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눈
박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집 『싸락눈』, 1969)
[어휘풀이]
-말집 : 추녀가 사방으로 삥 돌아가게 만든 집
-조랑말 : 몸집이 작은 종자의 말
-여물 : 마소를 먹이기 위해 말려서 썬 짚이나 마른 풀
[작품해설]
박용래는 ‘소묘법(素描法)’이라는 표현 방법과 반복, 병렬에 의한 민요적 구조를 통해 그의 독창적 시 세계를 개척한 전형적 향토 시인이다. 그의 시가 대부분 정지적(靜止的) 언어로써 정상적인 구문보다는 명사나 명사형 어미로 시행을 마감시킨다거나 행간(行間)의 여백을 중시하는 것도 모두 소묘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그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정서를 펼쳐 보인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이외에는 동일한 구문의 4회 반복에 불과한 이 시는 ‘저녁 눈’을 통해 가려져 있는 것, 소외되어 있는 것, 그리고 잊고 있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먼저 시인은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리듬의 효과와 함께 유전(流轉)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저녁 눈’은 물질적 현상으로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이다. 그와 함께 위에서 세시한 네 가지 사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제 그것들 위로 ‘붐비듯이’ 늦은 저녁 눈이 쏟아져 내린다. 애상적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사물들과 결합되어 더욱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 풍경을 한 장의 사진처럼 묘사하고 있을 뿐,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4행시 형식의 커다란 행간 속에 그 감정이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문명의 거센 물결에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 토속적 세계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눈발’로 환치되어 ‘붐비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붐비다’로 표현함으로써 적막한 분위기와 ‘소멸’의 이미지를 역동성의 눈발로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로 하여금 화려한 문명의 도시보다는 밀려나 있는 변두리 즉 향토의 사물 위에 머물게 한다 시간적 배경으로 제시된 ‘늦은 저녁’이라는 하강적 이미지와 ‘눈발’이라는 소멸의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 낸 ‘저녁 눈’은 공가적 배경이 되는, 같은 이미지의 네 가지 사물들과 결합됨으로써 이 작품을 ‘텅 빈 아름다움’의 시로 만들어 주고 있다.
[작가소개]
박용래(朴龍來)
1925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강경상업학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 「황토(黃土)길」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 수상
1969년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 수상
1980년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0년 사망