰 박수를 두 번씩 ꡐ짝짝ꡑ 치는 장면을 잊지 못합니다.
아직도 기성 세대는 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성 세대의 권위와 도덕에 맞서는 행위들을 서슴지 않는 록 그룹들의 반항이 이상해 보이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려고 하는 편에서 생각할 때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젊은 세대가 이들 록 그룹의 행동과 이들이 조롱하고 있는 것을 함께 비웃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젊은 세대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어서인지, 아니면 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자유 분방한 생각 속에 어떤 진실이 들어 있어서인지를 말이지요.
우리 귓가에서 항상 울리고 있는 음악을 먼저 몸으로 느끼기로 하지요. 그러면서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으로 그치지 말고, 다시 빠져 나와 그 노래 속에 담긴 메시지에 대해 생각하고 되뇌기로 합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상의 삶에서, 록 음악이 고발하고 있는 삶의 모순들을 나만은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한 걸음씩 옮겨 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